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2-4] 이완용 - 고독했던 애국의 길 p198

조선말 정치가인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몰락한 선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몇 달 만에 마치고 동몽선습을 익혔다고 한다. 7살에는 효경, 8살에는 소학을 완성해 마을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데다 글 읽기를 좋아해 밤을 새워 고전을 학습했다고 전해진다. 곧 우봉 이씨 가문에서 영특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런 덕에 이완용은 10살 되던 해 한양의 명문대가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어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으로 발탁되었다. 이호준은 당시 우봉 이씨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로서 고종과 민비 등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완용을 양자로 삼아 가문을 물려주려 한 것이다. 이호준의 후광과 타고난 재주를 바탕으로 이완용은 한말 난세에도 별다른 불행 없이 순탄한 관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완용은 1882년 임오군란 진압을 기념해 실시된 특별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규장각 대교, 시강원 사서 등 하급관리로 정치역정을 시작했다. 1886년에는 정부에서 설립한 신식 귀족학교인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와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익혔다. 1886년은 조선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학생을 모집한 역사적인 해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학교인 이화학당을 비롯해 배재학당, 육영공원 등 3개의 학교가 만들어졌다.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은 미국에서 온 선교사 등 민간인들이 설립해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었다. 하지만 육영공원은 처음부터 고종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 아래 정부에서 설립 운영했던 교육기관으로서, 미국에서 초빙한 정식 교사와 학교시설을 갖추고 출발하는 등 다른 학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육영공원은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했는데, 좌원은 현직관리, 우원은 고관들의 자제나 친척 가운데 선발된 영재들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제 1기 학생은 좌원 14명 우원 21명 등 모두 35명이었으며 강의는 미국에서 초빙된 교사 3명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즉 이완용은 조선에서 최초로 서양교육을 받고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게 된 관리였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익힌 덕에 이완용은 1887년부터 1890년까지 3년 정도의 기간을 미국공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미국 현지에 교민도 없고 미국과 교역하는 것도 없었으므로 조선 외교관들은 아무 할 일도 없이 소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씻지 않아 몸에서는 악취가 진동하고 말도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상한 복장을 고집하던 당시 조선 외교관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미국의 아이들은 돌을 던졌다고 한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은 이들이 왜 미국 땅에 머무르면서 비싼 국고를 탕진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혁명가 서재필과 서광범 등 2명의 조선인이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조선정부에 의해 역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인물들이어서 공사관측과는 아무런 접촉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1890년 미국공사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완용은 성균관, 형조, 이조, 공조 등에서 참판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다가 1895년에는 오늘날의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에는 아관파천 때 고종의 경복궁 탈출을 도운 공으로 외부대신 겸 농상공부 대신의 벼슬을 얻었고, 이후 독립협회 활동으로 좌천되었으나 나중에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어 1905년 다시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성사시킨 공신으로서 1905년 12월에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정부는 고종의 을사조약 위반에 분개, 조선에 선전포고를 하여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뜻을 이완용에게 통고하게 된다. 이에 이완용은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로 인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고 1909년 12월2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자객 이재명으로부터 습격당해 허파를 칼에 찔리고 온몸이 난자당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천황에 의해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 귀족원 회원을 역임했고, 1920년에는 후작의 반열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 동양 최고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27년 69세에 이르러 이재명으로부터 얻은 상처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망하였다.

당시 이완용의 왼쪽 허파는 습격 때 입은 자상으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오른쪽 허파마저 폐렴으로 인해 기능을 하지 못하자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완용이 사망하자 당시 조선총독 사이토는 '이완용 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로서 손색이 없었고 그 인격은 뭇 사람들로부터 흠모할 바가 많았으니 그의 죽음은 국가의 큰 손실이다'라고 추모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고종 국장 이래 최대의 추모인파가 몰린 행사였다.

이완용은 한국의 교과서 등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에 협력한 친일파의 상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항상 이름 앞에 '매국노'라는 호칭을 붙여 대개 매국노 이완용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에 대해서는 며느리를 겁탈하여 아들이 죽은 뒤 데리고 살았다느니, 고종을 칼로 위협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거짓말들이 국사학자들에 의해 당당히 언급되는가 하면, 그의 묘에 대해서는 유교에서 가장 큰 모욕으로 여겨지는 부관참시(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다시 죽이는 일)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완용의 일생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면 그가 이처럼 큰 모욕과 비난을 받을만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평생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으며, 동양 최고의 명필로 알려져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본 천황은 몸소 그의 글씨를 청하고 답례를 했다고 한다.(윤덕한, 이완용 평전) 또한 이완용은 고매한 학식과 인품으로 조선과 일본의 정치인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그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 통치에 협력한 것은 무능한 조선 왕실이 끝내 거부한 문명개화의 과제를 일본의 힘을 빌어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결코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들을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관직에 입문한 이후 이완용은 대부분의 기간을 정동파로서 일본 및 청나라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활동하였다. 정동파는 주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양 열강의 외교관과 선교사, 조선 정치가 등으로 구성된 클럽으로서 대부분의 기간동안 조선 정치에는 그리 큰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인 그룹이었다. 이완용은 1896년 오랜 미국 망명세월을 마감하고 귀국한 서재필을 정동파 모임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독립협회의 이완용 대신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의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월 23일자 ]
지금 외부대신 리완용 씨가 일년 동안에 한 고생을 외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으나 이 때에 외부대신 지위가 그렇게 샘낼 자리가 아닌 것이 리완용씨는 다만 조선 사람들만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과 상관이 많이 있는 까닭에 조선 같은 나라에서 외국과 탈 없고 모양 상하지 않도록 교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리씨가 일년 동안에 한 일을 보게 되면 자기 힘껏 자기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리씨가 갈리게 되면 리씨보다 나은 이가 또 있을는지 모르겠더라.


이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지내던 시절이다. 독립협회는 고종 환궁운동을 펼치고 있었으나 러시아에 빌붙어 있는 정부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파는 정부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고, 곧 개각이 이루어져 문부대신과 외부대신이 이완용에서 친러파로 교체될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던 시기였다. 당시 이완용이 신념과 용기를 갖춘 애국자임은 서재필이 독립신문 논설에서 [대한의 몇째 안가는 재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
학문 있는 정치가가 몇이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혹시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용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 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였다.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대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씨는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정정당당히 말하였다. 정부에서 이같이 말한 까닭에 그 외국 공사가 리완용 씨를 좋아 아니하여 매우 불편한 일이 많았으나 리완용 씨는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한 정부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필경 일은 그의 뜻대로 아니 되었으나 대체 리씨가 자기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는지라.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알고..


1897년은 아버지인 대원군이 무서워 러시아공사관으로 도망갔던 고종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온 시기이다. 3국 간섭에 굴복한 일본은 조선에서 힘을 잃었고 대신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다. 위의 인용 글에 나타나는 외국 공사는 바로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지칭한 것으로서 당시 조선의 관리가 그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은 실제로 생명을 걸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는 러시아만이 조선 영토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을 뿐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없었고 다만 여러 가지 이권을 챙기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열강이 조선에서 차지하고자 했던 이권은 광산 채굴권, 삼림 벌채권, 철도 부설권 등 크게 세 가지였다. 고종은 이 같은 여러 이권들을 서양에 넘겨주면서 막대한 뇌물을 받아 챙겼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종이 군주라 할지라도 담당 대신(지금의 장관)의 결재 없이는 이권을 쉽게 넘겨줄 수 없었으니, 학부대신이자 외부대신이었던 이완용은 20년 동안 압록강 및 두만강과 울릉도의 삼림을 베어갈 수 있는 권리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는 조약에 대해 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완용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한제국 최대의 이권이었던 이 사업은 러시아에게 넘어갔지만, 제국주의 강대국의 부당한 압력에 목숨을 걸고 대항하였던 일은 이완용의 강직한 사람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처럼 아관파천 기간과 고종이 환궁한 이후에 줄곧 러시아에 맞서 국익을 수호하던 이완용은 1897년 말 결국 친러파에 의해 실각,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1898년 이완용은 고종의 명을 받아 잠시 서울로 복귀했으나 여전히 중앙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다시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어 수도 서울을 떠나야 했다. 이 시기의 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독립신문 1897년 9월1일자 ]
학부대신 리완용 씨는 평일에 애국 애민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라를 아무쪼륵 붙잡고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 권리를 외국에 뺏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여 필경 주야로 사랑하던 자기 대군주 폐하를 떠나 평안남도로 관찰사가 되어 가게 되었다. 관찰사의 직무도 또한 대단히 중한 직무요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여 일하는 데서도 정부에 있는 사람만은 못하나 또한 중임은 중임이라. 이 대신이 정부에서 나가는 것에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대군주 폐하께 충성 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기더라.


[ 1898년 3월 29일 독립신문 ]
삼월 이십 사일 독립협회 회중에서 임시회를 열고 회원 리건호 홍긍섭 최경식 삼씨를 총대 위원으로 특별히 정하여 전라북도 관찰사 리완용 씨를 전별하면서 회중에서 리완용 씨에게 편지하기를, 각하가 본래 맑은 덕과 중한 물망으로 좋은 벼슬도 많이 하고 일찍 대신도 하였고 또 본회 부회장의 직임을 겸하여 열심히 일한지가 이미 삼년을 지났다. 그 뒤 여러 사람이 한가지 소리로 천거하여 회장이 되어 하늘을 가리켜 함께 맹세하고 기어이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하였다. 칙명을 받아 오늘 길을 떠나는지라 본 회원들이 수레를 붙들어 창연하고 결연함은 어찌 그 다하리요. 엎드려 원컨대 각하는 더욱 가다듬어 진무하고 순찰하여 천하의 뜻을 맑게 하기를 구구히 바라노라고 하였다.


이 글을 보면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고매한 인격과 덕으로 임무를 수행함으로서 독립협회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일하던 시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공식적인 칭호에서 전하를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으로 고쳐 부름으로써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는 다시 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조선의 연호를 광무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이 성립한 뒤 독립협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고종과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하려 했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이러한 대립은 1898년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임대하는 문제로 폭발하였다.

러시아의 영도 점유는 침략의 첫 단계라고 판단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로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영도조차(租借, 빌려줌)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영도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독립국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정치 시위였던 만민공동회의 성공 이후 이완용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다시 입헌군주제를 추진하였다. 그 성과로 1898년 11월 2일에 이르러 대한제국에는 오늘날의 국회 역할을 하는 중추원신관제가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황국협회를 중심으로 뭉친 수구파들은 강력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던 것이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 이후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자주독립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이 같은 구한말 자주독립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였으며 실제로 내각의 중심에서 실천에 옮긴 인물로서, 후세에 애국자라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어도 매국노라고 부르기는 힘든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입헌군주제를 둘러싸고 1898년과 1899년에 걸쳐 벌어졌던 치열한 정치투쟁은 결국 고종과 수구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를 추진했던 혁명세력은 모두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북관찰사로 일하던 이완용도 입헌군주제 투쟁이 실패로 끝난 뒤 황국협회 및 황성신문 등 수구파들의 모략을 받아 결국 관찰사에서 면직 당하게 된다. 이후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완용은 고종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모든 관직을 고사한 채 고향에 내려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다시 조선의 개혁이 시작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자 왕실의 일을 담당하는 궁내부 특진관 직을 받아들여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던 것이다. 이후 동학과 독립협회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혁명 세력은 일진회를 결성하여 수구파에 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아 조선의 문명개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혁명세력의 노선은 궁극적으로 일본과 합병함으로써 신속하게 조선의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이 같은 새로운 정세에 따라 기존의 자주독립 노선을 포기하고 일본과의 합병 노선을 추진하게 된다.

이완용은 이후 을사보호조약, 고종의 양위, 한일합병 등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중재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수구파들의 첫 번째 테러대상이 되었다. 이는 이완용이 당시 조선 정계에서 고종과 일본, 일진회 등 3대 세력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같은 중심 역할은 이완용의 고매한 인품과 정치역량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는 선선히 자신의 소임을 받아들여 행동에 옮겼다.

당시 조선 반도의 통치자를 낡은 이씨 왕조에서 일본으로 교체하는 역사적인 작업은 악역을 자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왕조를 유지하고 전통관습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고 믿는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완용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펼쳐진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는 일본과 스스로 병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애국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5년 일본의 통감 통치가 시작된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서 이 땅에는 비로소 문명개화를 위한 작업들이 속속 추진되기 시작되었다. 개항이래 개화당의 선구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조선의 유신이 일본과의 합작을 이룬 뒤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1919년 삼일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완용은 가장 먼저 민족대표로서 추천되었으나 운동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악명이 해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고사하였다. 이후 3개월 동안 계속된 독립운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일본 정규군의 투입이 목전에 다가오자 이완용은 신문을 통해 3차례에 걸쳐 조선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을 중지할 것을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이완용은 마지막으로 발표한 3차 경고문에서 조선 민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본인이 다시 한마디 하고자하는 것은 독립지설이 허망함을 우리들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장래 행복을 기도함에 있다. 오늘날과 같이 국제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우리가 이 삼천리에 불과한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여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고창함이 어찌 허망타 아니하리요. 병합 이해 근 십년 동안 총독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이다. 지방자치, 참정권, 집회와 언론 문제 등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얻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급한 것은 독립이 아니라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다.



이완용은 당시 세계 정세로 보아 조선이 자주독립국이 되는 것보다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 실익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노선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이완용은 일부에서 욕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아직도 막대한 영향력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이완용의 호소로 인해 1919년 3.1운동은 6월초 군대에 의한 유혈진압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이완용의 사상은 이후 이광수 최남선 등 젊은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어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이완용은 새로이 부임한 사이토 총독을 설득하여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멸시와 차별을 없애도록 하고 각 도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의회를 구성하여 조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문화정치의 시대가 열렸고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문예부흥이 시작되어 수많은 시인, 작가, 예술인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1927년 고종의 국장 이래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 이완용의 장례식에서는 위대한 개화혁명가 박영효가 장례부위원장을 맡아 생전에 이룩한 업적과 활동을 추모하는 조사를 낭독했으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추모객이 참석해 위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운구 행렬은 서울의 옥이동에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10리에 걸쳐 이어졌으며, 장지인 전북 익산군에 운구가 도착한 뒤에는 현지의 추모객들에 의해 10리가 넘는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2-5] 여우사냥 p211

한국인들이 일본을 비난할 때 곧잘 인용하는 사건이 1894년 일본인들에 의해 민비가 살해된 사건이다. 이걸 을미사변이라고도 하고 최근에 정착된 공식적인 명칭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일을 가지고 한국의 우익들은 마치 민비가 지네 어미라도 되는 양 국모를 죽였다고 통분해하며 일본을 비난하는 것이다. 나라야 어찌되든 지네 목숨 부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일본에 붙었다 청나라에 붙었다 하면서 개혁을 가로막았던 미친 불여우 민비를 한국인들은 무슨 자주독립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과의 합병에 의해 조선왕조가 무너진 사건을 망국이라고 표현하고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높여 부르며 고종이 최후로 강대국한테 빌붙어보려고 보냈던 밀사 이준을 열사라고 칭송하는 등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데에는 교육과 미디어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요즘에도 남한의 한 전국방송에서는 민비의 일대기를 그린 명성황후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데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인들은 왕족들에게 공감을 느끼고 마치 자신이 조선의 왕이나 왕비의 후손이라도 되는 듯 지배층의 입장에서 조선말기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맨날 왕자와 공주만 등장하는 만화 탓인지 젊은 것들은 너나할것없이 공주병 아니면 왕자병 증세가 있는 환자고, 전 국민의 100%가 본관을 가지고 족보를 가진 조선 양반집안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는 한국인. 족보는 대부분 상놈살이에 한이 맺혀 조선말기와 일제시대에 돈주고 사거나 조작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어쨌든 한국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의 절대 다수가 조선 사회에서 양반이 죽이면 그냥 맞아죽어야만 했던 하층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하다.

민비의 본관은 여흥이고 성이야 당연히 민씨겠지. 경기도 여주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굉장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빌빌대다가 9살 때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13살 어린 나이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에 의해 왕비에 간택되어 궁중으로 들어갔으나 마마보이에 파파보이였던 병신머저리 고종과는 스타일이 안 맞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같이 섹스 할 기회가 없으니 당연히 애를 못 낳을 수밖에. 그러다 고종이 친하게 지내던 궁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나중에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고종은 나이가 들면서 미인의 관점이 성숙해지자 민비에게 점차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 즈음 민비도 장안의 섹시 미남들을 불러다들여 은밀히 동서고금의 온갖 방중술을 익힌 덕분에 고종을 밤마다 뿅 가게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점차 고종의 애정을 독점하여, 1871년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원자(왕의 첫째부인이 아들을 부르는 명칭)를 낳았으나 그만 5일 만에 깨골락 죽어 버렸다. 나중에 이 사건이 흥선대원군이 가져다준 산삼 때문임을 알게 된 민비는 더욱 대원군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게 되었다.

1873년 일본에 이 기회에 조선을 먹어버리자는 정한론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건축사업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민비는 대원군을 몰아내기 위해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한다. 그 결과 흥선대원군 일파의 반대 상소와 모든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도록 만들어 드디어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결국 대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민비는 쇄국정책을 마감하고 1876년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하던 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이 선포된 것을 알고 고종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한편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민비는 청나라 군대에게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한 다음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였다. 이후 민비는 유랑생활 중 한층 업그레이드한 섹스 테크닉으로 고종을 뿅가게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대원군 일파에 대한 복수에 열중하고,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민씨 일족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1884년 일본과 결탁한 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갑신정변) 잠시 정권을 잃었으나 다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세력의 집요한 침투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되고 1894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흥선대원군에 의해 본격적인 체제 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는 1894년 8월 2일 일본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 민비를 죽인 뒤 시체를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상이 간략한 민비의 일대기인데, 조선말 긴박한 시기에 정치의 전면에 나서 처음엔 일본에 붙었다가 나중엔 청나라에 붙었고 마지막엔 러시아에 붙는 등 주로 외세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고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악질반동 매국노임을 알 수 있다. 민비의 결정적인 악행은 권력을 유지하려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치부를 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혁에 극렬하게 저항했다는 것이다. 이런 년을 조용히 없애버린 일본의 처사는 나름대로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행동이었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말기 운요호 사건 이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인 주인 없는 땅이었다. 사실상 조선의 보호국이던 청나라는 내우외환이 겹쳐 망해가고 있는 중이었고 조선의 지배층은 개항 이후에도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어 사실상 현대식 무기를 가진 군대는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이 시기 조선반도 점령에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일본과 청, 러시아였다. 나머지 서구열강들은 교역과 세력확장을 위한 교두보와 경제적인 이권 정도를 탐했을 뿐 조선의 점령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청나라는 물론 전통적인 속국이었던 조선을 계속해서 영향력아래 두거나 이 기회에 아예 청나라 영토로 편입하기를 원하였고 러시아는 전 역사를 통해 숙원이었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남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조선반도 점령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원하던 이유는 임진왜란 때와 같았다. 그들에게는 대륙진출을 위해 조선반도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 3 나라 가운데 일본이 가장 빠르게 발전해 국력을 키웠고 적극적이었던 일본이 결국 조선반도의 주인이 되었는데, 일본은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청나라와 러시아가 거의 동시에 내부혁명으로 인해 붕괴되고 있던 시기에 힘의 공백을 틈타 조선을 일본영토로 합병할 수 있었다.

청 조선 일본 3개국은 19세기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랜 기간동안 쇄국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가 비슷한 시기에 굴욕적인 강제개항을 하게 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1842년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일본은 1854년 조선은 1876년에 각각 개항하게 된다. 이 가운데 일본만이 14년이라는 과도기를 거친 끝에 급진개혁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에도 막부시대를 종식한 뒤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헌법을 도입하고 서구식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개항시기 일본의 천왕은 지금처럼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 모든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에게 있었는데 이것이 격변기에 개혁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에도 나름대로 개혁세력이 존재했으나 왕실의 권력이 강했던 탓에 일본과 같은 신속한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조선의 개화파는 1870년 경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이어받은 박규수, 유홍기 등 중인계층이 중심이 된 개화 1세대가 생겨났고 나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양반가문의 엘리트들을 포섭함으로써 1880년대에는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대부분 친일파였던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빌붙어 정권을 재장악한 민비에 의해 탄압을 당하자 향후 노선을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졌다. 이는 비슷한 시기 러시아의 혁명세력이 온건 멘셰비키와 급진 볼셰비키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한 일이다.

김홍집이 이끈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일파와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과학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개혁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고 청과는 종래의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기본적으로 청에서 실시하고 있던 양무 개혁파와 비슷하였다. 이에 반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근대적인 정치제도까지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수구파인 민씨 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근대적인 외교관계의 수립을 위해서도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시켜 조선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급진파만이 실질적인 개혁세력이었고 이후 이들은 개화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화당은 임오군란 이후 사이비 개혁파와 민씨 일파, 청나라의 연합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리게 되는데 1884년 5월 청과 프랑스가 베트남 문제로 충돌해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가운데 1,500여 명이 철수하고 8월에 청불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이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그 동안 자신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이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정변과 이후 개혁작업에 필요한 군대와 차관문제에 호의를 보이자, 마침내 1984년 음력 10월 17일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 정권은 청군의 공격과 일본의 배신으로 인해 3일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개화당 수뇌부가 청군에게 사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9명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갑신정변을 배후조종했다는 국제적인 비난을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는 일본에서 10년을 전전하다 청나라로 건너가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상하이에서 살해되었다. 개화당은 1895년 민씨 정권이 몰락하고 친일갑오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을 받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는 갑오정권에 참여하여 을미개혁을 주도하였고,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당의 맥을 계속 이어갔다.

조선말기 개화파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 봉건제도 아래의 일본만이 자체적으로 서양식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개혁파들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일어나 막부에 대항했는데 이 당시 일본의 각 번은 독자적인 군주와 영토, 군대를 가진 작은 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의 존왕파 개화당은 스스로 무력을 가지고 뜻을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모든 군사력과 행정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조선과 청나라의 개혁운동은 앞선 지식과 사상을 지닌 엘리트 개혁세력과 무력에 의존한 하층 계급의 폭동이라는 양 갈래로 분리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개화당이 일찍이 무력 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동학운동세력과 연합할 수 있었다면 조선에서도 일본식 유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말기 애국 개화당에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그들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이었고 이들은 조선을 일본의 선례에 따라 개조해 부강한 자주독립국을 만들고자 했지만 사실상 이는 당시 국제정세에 비추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따라서 일본식의 개혁을 추구해 조선을 근대사회로 변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의 일부가 되는 길뿐이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의 왕족은 사실상 나라가 망한 시점에서도 대한제국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을 연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위대한 혁명운동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고 그들의 종교 이념상 중앙의 엘리트 개화당과 연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패가 불기피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개화와 근대화가 주요 과제였던 조선말기에는 친일파만이 유일한 조선의 애국세력이었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1910년 한일합병 조약을 주도한 이완용 등 친일파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2-6] 민비사건과 한국인의 정체성 p221

[ 조선인가 일본인가 - 한국인의 정체성 ]
최근 필자는 인터넷의 한 지지자로부터 특이한 e-mail을 받았다. <대한황실 재건회>라는 조직에서 필자에 대한 대대적인 인신공격이 시작되었으니 대처하라는 내용인데, 증거물로 한 사이트에 게재된 인신공격성 글과 사진 등을 동봉하고 있었다. 지난 해 이후 나에 대한 인신공격과 살해협박 등은 매우 흔하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대한황실 재건회>라는 이름은 나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한국을 연구하는 외국인들의 책을 보면 종전 후 한국이 독립할 때 조선의 왕실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일에 대해 궁금해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는 한국인인 내가 생각해보아도 매우 이상한 일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예전에 나는 이방자 여사라는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 여자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이방자가 마사코라는 이름의 일본인이라는 사실, 晉과 玖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은 아마도 5%도 안될 것이다. 조선 왕실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친한파 일본인들이 더 열렬한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조선의 왕족에 대해서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조선을 경멸하는 한국인들이지만 조선시대의 사극은 대단히 좋아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의 공중파 방송에서 조선 왕실의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는 연중 끊일 날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 왕실의 역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고 또한 조선왕족인 전주이씨가 전체 인구의 10%를 넘고 있는데도 한국에서는 그동안 왕실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겉으로는 조선의 왕족이며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조선을 증오하는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을 증오하지만 또한 조선을 그리워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인이다.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어떤가. 현대 한국은 그 출발기부터 경제발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일본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일본은 한국에 있어 부모와 같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일본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인이다.
지난 해 은퇴한 서울대의 김윤식 교수(1936년생, 국문학, 한국 최고의 문학평론가)에 따르면, 한국의 주요 대학에 일본어학과가 없는 것은 우리가 일본을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전전세대들은 누구나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전후세대의 반일 감정 탓으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이 영향을 미친 기간은 조선에 비해 훨씬 짧았지만 그 효과는 훨씬 더 강력했다. 그러나 패전 후 미국에 의해 반일교육을 강요당한 결과,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뿌리를 조선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대한황실재건회>와 같은 단체가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옛 조선의 왕실을 재건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일본이나 영국처럼 왕실을 만들게 되면 조선의 후예로서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명성황후 신드롬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 명성황후 신드롬 ]
‘명성황후’는 일-한 교과서 분쟁이 시작된 2001년 한국 문화계의 화두였다. 명성황후란 조선말 개혁에 극단적으로 저항하다가 조-일 혁명세력의 연합공격을 받고 살해당한 왕비를 말한다. 이 여자는 말하는 사람의 평가에 따라 민비, 민후, 명성황후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는데 과거 한국에서는 “민후같은 년”이라고 하면 여성에게 가장 치욕스런 욕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민비는 조선을 망친 왕비로서 인민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 인물이 교과서 분쟁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애국과 충절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드라마, 뮤지컬, 연극, 영화 등 모든 문화장르에서 만고의 애국자로 추모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비를 구국의 순교자로 미화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간헐적으로 존재해 왔다. 일찍이 극우 성향의 한국 작가 이문열은 <여우사냥>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민비의 명예회복(?)에 앞장서왔는데, 최근 이를 한국의 극단이 <명성황후 The Last Emperess>라는 이름의 뮤지컬로 만들었다. 이 뮤지컬은 국내에서도 성공했고 이어 일본과 미국, 영국 등에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이 최근 들어 교과서 분쟁으로 빚어진 반일감정에 편승하여 TV의 사극, 연극공연, 소설, 음반, 영화와 뮤직비디오 등으로 확대되면서 반일감정의 상업화 현상이 나타난 것인데, 한국 언론은 이를 "명성황후 신드롬"이라 부르고 있다.

이 신드롬은 1년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 이어, 작년 말 성악가 조수미가 참여한 명성황후 OST 음반이 발매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조수미는 한국이 낳은 세계 정상의 성악가로서, 카라얀이 ‘신의 목소리’라고 절찬한 바 있는 국보급 가수이다. 정규 소프라노의 노래가 오랫동안 가요순위 1위를 차지하는 사태는 한국에서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조수미의 뮤직비디오에서는 악독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무사들을 사주하여 조선의 궁궐에 침입, 구국의 희망인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다는 스토리가 잘 절제된 화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뮤직비디오와 OST 음반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출시되기도 전 이미 30만개가 예약 판매되었으며, 출시 이후 단 3개월만에 수백만장이 판매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의 발달된 인터넷망을 통해 이 뮤직비디오가 거의 모든 웹사이트에 게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말부터 한국인이라면 접속하는 사이트마다 올라와 있는 명성황후 뮤직비디오를 싫더라도 수십번씩 보고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 1990년대 중반 일본에서 X-Japan이 등장한 이래 한국의 신세대에게는 강력한 일본 문화의 바람이 불어닥친 적이 있었다. 이 유행은 X-Japan과 하루키, 재패니메이션을 알지 못하면 그 집단의 정서를 공유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신세대들에게 반일감정보다는 친일감정이 더 보편적이라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호의와 동경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는데, 명성황후 신드롬은 이 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한국 최초의 인터넷 세대들은 10년 만에 친일에서 반일로 획기적인 정서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 갑오개혁과 민비시해사건 ]
동학농민운동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침략 공세를 펴던 일제는 갑오개혁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명성황후는 일제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제를 배후로 한 개혁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으로 대륙을 침략하려던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정책의 장애물인 명성황후와 친러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 낭인들을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한 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국사, p337)

이것이 한국 정부가 명성황후 신드롬을 통해 전파하고자 하는 민비시해 사건의 전말이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살해된 구국의 순교자 명성황후, 이것이 최근 한국인들에게 정착된 명성황후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진실은 과연 어떠했는가.

1894년 5월, 동학농민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도 즉각 대응 출병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청국과 조선정부에 시정개혁과 조선의 독립을 제안하였으나, 청국과 조선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을 기습, 점령한 뒤 정부를 개혁파로 교체한 뒤 무력으로 조선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하는데, 조선 최초의 근대개혁이자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조선에 이식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군대가 독일을 점령한 뒤 시행한 개혁과 완전히 같은 것으로서, 당시 일본군이 동아시아 지역의 혁명군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조선의 수도를 장악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한 일본은 곧이어 평양성 전투에서 이홍장의 정예군을 궤멸하고 요동반도에서 청국의 해군을 격파한 뒤, 파죽지세로 만주와 산동반도 등으로 진격하였다. 곧 북경 함락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자 청국은 항복하였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대만과 조선, 만주 지역을 넘겨받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이 조선의 보호국이던 청을 격퇴하고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자 조선은 300년 만에 청으로부터 완전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의 후원으로 시정개혁조치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조선은 일본의 뒤를 이어 동아시아 두번째의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 신조선과 일본의 앞에는 더 큰 적 러시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전략은 만주와 조선, 일본을 점령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해 3국간섭을 자행하였는데, 이는 만주와 산동반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러독프 연합군과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당시 국력으로 이들 강대국과 맞설 수 없었던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만주와 산동반도에서 철수했던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고 조선반도에서도 철수하게 되자 민비와 조선의 수구세력은 러시아를 등에 업고 다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민비는 김홍집과 박영효가 이끌고 있는 혁명정부를 점차 압박해 들어가며 갑오개혁의 성과들을 하나둘씩 원점으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정계에서는 점점 친러파의 입김이 세어졌고, 몇 달 후 김홍집은 총리직에서 실각했으며 1894년의 혁명정부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공사 이노우에도 퇴조하는 일본 세력과 함께 동경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같은 정세가 지속되면서 1895년 8월이 되자 조선 내각에는 개혁세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민비의 사주를 받은 친러파들만 남게 되었다. 민비가 주도하는 친러파들은 시정개혁의 중심이던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혁명정부가 이룩해놓은 모든 개혁의 성과들을 원점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개혁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일본이 빠진 조선의 개혁세력은 너무나도 힘이 약했던 것이다. 이에 당시 조선 혁명세력을 이끌고 있던 박영효는 수구파의 수괴인 민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박영효의 음모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개화 이후, 고종은 밖으로 일본의 견제를 받고 안으로는 우리 정부(군국기무처를 말함)가 독주하여 무슨 일을 처리하려 할 때 한 건도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궁(민비를 말함)은 이를 매우 분통히 여기고 점차 고종의 복권을 꾀하여 러시아와 내통하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중궁의 행위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었으나 그는 중궁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중궁을 살해하지 않으면 그 화근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날짜를 정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일본으로 병력을 요청했다. 그는 유길준이 자기와 친한 사이여서 자기의 뜻을 내통하였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박영효는 자기의 음모가 누설된 것을 알고 양복으로 변장한 후 일병에게 호위를 요청하여 용산으로 가서 기선을 타고 도주하였다. 그의 일당 申應熙, 李圭完 등도 그와 함께 도주하였다.(敎文社, 梅泉野錄, 1994, p347)

박영효는 조선의 왕족으로서 1884년 조선의 쿠데타를 주도한 혁명가이다. 당시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민비가 청국의 군대를 끌어들이고 일본군-조선혁명군으로 구성된 혁명수비대가 청군과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3일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일청전쟁 이후 귀국하여 2차 조선혁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개화인사인 유길준을 동지로 생각해 민비 살해를 논의했으나 유길준은 그 사실을 고종에게 밀고해버린 것이다.

이때 일본으로 도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박영효는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까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것은 1884년에 이어 그의 두 번째 망명이 되었다. 항상 일본군과 함께 조선혁명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이 패퇴할 때마다 일본에 망명해야만 했던 박영효의 정치역정은 당시 다른 모든 아시아 혁명가들의 운명을 대변해주고 있다. 일본은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혁명의 기지였던 것이다.

일본에 망명한 뒤에도 박영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을 면담하고 조선에 남아있는 동지들과 대원군 등에게 밀사를 보내 민비 제거의 당위성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들은 대원군이 거사의 정치적인 방패막이가 되어 여론을 관리하고 일본 측은 군사행동을 맡기로 각각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많은 조선의 혁명가들이 일본군 행동대에 참여하였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혁명군은 경복궁을 기습하였다. 당시 경복궁은 미국의 퇴역 육군소장 윌리엄 다이 장군이 이끄는 500여명의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으나, 치밀하게 준비된 혁명군은 몇 시간의 전투 끝에 다이 장군의 수비군을 격퇴하고 경복궁을 장악할 수 있었다. 혁명군에 의해 경복궁이 포위되자 민비 체포조가 신속하게 궁궐을 수색했다. 곧 궁녀들 틈에 변장을 하고 숨어있던 민비가 발각되었으며, 평소 민비와 교분이 있던 일본 여인이 그를 확인해주었다. 민비는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였으나 혁명군은 그녀의 목을 자른 뒤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이날 새벽 혁명군의 경복궁 공격과 때를 맞추어 대원군은 서울 시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격문을 붙였다.

“최근 민비를 중심으로 한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함으로 인해 5백년 종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를 보위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을미사변은 1894년에 이은 제2차 경복궁 쿠데타였으며, 개혁파의 입장에서는 위기에 빠진 조선 혁명을 구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 2차 혁명이 성공함으로 인해 조-일 연합의 혁명세력은 민비와 친러파들을 제거하고 혁명정부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조-일 혁명세력은 조선을 방패막이로 삼아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고, 일본은 보다 국력을 키워 러시아를 견제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조선이 민비 등 친러 수구파에 의해 장악당하게 되면 일본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처지로 변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투입하고 있었는데, 이 철도는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의 동아시아 침략군 수송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규군으로 러시아 등 3국 연합에 맞설 수 없었던 조-일 연합은 조선혁명의 교두보를 지켜내기 위해 소규모 게릴라전을 통해 흉적을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이후 실각했던 김홍집은 다시 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고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등 개혁세력들이 속속 입각해 중단되었던 개혁조치를 다시 진행해 나갔다. 이 기간동안 고종은 혁명군의 인질이 되어 일본군 훈련대가 수비하는 경복궁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6개월이 흐른 1896년 2월, 미국공사 앨런과 러시아공사 웨베르 등은 어느 날 새벽 고종을 경복궁에서 몰래 빼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시아 공사관으로 조정을 천도함)이라 한다. 이후 고종은 러시아군의 경호 아래 러시아 공사관에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김홍집, 유길준 등 혁명정부의 각료들을 모조리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한 날 아침, 파천 소식을 접하고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던 총리대신 김홍집은 광화문 앞에서 무장한 경찰에게 체포되어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채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폭도들은 김홍집을 때려죽인 뒤 그의 시체를 손발이 묶인 채로 발길질하며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개처럼 끌고 가 종각에 팽개쳐버렸다. 공식적으로 조선반도에서 철수한 일본은 이같은 조선 혁명의 실패를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향후 일한관계에서 민비 살해사건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만약 한국 측에서 주장하는 대로 ‘108년 전 일본 공사가 깡패들을 동원하여 조선의 궁궐에 난입, 국모를 죽이고 강간한 사건’이라면 일본은 한국과 북조선에 대해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게다가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그려지고 있는 바 그 왕비가 외세에 대항하여 힘겹게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끌어가던 구국의 희망이었다면 그 죄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반일교육과 반일 미디어로 인해 이와 같은 인식을 지니게 되었고 그런 잔혹한 범죄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일본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민비라는 인물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던 흉적이었으며, 일본에 앞서 조선의 개혁세력 자체에서도 끊임없이 민비 살해를 기도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만이 조선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면 일본은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희생한 벗이요 은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이처럼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면 일본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찾게 될 것이다. 따라서 108년 전 조선의 수도에서 발생한 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아니라, 일한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지난 2001년 한국에서는 반일감정을 상업화하는 소설이 한 권 등장했다. 이른바 <황태자비 납치사건>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한국인 2명이 동경에 잠입, 일본의 황태자비를 납치해간다는 스토리로 시작된다. 이 책을 쓴 김진명은 10년 전 남북한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결국은 일본에 핵무기를 발사한다는 내용의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책은 대단히 유치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200만부 이상 판매되었고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2001년의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50만부 이상 판매된 성공작이었다. 반일감정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다.

한국인들이 황태자비를 납치해간 것은 그를 인질로 해서 일본정부로부터 과거 민비살해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를 입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435호 문서'라고 불리는 증거인데, 민비시해 사건의 전말이 일본군에 의해 자세하게 기록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것인데, 한국인들은 이것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다나카 형사는 435호 문서를 제공하지 않으면 황태자비를 살해하겠다는 범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나카 형사는 매우 힘들여 그 문서를 입수하였고 이를 범인들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역사 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한국측 변호사는 근거 자료가 없어 더 이상 밀고 나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일본측은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두 범인과 황태자비가 법정에 나타난다. 납치되어 있던 동안 범인들은 황태자비를 잘 보호해 주었고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황태자비는 435호 문서를 읽고 스스로 범인들에게 협조할 것을 결심한다. 황태자비는 한국측 증인으로 일본측과 대항하여 진실을 가려내고자 했다. 그녀는 435호 문서를 일본인 앞에 대항하듯 읽어내려갔고, 황태자비라는 칭호를 포기한 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는 현명한 세계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줄거리이다.

즉 일본인들이 직접 기록한 극비문서에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를 살해한 뒤 시체를 돌아가면서 강간했다는 증언이 있고, 이것이 일본의 역사왜곡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의 목적은 스토리의 재미보다는 민비의 처참한 죽음을 屍姦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극하려는 데 있다고 하겠다. 국모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그에 반해 일본의 황태자비는 얼마나 영민하고 용기가 있는가, 민비도 만약에 살아있었다면 일본의 황태자비와 같았을 것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한국인의 원초적인 분노를 자극하는 시도는 매우 효과적인 반면, 당시 조선 사회를 이해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짐이 임어한지 32년이 지나도록 치화가 미흡한 것은 왕후 민씨가 친척을 끌어들여 그들을 좌우에 두어 짐의 이목을 옹폐하고 인명을 박해하였으며, 정령을 탁란케 하고 관직을 매매하였기 때문이다. 민비의 학대는 하늘까지 치솟아 사방에서 도둑이 일어나고 종사는 위태롭게 기울어 조석을 보존할 수 없었다. 짐이 민비의 극악무도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은 짐이 불명한 데도 이유가 있지만 그의 일당이 두려워 그렇게 하였다.(중략) 민비의 죄악은 실로 천지에 가득하여 다시는 종묘를 계승할 수 없기에 우리 왕가의 고사에 의하여 그를 서인으로 폐하는 바이다.”

이것은 민비가 죽은 며칠 뒤 조선 국왕이 발표한 칙서이다. 전호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민비 살해사건은 사실상 조선혁명세력의 제2차 쿠데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후 고종은 혁명세력의 인질이 되어 경복궁에 연금당한 신세였기 때문에 이 칙서는 당시 개혁파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역사가인 황현은 “이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때 사람들은 실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즉 비록 이 조서가 고종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내용은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이는 민비 살해가 조선 내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정당한 거사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사실 민비는 그 정치적인 성향에서 개혁에 극렬하게 저항했던 반역자였기에 죽어 마땅하지만,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민비는 중전이 된 이후 고종의 애첩들을 모조리 잡아다 고문하거나 죽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 궁중의 권력은 왕비가 관장하는 내명부와 왕이 관장하는 외명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왕이라 할지라도 내명부의 일은 간여할 수가 없었다. 내명부란 궁중의 여성 세계를 말한다. 따라서 왕후에게는 왕과 동침한 궁녀들을 고문하거나 죽일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민비는 고종의 애첩들에게 성기를 불로 지지는 궁형을 가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으나 간혹은 고종의 애원에 따라 죽음을 면하고 궁궐을 쫓겨난 궁녀도 있었다. 민비는 고종의 애첩들을 학대함으로써 고종을 장악했던 것이다.

또한 민비는 무식하며 탐욕스럽고 극단적으로 이기적이었다. 그는 모든 근심을 미신에 의지해 해결하려 했다. 일찍이 민비는 두 살 난 자신의 아들(후에 순종, 조선의 마지막 임금)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은 20만냥이라는 엄청난 뇌물을 바쳤다. 아들이 청국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은 뒤에는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마다 각각 돈 1천냥과 쌀 한섬, 비단 한필씩을 바쳐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국고 1천2백만냥을 미신에 탕진한 것이다. 당시 쌀 1석이 1냥, 황소 한 마리가 20냥이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금액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언제나 궁중에 무당들을 불러들여 굿판과 치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용한 점쟁이에게는 즉석에서 비단 1백필과 돈 1만냥씩을 건네주는 등, 나랏돈을 물쓰듯이 했다.

민비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식으로 4년이 흐르자 조선의 국고는 바닥나고 모든 공무원에게 봉급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후 5년간 조선의 문무백관들은 정부에서 한 푼의 급료도 받지 못하였다. 녹봉이 나오지 않자 관료들은 이권브로커가 되어 돈을 긁어모았고, 인민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민비 뿐만이 아니었다. 민비가 조선의 국정을 농단한 22년 동안 민비의 종친인 여흥민씨들은 조선의 모든 요직을 독차지하고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 민비 집권기간 중 공직을 맡은 여흥민씨는 2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 조선의 서태후 ]
즉 민비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염원했던 구국의 희망이 아니라 조선을 망친 망국의 원흉인 것이다. 민비는 결코 조선의 쟌다르크가 아니며 차라리 중국의 서태후에 비견할만한 인물이다. 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중국을 48년 동안이나 통치하면서 중국의 개혁을 가로막았던 여걸(?)이다.

1898년 중국에서는 광서제가 이끄는 개혁파들에 의해 戊戌變法이라고 하는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변법은 103일만에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거사에 가담한 개혁파는 모조리 살해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광서황제는 가택연금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광서황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이후 광서제는 10년간 감금당해 있다가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서태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서태후는 극히 타락한 생활을 하였는데 한 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로만 은 3kg이 들었는데 그 당시 이 돈으로 5000kg(약60석)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 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옷만 해도 3000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었다. 또한 서태후는 중국의 궁궐에 전화 설치를 막았는데 그 이유는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 꿇고 있는지 앉아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아주 잔혹했는데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이기도 했다. 이런 악독하고 이상한 여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만약 중국의 광서제와 개혁파들이 1898년에 서태후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면 중국의 운명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19세기말 유럽제국주의의 침략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당시 세계 조류에서 뒤쳐져있던 조선과 중국, 하와이는 공통적으로 여성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조선의 민비와 중국의 서태후, 하와이의 릴리오칼리니 여왕은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던 중요한 시대에 개혁을 가로막고 사리사욕을 채운 부정적인 인물이다. 하와이는 1893년 혁명이 일어나 개혁에 저항하던 릴리오칼리니 여왕을 축출하고 이후 1897년 미국과 합병함으로써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에서도 역시 1895년 개혁파들이 민비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러시아와 고종의 방해로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일본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를 물리친 뒤에야 일본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근대화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과 합병한 조선은 번영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중요한 시기 서태후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후 오랜 혼란기를 거쳐야 했고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진 지역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하와이와 조선의 사례는 스스로 발전할 수 없을 때에는 이웃의 유력한 블럭에 합병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당시 약소국들의 차선책이었음을 보여준다.


[ 조선 노비사회 ]
어쨌거나 사망 당시만 해도 모든 조선인들에게 저주의 대상이었던 민비가 오늘날 자주독립의 순교자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현상은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정체성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조선 왕조를 그리워하고 마치 일본의 통치를 받지 않고 조선왕조가 계속되었다면 오늘날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실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깨끗한 거리와 집, 단정한 옷, 점잖은 말씨 등으로 묘사되는 TV의 사극을 보면서 조선도 나름대로 훌륭한 사회였으며 외세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국가로 유지되었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오기 전 조선은 너무나도 미개하고 비참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조선은 전형적인 노예사회였다. 전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으며 수도인 한성의 경우는 인구의 70% 이상이 노비나 천민이었다. 노예들은 물건처럼 매매되었으며 평생을 주인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평민이나 중인 계급은 노비에 비해 약간의 자유가 있었으나 귀족이나 관리들에게 약탈당하는 신세는 마찬가지였다. 양반이라고 불리는 귀족들은 무위도식하면서 하위 계급에 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어느 학자는 이같은 조선을 20%의 거머리가 나머지 80%의 피를 빨아먹는 구조로 비유하기도 했다.

관직은 공공연하게 매매되었으며 관리들은 전혀 일을 하지 않았다. 1894년의 개혁 이후에도 수도인 한성 부윤은 평균 3개월마다 한번씩 교체되었으며, 1년 예산의 절반이 부윤의 연봉으로 지출되었다고 한다. 관직이 자주 교체되는 것은 단 하루라도 관직에 오르면 퇴임한 뒤에도 그 지위가 평생 유지되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사소한 권한이라도 생기게 되면 이를 최대한 이용해 축재를 했다.

한 예로 조선의 장성한 남자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있었는데, 현역복무를 하지 않는 한 매년 베를 납부해야 했다. 이를 군포라 한다. 관원들은 막 태어난 갓난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했고, 심지어 아직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에게도 군포를 징수했다. 전라도 강진의 한 가난한 농부는 사내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포를 징수하러 온 관원들에게 군포대신 황소를 빼앗겼다. 이 농부는 해마다 군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칼로 아들의 성기를 모두 잘라버렸다. 그런 다음 더 이상 사내아이가 아니므로 군포를 납부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사례이다.

조선은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미개하고 잔혹한 사회로서, 이 같은 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을 하고 근대화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조선반도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전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이 어느 정도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에 성공하여 다른 개발도상국의 부러움을 사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조선을 위해 일한 일본인들 덕분이다.

조선인들은 스스로 이 같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한 이후에도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향수도 그리움도 지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의 왕실을 재건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일부 한국인들의 시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이 같은 행동에는 한국과 일본을 이간질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려는 어느 집단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한국은 일본이 낳고 길러낸 자식과 같으며, 한국인은 일본과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진심어린 우호관계를 추구하는 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야 한다.

[2-7] 별을 쏘다 p240

1909년에 조선인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저격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어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해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살해함으로써 일본의 고질병인 번벌정치가 마무리되어 20세기 초반 일본이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이 의견은 이토 공이 명치 유신 이후 일본에서 사쓰마-죠슈 독재를 유지해 온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토 공이 암살된 이후 1910년대 말 사쓰마 조슈 지역의 권력독점 시대가 마무리되어 이후 상당한 수준의 국민 대통합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는데, 1920년대 반 사쓰마 조슈 연합의 주도로 일본에서는 국가 표준말 정책이 강화되는 한편 국민 내부의 지역차별 행위가 소멸했고 이는 결국 분열되어 있던 열도의 다양한 지역과 인종간에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장은수, 20세기는 독일, 일본 21세기에는 한국이 세계를 주도한다, 1995) 이같은 해석은 장은수씨가 오늘날 한국의 고질적인 경상도 독재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독일의 사례를 연구하면서 제시한 것인데, 특이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필자의 해석인데, 이토 암살사건은 일한합병을 20년 정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와 조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을사년 신협약의 체결을 주도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일본에 부담이 되는 조선 합병을 결코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만 일진회 등 조선의 혁명세력이 청원하던 바였으나, 안중근의 이토 살해사건으로 인해 일본의 여론은 급속히 합병으로 기울게 되었으니 안중근은 그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애국을 한 셈이 되었다. (김완섭, 친일파를 위한 변명, 2002, 춘추사)

물론 안중근 본인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이같은 결과들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는 이등박문을 제거하게 되면 조선이 다시 독립할 수 있고 동양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어떠한 중요한 사건을 만들어낸 사람의 의도와 그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 역시 역사를 평가하는 일을 힘들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된다.

한국인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조사를 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세종대왕, 이순신 제독, 김구, 안중근 등이 인물들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세종과 이순신은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한국의 영웅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들인데, 세종은 한글 창제 등 수많은 업적으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성군이었으며 이순신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낸 훌륭한 제독이었기 때문이다. 세종과 이순신은 한국인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으므로, 한국이 낳은 국보급 인물들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비하면 김구나 안중근 같은 인물들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에서 일본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인물 자체로는 어떤 점이 훌륭하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즉 이같은 인물들은 한국의 비정상적인 반일교육이 만들어낸 가짜 위인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비하면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이등박문이나 메이지 천황은 서구의 아시아 침략이 절정에 달해있을 때 일본의 부국강병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들로서,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만한 국보급 위인들이라고 하겠다. 실제로도 오늘날 세계 역사학계에서 메이지 천황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이등박문 역시 당시 독일의 비스마르크, 청의 이홍장과 함께 세계 3대 정치가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에 비해 김구나 안중근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만약 누군가 미국이나 유럽의 역사학자들에게 안중근과 김구를 아느냐고 물어보고 돌아다닌다면 매우 실망스런 결과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김구와 안중근은 조선의 혁명기에 낡은 왕조에 충성하면서 변화에 극렬하게 저항했던 보수반동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김구는 1896년 조선의 황해도에서 스치다 士田라는 나가사키 현 출신의 상인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한 뒤, 관헌의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도망친 殺人鬼인데,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 왜놈을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점점이 난도질했다. 아직 2월 날씨라 마당은 빙판이었는데, 피가 샘솟듯 넘쳐서 마당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왜놈의 피를 움켜 마시고, 그 피를 얼굴에 발랐다.

김구는 당시 객주에서 우연히 신분을 숨기고 있던 스치다를 발견했는데, 단지 일본인으로 생각되었고 閔后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복수심에 불타 이처럼 처참한 살인을 행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유교 교육을 받은 無知莫知한 조선인이라지만 추정만으로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른다는 타고난 살인마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인물이 이후 관헌을 피해 중국으로 달아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것을 만들어 소위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 운동의 수준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894년 이후의 조선 정세는 친일 혁명세력과 반일 수구세력의 전쟁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의 내전은 1895년의 단발령과 1907년의 군대해산이라는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격화되었다.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조선 유교사회와 완전히 결별을 각오해야만 하는 상징적인 조치로서, 당시 조선의 혁명가들은 궁궐 앞에 대포를 설치해놓고 국왕의 頭髮을 잘랐다. 국왕의 단발에 성공한 혁명세력은
전국에서 강제로 단발을 실시했는데, 이 때 김구와 같은 수구세력들이 군대를 일으켜 저항했으므로 그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겨우 머리카락 때문에 라고 파악해서는 안 되는데, 당시는 頭髮을 자르는 문제가 혁명세력과 수구세력이 충돌하는 戰線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조선의 혁명세력은 수구세력의 首魁인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뒤 군대를 해산했다. 이 때 해산된 군인들은 조선왕조에 충성하는 수구파들과 연합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때의 내전은 2년간 지속되었다. 안중근은 이 2차 내전에 참가한 수구반동파였으며 이토 공은 그 와중에서 희생된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 공을 살해한 뒤 일본제국의 법정에서 자신은 대한제국의 군인이며 한국과 일본은 전쟁 중이므로 포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내전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안중근의 죄는 살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역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역사의 올바른 전진을 가로막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관성집단을 우리는 흔히 수구반동 세력이라 칭하는데, 이 같은 반역의 무리들이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 과정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백번 죽어 마땅한 것이다. 또한 역사의 전진을 위해 반역의 무리들을 처단하는 살인은 정당한 것이니, 살인 자체는 범죄가 아니되 어떤 뜻으로 어떤 상황에서 살인을 했는가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태평성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살인을 죄악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데, 지나간 시대의 혁명기를 평가할 때에는 살인에 대해서도 보다 능동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 즉 혁명의 과정에서 더욱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살인이 불가피하다면 이는 주저 없이 행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1879년 조선의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의 양반계급이었으며, 안중근은 어린 시절부터 글 읽기보다 무술에 열중했던 무인 기질의 인물이었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1894년 동학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조직해 동학군을 진압했는데, 안중근도 이 때 부친을 따라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으로서 안중근의 수구반동적인 성향은 이때부터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안중근은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에 입교하였고 프랑스 신부로부터 신학문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안중근은 1907년 고종의 축출과 군대해산으로 조선에서 2차 내전이 발생하자 수구파에 가담해 싸웠다. 그는 오늘날 블라디보스톡 근처인 연해주로 가서 반란군을 조직, 주로 일본군의 부대를 기습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1908년에는 함경북도 경흥까지 쳐들어와 혁명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1894년에 부친과 함께 동학 혁명군을 토벌했던 반동적인 성향을 되풀이한 것이다.

당시 안중근이 소속되어 있던 朝鮮 傀儡軍은 연해주 일대의 100명도 안되는 소규모 부대로서, 1908년 함경북도 회령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한 뒤에는 흔적도 없이 해산되어버렸다. 이는 연해주 일대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이같은 흉악무도한 수구파들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릴라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안중근은 1909년 3월 몇몇 과격분자들을 모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손가락을 잘랐다. 그 해 10월 伊藤博文 공이 러시아 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假裝, 하얼빈 驛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이토 공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3발을 명중시켰다.

이토 공의 얼굴을 모르던 안중근은 처음 기차에서 내리던 이토의 수행원에게 총을 쏘았고, 이어 이토에게도 사격을 가했다. 역에서 총성이 울리자 역을 경비하던 러시아 병사들과 환영군중들은 일제히 총소리가 나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러시아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토 공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그는 숨지기 전 자신을 저격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朝鮮 義烈團의 안중근이라는 답변을 듣고 ‘바보 같은 놈’ 이라고 크게 탄식한 뒤 숨을 거두었다.
처음 안중근의 신병을 확보했던 러시아는 이 사건의 정치적인 중요성을 감안, 곧바로 범인을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겼다. 일본 정부는 곧 안중근을 뤼순으로 이송하여 뤼순감옥에 수감하였다.
그 해 겨울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안중근은 자신이 조선의병의 참모중장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과 조선은 전쟁 중이며 자신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군대의 장성으로서 전쟁행위를 수행한 것이라 주장했다. 즉 대한의용군 사령관으로서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공을 총살했으니 포로 대우를 해달라는 것인데, 한국의용병 참모중장이라느니 대한의용군 사령관이라느니 하는 것은 스스로 아무렇게나 지어 붙인 거짓 직함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당시 신속한 조선혁명의 진전에 불만을 품은 몇몇 수구파들과 당을 지어 인민의 생지옥인 조선왕조를 재건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안중근은 뤼순의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10년 3월26일 처형되었다. 만약 일본이 아니었다면 즉 조선이나 청국, 혹은 러시아였다면 그는 간단한 절차를 거친 뒤 즉결처분되었을 것이 분명한데, 안중근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일국의 최고 정치가를 암살한 범인에게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기소와 변론, 최후진술을 거쳐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또한 범인의 주장을 충분히 경청하며 자서전을 출판하도록 배려하는 등의 관대한 제도는 당시의 세계 각국의 야만적인 정치 행태를 감안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초 담당검사는 이 같은 안중근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무기징역을 구형하려 하였으나, 극형을 구형하라는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어쩔 수없이 사형을 구형하였다고 한다. 즉 당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안중근은 이후에도 살아남아 자신의 터무니없는 논리를 선전하고 다녔을 것이라는 얘기인데, 이는 다른 민족의 입장을 십분 배려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처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안중근은 이듬해인 1910년 2월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자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조선대교구의 뮈텔 주교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부탁했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을 심하게 비난했다. 뮈텔 주교는 당시 일기에서, “천주교인으로서 살인을 저지른 안중근의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며, 이토 공은 그동안 조선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조선인들은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침략의 원흉으로만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조선인들이 이토의 죽음에 환호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뮈텔 주교가 끝내 執典을 거부하자 안중근의 세례를 담당했던 다른 조선인 신부가 뤼순으로 가서 안중근의 최후 안식미사를 집전했다.

이 같은 흉악범 안중근에 대한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평가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거의 일치하고 있다. 안중근은 조선민족의 영웅이며 이등박문은 침략자라는 것이다. 한국의 거리에는 태극기와 함께 안중근의 손도장이 찍힌 大韓國人이라는 휘호를 붙인 차량들을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이처럼 안중근은 한국인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만고의 애국자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전 국민에게 조선혁명의 완성이었던 일한합병을 전면 부정하고 미개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도록 반일 세뇌교육을 강요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마저도 이 같은 시각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일본에 오기 전까지는 일본 사회의 이 같은 시각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이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이등박문은 일본을 위해 일하다 순국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안중근 또한 한국에서 대표적인 애국자로 추앙 받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일본인에게 안중근은 현대 일본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로, 한국인에게 이등박문은 조선을 침탈한 원수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일관계의 비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뿐, 일본에서 안중근을 ‘현대 일본의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일본인들은 이등박문을 일본의 국부로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안중근을 일본의 원수로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오늘날 일본의 역사 바로잡기 운동에서 중심에 서 있는 ‘만드는 모임’에서도 안중근은 한국의 영웅이다, 안중근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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