[2-8] 동양의 비스마르크 p249
1841년 현재의 山口縣인 죠슈에서 태어난 이등박문은 20대인 1860년대 봉건 막부를 타도하는 혁명전쟁에 참여해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던 혁명가였다. 메이지 혁명이 성공하자 스스로 정권에 참여하게 된 이토는 1870년대 이노우에와 함께 영국에 유학하면서 메이지 혁명의 기치인 존왕양이尊王攘夷 중 양이攘夷 노선을 포기하게 된다. 애국심에 불타던 대일본제국의 청년 이토의 눈에 유럽인들은 단지 침략자로서만 비쳐졌으나, 막상 스스로 유럽을 견학하게 되자 유럽이 근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산업혁명의 기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토와 이노우에는 일본이 유럽에 너무도 뒤떨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당시 서구 문물을 체계적으로 학습한 일본 신세대의 대표격인 인물들이다. 스스로 혁명에 참여해 봉건체제를 타도한 혁명가들이 선진국에 유학해 근대국가 건설에 꼭 필요한 각종 지식을 습득해 왔으며, 또한 이들의 지식이 그대로 신국가 건설에 반영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이 당시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였는가를 보여준다. 이같은 일이 각 단계별로 모두 힘들고 희귀한 일이기 때문에 근대일본의 부상은 세계사에서 하나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사상을 지닌 청년집단은 어느 나라에나 나타나게 마련이다. 조선에는 김옥균과 박영효로 대표되는 전투적인 개화당이 있었으며 청에는 이홍장과 원세개가 있었다. 당시 이들은 모두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위에 말한 일본의 과정 중 조선의 개화당은 봉건체제를 타도하는 첫단계부터 실패하고 말았으며, 청의 신진세력들은 아예 혁명을 시도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나약하게 구체제와 타협하고 말았던 것이다. 근대 일본의 건설에서 이처럼 기적과 같은 과정이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역시 막부시대 축적된 일본의 발전된 봉건제도가 뒷받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가 지휘한 독일의 통일과 부국강병책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독일에서 낡은 체제가 파괴되고 혁명의 기운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비스마르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오랜 쇄국정책으로 이같은 외부의 혁명이 유입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독일과 같은 수준의 부국강병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등박문은 비스마르크보다 운이 더 좋았다.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비스마르크는 당시 35개 군주국과 4개 자유도시로 분열되어 있던 게르만민족을 통일시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정치협상과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오스트리아의 방해공작으로 대게르만주의에서 소게르만주의로 후퇴한 이후에도 비스마르크의 독일연방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헤아릴 수 없는 생존의 위험에 직면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느슨하기는 했지만 오랜동안 막부정권에 의해 통일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존왕제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섬나라이며 아시아의 동쪽끝이라는 이유로 열강에 의해 거의 방해받지 않고 순조롭게 신국가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홍장과 비스마르크, 이등박문을 비교해 볼 때 중국의 신진세대들이 왜 서태후를 죽이고 일본이나 독일처럼 입헌군주제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는데, 이는 역시 중국에 봉건제도가 없었다는 사실로 귀착되는 것이다. 즉 이토와 이홍장의 차이가 당시 일본과 중국의 차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일본과 독일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입헌군주제의 통일국가를 건설했고, 결국 부국강병에 성공해 산업혁명의 본거지인 영국보다 더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독일연방의 탄생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 주도했고, 대일본제국의 탄생과정에는 이토의 죠슈-사쓰마 연합이 주도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처럼 이등박문과 같은 자질있는 지식인 혁명가가 스스로 성장해가면서 시종일관 격변기의 일본을 이끌었다는 것은 일본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즉 이등박문이라는 인물은 일본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과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된다. 이등박문은 원래 하야시 도시스케 林利助 라는 이름을 가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으나 하급무사의 집안인 이토 家의 양자로 들어가 무사의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 청년기 이등박문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에서 수학했는데, 이 또한 천운을 만난 것이다. 요시다 쇼인은 아무런 외국 견학이 없이 스스로 눈을 뜬 일본의 개화1세대로서 이 송하촌숙으로부터 일본의 근대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1854년 페리제독의 함대에 몰래 올라타 미국에 밀항을 시도한 사건으로 유명한 요시다 쇼인은 1830년 하기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개화지식인이다. 페리 함대에 의한 불평등조약에 불만을 품고 막부에 저항하다 30살의 나이에 막부 독재자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송하촌숙에서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 高衫晋作, 이토 히로부미 등 9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삼아 더더욱 막부타도 운동에 헌신했고, 결국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주역이 되었다. 그를 신으로 모시는 쇼인 신사와 그가 강의하던 쇼카손주쿠는 오늘날에도 야마구치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남아있다.
조선에도 비슷한 시기 유대치라는 선각자가 나타나 양반과 왕족인 김옥균, 박영효 등을 교육시켜 개화당을 결성했으니 유대치-김옥균의 관계는 요시다 쇼인-이등박문의 관계와 놀랄만큼 비슷하다. 만약에 조선에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이들이 일본과 협조하여 조선 혁명을 이끌었다면 아마도 조선은 뒤늦게나마 일본과 함께 아시아 해방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불가능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역시 아시아에서 일본만이 그 같은 신속한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발전된 사회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등박문은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다시 1870년에는 화폐제도와 은행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등박문의 영국 유학과 미국 유학은 모두 정부 관료의 자격으로 공식적인 견학이었으며 그가 습득해 온 선진국의 지식과 자료들은 모두 그대로 근대 일본제국을 건설하는 데 이용되었으니, 조선이나 청국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등박문이 일본 정계의 1인자로 부상한 것은 1880년대 초였다. 당시 일본은 사이고가 주동한 세이난 전쟁이 진압된 이후 다시 자유민권운동, 즉 급진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 때 정부 내 급진파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즉시 1882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883년에 영국식 의회와 정당을 창설하고자 했는데, 이는 인기에 영합하는 전형적인 대중추수주의적인 행태였다. 이에 분노한 이등박문은 정부 내 동지들을 규합하여 북해도 개척에 관련된 비리 스캔들을 문제 삼아 급진파들을 축출하고 실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등박문의 입장은 헌법제정과 의회창설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므로 충분히 각국의 제도를 연구한 다음 1889년에 제헌, 1990년에 의회개설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등박문은 선진국의 헌법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유럽으로 떠나 연구에 착수했다. 이후 1885년 일본최초로 내각이 창설되어 이등박문은 초대 내각총리에 부임하였으며, 1889년 일본 최초의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이 때 이후 근대 일본은 이등박문의 지휘 아래 일청전쟁, 일러 전쟁 등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 승리에 명실 공히 열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니, 역사가들이 이등박문을 일컬어 세계에 발을 내디딘 일본 그 자체와 같다고 평한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닌 것이다. 즉 근대 일본의 기적은 이등박문의 지휘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니, 이 같은 출중한 정치가는 아마도 동양 역사상 다시 등장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정계의 실권을 장악한 이등박문이 러일전쟁 이후 조선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정치와 관료제도, 화폐, 교육, 치안 등이 신속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조선과 만주는 임자 없는 불모지로서, 청과 러시아, 일본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고 결국 두 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과 만주를 통치하는 것은 순리에 따른 정당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과 청의 수구파들은 이등박문이 이 지역에 대한 침략을 선도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생각일 뿐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수구파의 대표인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살해한 뒤 이등박문의 죄상을 다음과 같이 15개 항목으로 주장한 바 있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 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약간이라도 역사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같은 안중근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억지스러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폐사용과 교육정책은 이등박문이 조선 통감으로 재직하던 4년 동안의 대표적인 치적이었는데, 안중근은 이를 죄악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경제학에 무지한 조선 왕실과 관료들에게는 현대적인 화폐정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수백년동안 동전만이 유통되어 왔다. 게다가 돈이 부족할 때마다 조선 정부에서는 當五錢,(상평통보 5개에 해당하는 액면가를 가진 동전) 當百錢 등을 발행해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켰고, 이 동전들은 실제 통용되는 가치와 액면가치가 달라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동전은 보관과 운반이 불편하였으나 현대적인 중앙은행 제도와 화폐정책이 없는 조선으로서는 지폐를 사용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등박문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조선에서도 사용하게 하였으니, 이는 조선의 화폐가 일본의 화폐정책에 연동 고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조선의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외 민황후를 시해했다거나 정권을 강제로 빼앗았다거나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등의 죄목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등박문에게 터무니없는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또한 이등박문이 천황을 속였다거나 천황의 아버지를 죽였다거나 하는 주장은 사실도 아니려니와 마치 안중근 자신이 일본국민인 것처럼 남의 나라 걱정을 해주고 있는 것이어서 실소를 불러 일으킨다. 이처럼 안중근의 주장은 일관성도 없고 진실성도 없으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정체성이 오락가락하고 있어서 그가 얼마나 무지한 자인가를 알게 해주고 있다. 이 주장들을 보면 안중근은 그의 개인적인 불만을 모두 이등박문의 탓으로 돌리고 그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분풀이를 한 것이다.
이처럼 억지주장과 이유 없는 원한으로 가득 차 동양이 낳은 위대한 정치가를 살해한 수구반동을 한국에서는 다시없는 애국자이며 위인이나 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미래에 언젠가 한국인들이 역사에 대해 올바른 안목을 가지게 된다면 이등박문은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근대화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게 될 것이며, 안중근의 행동은 부질없는 수구 민족주의로서 비난받게 될 것이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이등박문에 대해 조선을 침략한 악의 상징으로, 안중근은 정의의 상징으로 일방적인 시각을 주입받아왔다. 일본에서는 이토에 관한 전기와 평전, 소설 등이 수십 종이나 출판되었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관한 전문가가 단 한명도 없고, 단행본 한권 없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천박했는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반면 안중근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고, 일본 천주교인들은 안중근에 대한 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최근 2000년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이등박문의 평전 한권이 번역 출판되었다.(이등박문, 도서출판 中心) 이 책에는 이등박문이 조선통감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는 한국 황태자인 영친왕의 태사(太師)<소사(少師)는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당한 뒤 조선8도의 유림 대표들은 한군데 모여 이토의 치적을 기리는 집회를 열고 동상을 건립했으며, 각 도별로 謝罪團을 구성해 회초리를 싸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매를 자청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 황실은 이등박문이 사망한 뒤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를 추모했다는 사실도 언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천주교 조선대교구의 뮈텔 신부가 일기에서 이등박문의 치적을 칭송하면서 끝내 안중근의 고백(告白)종부(終傅)성사(聖事)를 거부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당시 조선인들의 이등박문에 대한 정서가 오늘날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이등박문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조선에서는 모든 정치가와 관료들이 환영단을 구성해 인천항까지 마중 나갔으며, 인천에서 경성에 이르는 연도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기를 흔들며 이등박문을 환영했을 만큼 그는 조선에서도 인기 있는 정치가였다.
최근 한국의 한 신문에는, 기자가 동경의 거리에서 몇몇 고교생들에게 이등박문에 대한 인지도를 취재한 기사가 실렸다. 기자의 질문에 대해 고교생들은 “이등박문이 누구야? 너 들어봤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혹시 천황 아니었나?” 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보았다. 현대 일본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이처럼 무지하다는 것은 그 교육의 내용이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일본인들도 이제는 자신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인식이 바로잡혀야만 한국의 인식도 바로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2-9] 타이완의 아버지 고토 신페이 박사 p258
<타이완이 경험한 일본통치의 가장 큰 특징을 한가지로 말한다면, 그것은 ‘근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 통치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은 전쟁이 끝난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고스란히 남아 타이완의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물론 일본제국이 타이완에 근대화의 기초를 건설한 것이 기본적으로 당시 일본 국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만약 타이완이 그와 같은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타이완과 중국통치를 받은 하이난 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 주, 우리는 일본 식민통치 시대에 경험한 타이완의 근대화와 역사적인 발전, 또한 고토 신페이 박사가 어떻게 해서 타이완 산업발전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담강대학교 역사학과 임정용 교수의 논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타이완의 짧은 400년의 역사에는 5번의 통치자 변화가 있었다. 근대적인 정부조직은 17세기 초 화란 통치 때 처음 등장했고, 정성공과 그의 아들에 의한 시대가 있었으며, 청 왕조와 일본제국의 통치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중화민국의 통치가 있었다. 잦은 권력 변화로 인해 타이완 400년 역사의 각 시기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발전시켰다. 일제시대의 경우, 이 기간을 특징지어 한 단어로 간단히 설명한다면 그것은 '근대화'라고 할 것이다.
일본은 1895년 일어난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펑후 제도를 포함한 타이완 지역을 획득했다. 그러나 최소한 1895년 6월부터 1898년 3월까지는 미개한 대만 땅은 일본 측의 표현을 빌자면 '건드리고 싶지도 않은' 대상이었다. 근대적인 교육제도가 없었던 탓에 대부분의 주민은 아직 문맹이었으며 문화수준도 대단히 낙후된 상태였다. 대만 주민의 문화와 생활상태는 일본과 매우 달랐다. 청나라가 통치한 212년의 기간동안 대만에서는 사회조직과 행정력이 확산되지 못한 탓에 미개한 풍습이 만연하여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한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위생환경이 깨끗하지 못해 각종 풍토병이 범람하고 있었다. 일본통치 초기 5년 간의 <대만일일신보>의 기사를 펼쳐보면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기사를 여러 군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대만을 경영하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일본제국 의회에서는 대만매각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대만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프랑스에 이 지역을 1억 엔을 받고 팔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8년 3월 4대 총독 코다마 겐타로가 대만으로 부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코다마는 고토 신페이를 민정장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의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대만의 근대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생각은 <생물학적 식민지 경영>이라는 그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대만을 일본의 기준으로 통치하려하는 것은 도미의 눈을 넙치에 이식하는 것과 같은 무리한 일이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일본제국의 각종 제도를 대만에 직접 이식한다면 아직 근대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대만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와 충돌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토 박사는 타이완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점진적 동화'라는 정책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대만통치의 기본정책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기나긴 논쟁, 즉 내지연장주의(동화정책), 특수통치주의(비동화정책) 사이의 논쟁이 비로소 종식되었다.
고토 신페이는 1898년 3월부터 1906년 11월까지 8년 동안을 대만의 민정장관으로 재임했다. 그는 위생환경을 정비하는 사업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가지 조사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가 창안한 통일화폐 시스템은 금융과 상업유통을 촉진시켰다. 그는 또한 각종 교통운수 시스템을 만들고 확장했다. 수력 및 화력 발전소를 만들어 대만 공업의 동력 기반을 정립하였다. 농업 부문에서는 품종개량 사업을 시작하여 대만의 쌀과 설탕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해야할 것은, 대만의 근대화 작업은 그 진행 속도에서 일본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1868년 메이지 유신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유신이 추구했던 목표는 식산흥업(殖産興業, 산업의 씨를 뿌리고 발전시킴)과 부국강병(富國强兵, 부유한 나라와 강한 군대)이었다. 그러나 1877년 이전 일본의 제국 정부는 끊임없이 무장봉기를 시도하는 국내 불만세력들을 진압하는 일로 인해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의 근대화작업은 사실상 이 모든 군사적 충돌이 완전히 멈춘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895년에 일본은 대만을 새로운 영토로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 자체의 근대화 작업도 대만의 그것에 비추어 그리 일찍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여 주체적인 근대문명을 건설하려 노력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관리들은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들에서 대만은 일본의 중요한 시험무대가 되었다.
일본은 대만에 주민등록제도를 도입하고 인구센서스를 실시했다. 이는 그 뒤에 이루어진 토지조사와 임야조사, 그리고 대만의 전통관습에 대한 조사를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근대국가에 있어서 통계와 조사 사업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으로서, 특히 인구 센서스는 다른 모든 종류의 통계와 조사 작업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대만이 첫 인구센서스를 이미 1905년에 마무리한 데 비해 정작 일본은 1920년에 이르기까지 인구 센서스를 행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인구센서스라는 개념에 대해 무지했던 탓에 식민지인 대만보다도 15년이나 지난 뒤에야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정치가들은 주민등록 사업과 인구 센서스의 차이를 알지 못한 탓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인구센서스에 예산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 1905년 대만에서 첫 인구센서스가 이루어졌을 때에도 그 이름은 ‘제1차 대만 임시 호구조사’라는 명칭아래 진행되었다.
1915년에 또다시 인구센서스가 실행되었을 때에도 그 명칭은 ‘제2차 대만 임시 호구조사‘였다. 사실 ’인구센서스’는 정확히 말하면 ’국력에 관한 조사‘이다. 인구 센서스를 책임지고 있는 통계학자들이 인구조사라는 애매한 명칭보다는 국세國勢조사라는 이름을 선호하는 까닭은 이 조사가 단순히 인구 숫자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과 경제, 계층 조사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나라들에게 그 나라의 총체적인 국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이유로 당시 구미 열상은 모두 정기적으로 인구 센서스를 실시해 그 결과를 발표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이 문명국의 대열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이 같은 점에 대한 통계학자들의 끊임없는 설득과 압력단체의 활동이 계속된 결과 일본의 정치가들은 1920년에 가서야 인구센서스에 예산을 배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만 역시 비로소 모든 조사 작업을 ‘국세國勢조사’라는 이름아래 추진할 수 있었다.
상하수도 시설에 있어서, 대만 총독부는 1895년 말 영국의 엔지니어인 버튼을 공중위생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해 대만의 공중위생환경을 정비하고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1898년까지 타이난과 타이페이 등 2개 주요도시의 상하수도 시스템이 완공되었고, 그 숫자는 1934년까지 83개로 늘어났다. 당시 대만의 상하수도 시설은 이미 일본의 주요 도시에 비해서도 앞선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의 통치는 대만경제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대만 점령 초기 일본제국 정부는 대만 총독부에 매년 700만 엔의 보조금을 지급했는데, 처음에는 이 같은 추세로 30년이 지나야 대만의 재정자립이 가능할 것으로 계산했었다. 그러나 역동적인 산업발전이 순조롭게 지속되고 정부 독점사업과 토지세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대만은 1905년에 이르러 재정자립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07년부터는 수입 초과금으로 제국 정부에 부채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
1935년 10월, 대만 총독은 일본 통치 아래 대만이 이룩한 근대화의 성과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대만통치 40년 기념 대박람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그 독특함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공전무후의 박람회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박람회는 당시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를 비롯해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으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사실 일본통치 시절 대만이 성취한 ‘식민지근대화‘의 유산은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대만경제 발전에 부인할 수 없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물론 일본제국이 타이완에 근대화 작업을 실시한 것이 당시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만약 타이완이 그와 같은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타이완과 중국통치를 받은 하이난 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을 것이다. (『타이완 뉴스지』 2001년 3월12일자 기사)
위의 기사를 보면, 대만의 역사학자들은 대만이 일본의 통치를 받은 것이 오늘날의 대만을 존재하게 한 가장 큰 이유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고토 신페이 박사를 근대 대만의 아버지로 추앙하며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고토 신페이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아직도 이토를 망국의 원수쯤으로 가르치고 있다.
특히 위 글에서 중국의 하이난성과 대만을 비교한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하이난과 대만의 역사에는 일제시대 뿐 아니라 전후 서로 다른 체제를 선택했다는 차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2차 대전 이후 대만을 통치한 국민당의 개발독재가 대만 경제발전에 미친 공헌보다도 일본통치 시대 마련된 식민지근대화의 유산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일제시대의 공헌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경제발전의 성공을 박정희 개발독재의 성과로 평가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대만은 20세기 초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1970년대 이후 무역에 중점을 두는 발전 전략을 택해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선진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지역이다. 하지만 대만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며 오늘날에도 자동차, 가전 등 많은 분야의 산업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일본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산업구조에서는 자동차, 전자 산업에서부터 철강, 조선, 반도체, 석유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발전전략을 고집하고 있다.
대만은 1980년대 중반 일본 상품에 비해 경쟁력이 뒤떨어지는 자동차, 가전, 철강 등 많은 산업을 포기하고 일본에 시장을 개방하였으며, 문화면에서도 영화와 TV 드라마, 가요와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시장을 완전 개방하여 일본의 절대적인 영향력아래 놓이게 되었다. 오늘날 대만 청소년들의 우상은 대부분 일본 연예인들이며 그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아무런 저항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반면 한국은 전후 일본과 국교수립 과정에서부터 무리한 주장으로 일관해 15년이라는 기나긴 협상 끝에 국교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그 댓가로 한국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받아냈고 일본의 산업구조를 그대로 모방해 '후발성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처럼 산업구조는 일본을 그대로 복제하면서도 오랫동안 수입선다변화 정책이라는 사실상 일본 상품만을 수입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해 모든 일본산 소비재를 수입금지해 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일본 문화에 대해 '왜색문화'라는 명목으로 수입을 금지하고 국민들에게 반일교육을 강요함으로써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에 대해 강한 반일감정을 지니게 되었다.
대만과 한국은 공히 일본의 통치로 인해 무지몽매한 농업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일대 도약을 이룩했고 그 영향으로 인해 빠르게 선진공업국의 대열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나라가 일본에 대해 이처럼 상반되는 태도와 국민감정을 가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대만에는 일본의 통치를 받기 이전 이렇다할 독자적인 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던 데 반해 조선에는 비록 명,청의 속국이긴 했지만 500년간이나 존속되고 있던 왕조가 있었다. 그로 인해 개항 이후 합병에 이르기까지 외세와 야합한 집권세력의 정권유지 시도가 계속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충돌과 부작용이 생겨났다.
그 외 두 번째 이유로는 대만에 대한 일본통치의 기간이 조선에 비해 15년 길었다는 것, 세 번째로는 전후 장개석 군대가 대만을 점령하면서 수많은 대만인을 학살한 까닭에 대만인들 사이에는 아직도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가 많이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임진왜란)에 대한 기억 같은 것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거의 무조건적인 반일 감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집단심리 현상이며 연구대상이라 하겠다.
[2-10] 대동아 공영권의 꿈 p267
즉 1910년대 일본제국은 급변하는 세계정치의 조류 속에서 직접 전쟁을 겪지 않으면서도 전쟁 물자를 판매해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각종 영토와 이권을 차지해 국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과 미국은 막대한 자원 소모와 산업시설 파괴, 인명피해를 감수한 데 반해 일본은 배후에서 정치 경제적인 이득을 취함으로써 열강 사이의 기존 세력관계에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러했듯이, 이 시대 일본도 점차 경제력과 군사력이 성장함에 따라 전쟁이나 동맹을 통해 점차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일본은 1895년 청나라와 전쟁을 통해 대만을, 1905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조선반도와 요동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 등을 영토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이 극에 달했던 1942년에 이르게 되면 일본은 동서로 인도에서 하와이까지, 남북으로는 적도에서 몽골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영향권에 둘 수 있었다.
1930년대는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인해 세계 자본주의의 미래가 암담하던 시절이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제국, 특히 스페인과 독일, 이탈리아 같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파시즘이 대두하면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강한 탄압을 받았는데, 이런 조류에서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은 1930년대 치안유지법이라는 강력한 공안법안을 만들어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파시즘은 이탈리아나 독일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카리스마를 지닌 파시스트가 등장하여 지도자로 부상하는 대신 일본에서는 점차 내각에 군인들이 많이 참여하면서 군국주의의 색채를 띠게 된 것이다.
이 시대 일본의 군국주의는 살아있는 신인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이 단결하여 아시아를 유럽인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활발하게 군사행동의 범위를 넓혀 가는 형태로 나타났다.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 대만을 막론하고 반체제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는 강력한 탄압이 가해졌다. 1930년대 중반이 되자 일본 내각은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군부에 의해 휘둘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예컨대 1931년의 만주사변이나 1937년 마르코폴로다리 (노구교) 사건 등은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훈령이나 지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관동군의 지도부가 독자적으로 군사행동을 시작하고, 이를 일본 내각에서 사후 추인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아시아 대륙을 향해 진출하면서 일본은 황인종의 단합과 공동번영을 정치 슬로건으로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기 직전인 1931년 5족 화합의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이는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몽골의 다섯 민족이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뜻으로서 지금으로 보면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단일블록을 제창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33년 일만지 블록이라는 슬로건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일본과 만주, 지나(중국)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황인종 단합이론은 이 같은 발전과정을 거쳐 드디어 1940년 8월 1일 마쓰오카 일본 외상의 담화를 통해 역사적인 '대동아 공영권'에 이르게 된다.
대동아 공영권의 요지는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과 각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하여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며, 그 범위로는 일본(조선과 대만 포함), 중국, 만주를 중축으로 하여 동남아시아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을 언급하고 있다. 1940년 8월은 일본의 군부가 내부적으로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한 전면전을 결심하고 있던 시기로서, 대동아공영권은 사실상 일본이 향후 전쟁을 통해 점령하고자 하는 모든 영토의 목록을 제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은 실제로 중국의 대부분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을 유럽인들로부터 해방했지만,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에 대한 공격은 실패하고 만다. 사실 중국과 동남아, 인도까지는 몰라도 예나 지금이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일본군에 의해서 해방될 이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슬로건은 내용 자체로는 모든 아시아인에게 고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아쉽게도 일본 제국주의의 광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침략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된 탓에 이후 오랜 세월동안 그 누구도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 용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동아일보라는 신문이 아직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매체로 살아남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에 창간되었으므로 이것이 1930년대 말에야 출현한 대동아공영권의 사상을 반영한 이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동아시아 공동체의 개념은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가 활동하던 1890년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이므로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보기도 힘들다. 어찌 되었거나 '동아시아 지역'이라는 국제적인 개념을 신문의 이름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시대를 앞서본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얼핏 대동아공영권의 개념을 떠오르게 하는 이러한 이름을 가진 신문이 주요 언론사로 활동한다는 것은 역사에 관한한 자기비하에 빠져 자학사관을 강요당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이 대동아 공영권의 슬로건을 다시 무덤에서 끄집어내 재활용 가능성을 타진해볼 때가 되었다. 최근 세계 정세의 변화가 아시아인에게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존속하던 냉전체제가 무너진 이후 세계는 유엔과 세계무역기구 체제 아래 블럭화와 세계화라는 상반된 조류가 동시에 진행되는 일대 재편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유럽공동체와 북미자유무역지대가 결성됨으로 인해 전후 세계 경제의 3대 축이었던 서유럽과 북미, 동아시아 가운데 유일하게 동아시아만이 블록화의 조류에서 뒤쳐진 상황이 된 것이다. 지난 세기말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경제권을 형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었지만 미국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역내 회원국들의 내부사정으로 인해 한 발짝도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 경제권이 결성되는 것은 자유무역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그 대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하는 환태평양경제권을 구성하자고 주장하면서 일본과 한국에게 동아시아 경제 블럭에 참여하지 말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군사적으로는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위성국가들을 이용해 중국을 포위함으로써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봉쇄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일찍이 유럽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단일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유럽공동체의 실험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자잘하게 분산된 국가 체계로는 미국의 연방체제에서 비롯되는 강력한 경쟁력을 감당할 수 없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20세기 들어 미국이 정치 경제 군사 과학 등의 분야에서 성취한 놀라운 성과들은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는 연방체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의 연방은 1700년대 말 동부 13개 식민지의 소규모 연방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1800년대 남북전쟁으로 기나긴 갈등을 겪으면서 무력으로 남부를 연방에 복속하고 서부에서는 인디언과 멕시코, 캐나다 등과 전쟁을 벌여 연방을 태평양 연안까지 확장한 결과 오늘날의 미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남북전쟁에서 남부 동맹이 승리했거나 휴전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면, 오늘날 북미지역은 유럽이나 중남미처럼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국가가 난립하는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대륙이 하나의 정부 아래 통일되고 연방체계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미국의 영토는 알래스카와 하와이, 태평양 등으로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 자연스럽게 세계의 주인행세를 하는 초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시작된 유럽공동체 운동도 성공을 거두어 이제 하나하나 눈에 띄는 성과들을 획득하고 있다. 1980년대 말 역내 국가들 사이에 자유무역지대가 형성되어 관세가 철폐되었고 1993년에는 국경선이 사라졌으며, 2002년부터는 유럽연합에 참여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단일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의회와 유럽중앙은행의 권한도 날로 확대되는 추세이며, 정부 기구인 유럽위원회가 위치한 브뤼셀은 점차 유럽의 수도로 부상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정치 경제 문화적인 활동에서 사실상 유럽은 세계무대에 단일국가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머지않아 유럽 대통령이 선출되고 유럽 육군, 유럽 공군이 창설되는 등 정치 군사적인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결국 2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유럽공동체는 러시아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유럽연방으로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캐나다, 미국, 멕시코 등 북미 블럭을 구성하고 있는 3개국도 결국은 캐나다와 멕시코가 북미국가연합(USA)에 가입해 단일 연방을 이루는 미래를 꿈꾸며 날로 통합의 강도를 높여나가고 있는 추세다.
이처럼 유럽과 북미대륙은 점차 영토를 넓혀가면서 단일 연방체를 구성하고 있는데 동아시아의 미래는 아직도 안개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불투명하기만 하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한국과 대만의 성공을 흉내 내 수출드라이브에 의한 개방과 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개발에 성공을 거두고는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강압적인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장래가 불투명한 상태이다. 중국의 권력자들은 앞으로 100년 간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지만, 그들의 경제성장이 계속되는 한 지금의 체제로는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동남아시아는 날로 성장하는 중국의 군사력에 위협을 느껴 12개국이 참여한 아세안을 결성해 대항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후진국 블록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블록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내에 기술력과 자본, 자원과 인구 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법이다. 유럽공동체의 앞날이 밝은 것은 역내에 6억의 인구와 광대한 영토, 무한한 자원이 있고 무엇보다 서유럽의 선진공업국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아세안의 경우 선진국이래야 겨우 300만 남짓한 인구를 가진 도시국가 싱가폴 하나뿐인 상황에서 독자적인 경제권 구성은 기대하기 힘든 상태이다.
따라서, 일본과 남북한, 중국, 아세안,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광대역 경제블럭을 구성하고 장기적으로 이를 북미와 유럽형태의 연방체제로 발전시키는 것만이 동아시아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의 대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바로 60년 전 대일본제국이 꿈꾸었던 대동아 공영권의 모습이다. 만약 일본이 대동아 전쟁에서 패하지 않고 휴전 등을 통해 1940년대의 영토를 유지하면서 대동아 공영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면 오늘날 아시아는 미국이나 유럽을 능가하는 초강대국, 대동아연방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약간 더 현실적인 시나리오로서 일본이 1941년 미국과 진행하고 있던 평화협상에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만주와 중국북부, 대만과 조선, 태평양 지역 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면 아시아를 위해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위의 지역만 해도 인구가 3억이 넘는 데다 영토 면에서도 미국만은 못하지만 미국의 1/3은 되는 크기인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 중국본토가 공산화되었을 때 몽골 정도는 자동으로 대동아공영권에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니 그렇게 되었더라면 대동아연방에 소속된 3억 인민의 삶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풍요로웠을 것이다. 이 같은 시나리오에서 볼 때 일본의 패전은 아시아인의 행복을 위해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일본제국이 패망함으로 인해 아시아는 그 뒤 어떤 운명을 걸었던가. 일본은 원자폭탄을 포함 미군에 의한 각종 무차별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경제공황과 인플레이션으로 한순간에 거지가 되어 오랜 기간동안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중국은 부패한 국민당과 이에 맞선 공산당의 내전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으며, 공산당에 의한 통일 이후에도 잔혹한 일당독재에 신음하면서 길고 긴 가난과 고통의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동남아 역시 월남전과 크메르루즈의 발호, 군사독재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아직까지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당시 아시아 각국에서 일본의 항복과 패망을 환영했던 사람들은 이처럼 일본의 패망이 곧 아시아의 불행을 의미한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이민 유학 등으로 인종간의 교류가 활발해져 지구촌이라는 용어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만, 인종의 벽이란 예상외로 넘기 힘든 것이다. 특히 그것이 개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인종으로 구성된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되었을 때 인종의 벽은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1997년 동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닥쳐 신흥개발국들이 경제공황에 빠지게 되었을 때, 이미 4년 전 이를 예견한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일약 스타가 되었고 아시아 각국은 백인들의 경제기구인 IMF에 모든 경제주권을 내준 채 미국식으로 경제시스템을 뜯어고쳐야만 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당시 노벨상 후보 1순위로 꼽히면서 이미 미국의 경제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폴 크루그먼이 동아시아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으며 곧 망할 것이라는 악담을 퍼부어 대고, 곧이어 조지 소로스 펀드를 비롯한 국제 투기자본들의 농간에 의해 동아시아 국가들이 줄줄이 참담한 공황상태로 쓰러지게 된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였는가하는 것이다.
몇 푼의 돈을 빌려주겠다는 조건으로 한국의 경제주권을 장악한 IMF가 한국 정부에 요구한 첫 번째 조치는 초고금리 긴축정책이었다. 당시 IMF는 저금리 상황에서도 운영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던 상황에서 연 30%가 넘는 초고금리를 강요, 5대재벌을 포함한 사실상 한국의 모든 기업을 기술적인 부도 상태로 몰아갔다. 과연 이것이 IMF의 무지로 인해 우연히 발생한 실수였는지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IMF가 강요했던 정책으로 인해 엄청난 고금리고 회사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던 대우와 현대그룹은 곧 부도가 나 쓰러졌는데, 사실상 이로 인해 한국경제는 회생불능 상태로 빠져들 가능성이 많았다. 그것을 견뎌낸 과정엔 우리가 알 수 없는 비화가 많았을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기적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 같은 사태는 전체적으로 미국의 시나리오에 따라 전개된 것으로 보이며,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에 위협을 느끼고 호랑이가 더 크기 전에 아예 싹을 잘라버리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최근 미국과 유럽은 구 유고연방에서 발생한 인종 및 종교분쟁에 적극적으로 간여해 사태를 해결하고 주동자인 밀로셰비치를 전범재판소에 회부하는 등 절친한 우정을 과시했다. 이 같은 선진국의 개입으로 인해 구 유고연방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았으며 소수인종에 대한 테러가 종식되고 민주적인 질서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들이 이라크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는가. 아랍 역내에 분쟁이 발생하고 선진국이 무력개입을 한 것까지는 똑같지만 미국은 후세인을 추방하지도 않았고 이라크에 민주적인 정치시스템을 이식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이라크 국민들은 여전히 후세인 독재체제 아래 굶주려 죽어가고 있으며,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중동 국가들도 미개한 전제정치와 독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인들은 다른 인종들의 국가가 발전하는 것을 '진심으로' 원치 않는 것이다.
이는 과거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도 미국이 군사독재 정권을 열심히 지원함으로써 이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은 행태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황인종들은 미국의 방해공작과 분열책동으로부터 벗어나 장기적으로 역내 단합과 황인종의 공동번영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시 대동아 공영권의 이상이 부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내에는 고도의 산업구조를 가진 선진국들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지역은 아직 개발도상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통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후진 개발도상국의 주민들은 임금이 높은 공업국가로 이주함으로써 순식간에 생활수준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반면, 무제한 이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선진국들은 이민을 억제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 같은 상태에서는 단기간의 통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선진국들이 먼저 경제통합체를 이룩한 다음 시간을 두고 일정 수준의 발전 단계에 도달한 역내 국가들을 차례로 흡수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며, 또 실현 가능한 유일한 방식이 된다.
일단 동아시아 역내에는 일본과 한국, 대만, 싱가폴, 호주와 뉴질랜드 등 몇몇 선진국들이 있다. 이 가운데 아세안 블록에 가입해 있는 싱가폴을 제외하면 일본과 한국, 대만, 호주와 뉴질랜드 등 5개국이 동아시아 공동체의 첫 번째 회원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첨단 산업위주의 수출지향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한국, 일본, 대만과 자원부국인 호주 뉴질랜드는 상호 보완하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어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빠른 시일 내에 유럽공동체와 같은 단일 블록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연방 국가로서, 영국계 백인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북미와 중남미를 침략한 백인들과 달리 원주민들과도 잘 화합하여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이들은 과거 영국과의 무역에 경제의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는데 1980년대 중반 영국이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 뒤부터는 무역액이 줄어들어 오랜 기간동안 불황을 겪어야만 했다. 이후 호주는 전통적인 백호주의를 포기하고 아시아국가임을 선언, 동아시아 블록에 편입되기를 희망해왔다. 유럽과 북미가 블록을 구성한 지금 상황에서 호주와 뉴질랜드는 장기적으로 아시아 블록에 편입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1960년대에 시작된 고도성장이 1990년대 초반 마무리되면서 거품경제의 후유증으로 10년이 넘는 조정기를 보내고 있다. 사실 10년이라고는 하지만 앞으로 일본경제의 장기불황이 언제 마무리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일본은 전반적으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일본은 1990년대 시작된 인터넷과 정보통신 혁명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됨으로써 첨단 기술 분야와 서비스 산업 분야의 경쟁력도 하락했기 때문에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태이다. 따라서 일본의 입장에서는 활력 있는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한국, 대만 등과 경제통합을 이룬다면 다시 성장의 동력을 회복하고 유럽, 미국 등과 대등한 경제규모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일본은 이러한 점을 인식, 몇 년 전부터 한일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제의하고 있으나 한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한두 개의 대륙과 수억 명의 인구를 포괄하는 지역 블록이 성립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유럽의 경우에도 1950년대 철강공동체의 창립에서부터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꾸준히 노력한 결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5개국이 참여하는 연방건설에도 많은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먼저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한 다음 일정 시일이 경과한 뒤 국경개방 등을 통해 자본과 인력의 이동을 자유화하고 공동의회와 중앙은행을 창립하는 등 가능한 부분부터 정치 경제적인 통합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연방제의 정치체제를 구축할 수도 있다. 한국은 중부와 서부, 동부의 3개국으로 분할하고 일본은 혼슈의 5개 지역과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 등 8개의 국가로 분할해 연방을 형성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대동아 연방에 각자 가입하는 형태가 바람직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대만, 뉴질랜드, 호주의 5개 주, 한국의 3개 주, 일본의 8개 주 등 18개 주로 구성된 인구 2억의 광대한 대동아연방이 형성될 수 있다. 이후 일정 기간을 두고 북한과 중국, 아세안 12개국 가운데 조건이 충족된 국가들을 차례로 흡수하면서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대동아연방의 구성은 군사 안보 면에서 중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는 이 지역 국가들의 안보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며, 경제 문화적으로도 상호보완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이 같은 동아시아의 미래 청사진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역내 선진국과 후진국의 중간 입장에 있으며, 무역의존도가 높고 자원을 많이 수입하는 입장이므로 통합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얻는 국가이다. 또한 한국이 역내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일본을 경계하는 다른 나라들의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만은 중국에 의해 국제사회에서 거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이므로 중심역할을 하고 나서기 힘든 입장이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한국 정부는 편협한 역사 인식에 근거해 일본에 대해 교과서의 수정을 요구하고 총리의 신사참배를 문제 삼는 등 반일책동을 계속하면서 양국의 문화교류를 방해하고 있다. 또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로부터 천문학적인 자금을 거의 공짜로 삼켜온 농민들은 정부가 자유무역 협정을 시도할 때마다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협상을 방해하고 있다. 정부는 한줌도 안 되는 농민들의 집단이기주의에 휘둘려 국가의 백년대계를 망쳐놓는 어리석인 짓을 언제까지 계속하고 있을 것인가.
한국 정부는 왜 반일감정을 진정한 애국심인양 호도하면서 스스로 일본과의 정치 문화 경제 교류를 가로막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것인가. 일본인들은 이 같은 김대중 정부의 책동을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이용해 지지율을 높여 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고 있다. 실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하루빨리 올바른 정부와 지도자를 선택해 일본과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동아시아의 미래를 선도해나가는 중심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최근 소신 있고 현명한 지도자를 가지게 된 일본이 새삼 부러워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