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日帝, 영구병합 목적 조선 근대화에 주력 [한국일보 2004.04.22]

일제 식민지 시대는 우리 역사의 암흑기로 여겨져 왔다. 일제의 일방적 수탈 아래 식민지 조선의 민중은 궁핍과 질곡에 신음했다는 것이 전통적 역사 인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학계 일각에서 이런 인식은 식민지 조선의 실상과 거리가 멀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 커다란 발전이 이뤄졌고, 당시 이식된 근대적 자본주의의 토양이 1960년대 이후 비약적 경제성장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런 주장에 앞장서 있는 사단법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영훈(李榮勳ㆍ53ㆍ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소장을 만나 보았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이미지를 수정하게 된 개인적 동기는.
“1990년에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공동연구에 착수했다. 전국을 돌며 토지대장 등 원자료를 수집했다. 경남 김해 지역에는 대량의 원자료가 남아 있었다. 자료를 보고 교과서와는 너무 다른 내용에 깜짝 놀랐다.토지 신고를 하게 해서 무지한 농민들의 미신고지를 마구 빼앗았다는 교과서의 기술과 달리 미신고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면밀한 행정지도를 했고, 토지사기를 방지하기 위한 계도ㆍ계몽을 반복했다. 농민들도 자신의 토지가 측량되고, 지적(地籍)에 오르는 걸 보고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 결과 분묘, 잡종지를 중심으로 0.05% 정도가미신고지로 남았다. 그때 우리가 갖고 있던 식민지 조선의 이미지는 가공의 창작물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일제의 식민통치사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선의 영구 병합이 식민지통치의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탈ㆍ약탈이 아니라 일본 본토와 동일한 제도와 사회 기반을 갖춘 나라로 만들어 영구 편입하려는 야심찬 지배계획을 갖고 있었다. 근대적 토지ㆍ재산 제도 등은 이를 위한 과정이었다.”

-----일제 식민지 통치를 미화한다는 오해를 살 만한데….
“일제가 조선을 영구 병합하고자 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계획이었다. 일본 내부에서도독자적 역사를 가진 문명 민족을 동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엄청난 비용을 치를 것이니 건전한 협조 기조 위에서 대한제국이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대처했으면 식민지화를 피할 기회도 있었다. 영구 병합을 위한조선의 근대화는 민족의식의 고양과 저항을 부른다는 기본적 모순을 안고있었다.”

-----일제 식민지화 이전 조선의 경제 상황은.
“1910년 이후는 근대적 통계 자료가 있으나 그 이전은 직접적 자료가 없다. 그러나 마지기 당 소작료 자료, 쌀값 상승을 보여주는 간접적 자료 등을 통해 대체적 윤곽을 그릴 수는 있다. 큰 추세로는 18세기를 거치며 1인당 소득이 서서히 떨어지다가19세기 후반 급격히 감소했다. 1750년을 정점으로 농촌의 장시(場市) 숫자, 인구, 쌀 생산성 등이 일제히 떨어졌고,쌀값이 오르고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등 경제침체의 강한 추세를 발견할 수있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의 경제적 변화는.
“침체 일로의 조선 경제가 1900년을 전후해 상승 곡선을 그린다. 일본으로부터의 자본 유입, 근대적 시장제도의 정착, 소유권 제도의 정비, 근대적 기업제도와 상법, 거래 안전성을 보장하는 신탁, 통신, 운수의 발달 등이 뚜렷하다. 식민지 시대를 걸쳐 총 80억 달러의 자본이 유입됐고, 일본인들의 농장과 공장이 생기면서 한반도 지역 단위의 GDP가 상승하고 1인당GDP와 생활물자 소비량 등이 크게 늘었다. 1920ㆍ30년대 GDP는 연 평균 4% 정도 상승했다.”

-----식민지 민중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나.
“그렇다. 무엇보다 인구가 늘었다. 19세기 내내 인구가 감소하다가 20세기 들어 증가세로 돌아섰다. 인구는 위생이나 전염병 등과도 관련이 있어직접적 경제 자료는 아니나 당시의 경제상황을 추정하게 하는 자료다. 식민지 시대 한반도 인구는 그 이전의 1,700만명에서 3,000만명(해외 이주300만명 제외)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경제력이 성장한 것이다.”

-----당시 세계 경제에서 연 평균 4% 성장의 의미는.
“1920년대는 세계경제의 침체기였다. 당시 아무리 호경기라도 연 2% 성장을 넘긴 나라는 거의 없었지만 일본 자본주의는 연 3% 이상의 지속적 성장을 계속했다. 식민지 조선의 경제 발전은 한반도와 만주, 대만을 포함한일본경제권에 공통된 성장의 결과였다.”

-----일본 자본주의에 특별한 성장 요인이 있었나.
“활발한 자본 수출이다. 일본은 자국 통화와 1대1로 교환할 수 있는 식민지 통화권, 즉 엔화를 공용화로 하는 엔통화권을 창출했기 때문에 달러나금 지불 부담을 지지 않고 대량의 자본을 대만과 조선, 만주에 투입할 수있었다. 대량 투자와 지역 개발로 조선의 메리야스나 신발 등 공업제품이만주에 수출되는 등 일본 경제권 내의 시장ㆍ분업 관계가 심화해 활발한상품ㆍ자본 이동을 불렀다.”

-----영국 등도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았나.
“영국 등은 식민지에 공장이나 자본재, 중간재를 수출해 산업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서구 제국주의는 기본적으로 원료 수탈형이었다. 일본과 달리영구 병합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인도라는 주식회사를 영국이 투자해서 경영하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상업적 투자를 했다. 그것이 제국주의 원래의 모습이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관계는 그런 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인종적으로 비슷하고, 문화적으로 상당히 유사해 하나의 커다란 일본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일제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행운이었나.
“1941~45년 북한 지역에는 엄청난 중화학 공업이 건설됐고 그 직접적 수혜자는 북한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상당 부분이 파괴됐지만 처음 만들 때가 어렵지 복구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북한은 시장경제 제도를 청산한 결과 기아의 늪에 빠졌다. 반면 일제가 구축한 자본주의적 시장질서를보존하고 발전시킨 한국 경제는 크게 성장했다.따라서 일제가 남긴 물적 유산이 50년대 이후 얼마나 도움이 됐는가는 의문이다. 다만 식민지 당시 정착된 시장 경제 시스템을 해방 이후 한국이때려 부수지 않고 미국의 주도 아래 다시 건설된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선택이 빛난다.”

-----일제 식민지 통치가 자주적 자본주의 발전 가능성을 오히려 왜곡했다는게 통설 아닌가.
“우리는 18ㆍ19세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추계에 따르면 1910년 식민지 조선의 1인당 국민소득은 40달러(1937년 가격으로는약 60달러) 수준이었다. 산업시설도 없었고 대단히 빈곤한 상황이었다. 자본축적률이 낮고, 인구의 80~90%는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였으나 18세기 이래 장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일종의 도덕적 가치나 명분론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근로규율이나 근로의욕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제가장기적으로 침체하면서 스스로 해체될 심각한 위기 상황이 이어졌다.”

-----해체 위기란 민란 등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다. 사회가 자기 통합력을 상실할 때, 민중이 지배계급의 도덕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때 폭동이 일어난다. 19세기 들어1840년 경부터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약 50년 간 농민들이 집단적 반란에 나선다. 조선왕조 지배계급, 즉 왕족이나 관료가 더 이상 건전한 통합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됐고, 사회를 건전한 방향으로 끌고 나갈 선진적이데올로기를 결여했다.닫힌 사회 공통의 폐색점에 이른 상황이었다. 사실 식민지 초기에 우리지식인들은 19세기를 되돌아보며 참 역사가 부끄럽다는 얘기를 많이 했으나 해방 이후 그런 인식을 모두 정체론이라고 몰아 붙이며 역사를 밝고 진취적으로 기술해 왔다. 그러나 역사의 참 모습을 외면하고서는 역사에서교훈을 얻을 수 없다.”

출전 : http://www.historyworld.org/sub03/sub2.html?act=view&target=21&PHPSESSID=283500bf8ebfefb2cb065c2578aad879

Ⅰ. '인지부조화' 를 강요하는 교과서

『광복 60년의 '사실주의'와 '교과서 바로쓰기' 운동』 시대정신[2005 봄] 통권 28호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였는가.”, “대한민국에는 건국의 아버지도 없고 산업화의 주역도 없는가.”, “대한민국은 성장에 장애를 겪고 있는 나라인가.” 이러한 물음들이 광복 6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또 대한민국이 ‘성공’보다 ‘좌절’이 압도한 국가라고 믿어야 한다면,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대한민국의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의 미래세대는 중·고등학교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하여 대한민국이 잘못 태어났고 성장에 극심한 장애를 겪고 있는 국가라고 배우고 있다. 배울 뿐만 아니라 시험도 치고 평가도 받는다. 과연 대한민국의 ‘역사’는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역사쓰기’가 잘못된 것인가. 축구와 한류에서 자부심을, 기업활동에서 생동감을 느끼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유독 역사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자괴감을 가져야 하는가. 또 얼굴에는 태극무늬를 그리고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축구를 응원하는 청소년들이 학교의 역사시간에는 대한민국을 채찍질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빠져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청소년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이른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상황을 강요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고등학교는 모두 2,700여 개이다. 그 중에 한국근현대사를 과목으로 선택하고 있는 학교는 1,711개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금성 출판사에서 발행한 교과서를 쓰고 있는 학교가 740여 개이다. 6종의 국사교과서 가운데 최대점유율인 약 50%를 기록하고 있는 이 책은 ‘알리바이의 역사’로 일관되어있다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이룬 우리의 상상력, 근면함, 창의력, 열정이 통째로 빠져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세우고 지키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우리의 자화상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독재와 항쟁,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이 있으며, 민중들의 눈물과 아쉬움, 회한만이 넘쳐흐르고 있다. 반대로 북한의 역사기술에서 북한에 대한 부분에는 최소한 중립적인 기술과 최대한 우호적인 서술이 묻어난다. 그 사례들을 다음 항목에서 점검해 보도록 하자.

Ⅱ. 한국 현대사에 대한 교과서(금성사) 서술 분석

『광복 60년의 '사실주의'와 '교과서 바로쓰기' 운동』 시대정신[2005 봄] 통권 28호

한국근대사 서술에서 왜곡되거나 잘못된 부분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는 건국과정, 둘째는 6·25전쟁, 셋째는 박정희 시대, 마지막으로 경제개발에 관한 부분이다.
첫째, 건국과정에서 정통성을 대한민국보다 북한에 두고 있다.
둘째, 6·25전쟁을 ‘작은 전쟁론’의 필연적 귀결로 묘사하고 있다.
셋째, 이승만/박정희 독재에 대한 부정적 서술과 김일성/김정일 독재에 대한 중립적 서술이 대조적이다.
넷째, 한국의 경제개발에 대한 부정적 서술과 북한 경제의 낙후성에 대한 호의적 서술이 현저하다.

상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건국과정에서 대한민국은 친일파 척결을 못한 상황인 반면, 북한은 친일파 척결을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둘째 6·25전쟁에 대해서는 남북 간의 ‘작은 전쟁’이 6·25라는 ‘큰 전쟁’으로 에스컬레이트된 것에 불과하다. 셋째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는 오로지 장기집권과 ‘권력에의 의지’를 불사른 독재였던 반면, 김일성의 독재는 ‘사회주의 가꾸기’를 위한 독재로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독재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경제성장은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외의존 심화, 재벌 등의 독점자본 산출 등, 세계경제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한다면, 북한의 경제실패는 사회주의 경제나 계획경제의 태생적 한계가 아니라 과도한 국방비의 수요이다.

특히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북한의 ‘천리마운동’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 비하적이고 부정적 기술인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며 긍정적인 평가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정통성 결여’, ‘반기업주의’, ‘반미주의’가 한국현대사 기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면, 북한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국가건설’이라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이 현저하다. ‘성공한 국가’로 평가받는 한국의 정치지도자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로 일관하고 있고, ‘실패한 국가’로 평가받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서는 온정적이라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Ⅲ. 한국현대사의 미완성

『광복 60년의 '사실주의'와 '교과서 바로쓰기' 운동』 시대정신[2005 봄] 통권 28호


무릇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어떠한 나라의 역사에도 자랑스러운 부분과 부끄러운 부분이 혼재되어 있다. 개인의 삶에 수많은 도전과 응전이 있고 따라서 성공의 이야기와 실패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의 현대사에도 자랑스러운 추억도 있고 그렇지 못한 슬픈 추억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겐 부끄러운 역사를 압도할 만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으며 또한 자부할 만한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을 압도할 만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있으며, 또한 감동적인 ‘비사(秘事)’들이 많다는 것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체험이 그러하고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그렇게 평가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손, 특히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부끄러움 못지않은 자랑스러움과 감동이 넘쳐흐르는 우리의 역사뿐만 아니라 역사관도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은 운명을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가 애써 산으로 끌어올린 돌이 제 무게로 땅으로 내려오는 것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산 밑으로 뛰어 내려가 바위를 다시 산으로 끌어올리듯이 말이다. 대한민국은 강력하고 까다로운 이웃나라들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운명을 멍에처럼 지고 있었다. 이 국가적 운명과 역사적 운명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것이다. 또 세계적인 냉전구도도 강요된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 빈곤이라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가 모두 자랑스럽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자랑과 자부심만을 느낀다면, 이른바 팔불출(八不出)의 부실한 사관이거나 국수주의자의 오만한 사관일 것이다. 역사에서 아쉬움과 회한도 아울러 짚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미래를 위한 균형 잡힌 사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관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자손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 현대사에는 굴곡과 좌절 및 아픔의 기억이 있다. 특히 세 가지의 미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미완성’, ‘산업화의 미완성’, ‘민주화의 미완성’이 그것이다. 시대착오적인 국토의 분단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미완성의 민족주의를 웅변해준다. 민족주의가 완성되었다면, 지금까지 겪고 있는 이 분단의 아픔은 벌써 치유되었을 것이다. 산업화도 우렁차게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자신 있게 후기 산업화를 말하기 어렵다. 산업화가 완성되었다면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온갖 자본주의 모순과 시장의 실패, 노사분규 등이 지금보다 대폭 줄어들었을 것이다. 민주화는 어떤가. 민주화가 완성되었더라면 민주공동체의 질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정당과 정치는 ‘소금 뿌리기’와 ‘솥단지 던지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 존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초·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국회의사당 견학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국회의원들이 몸싸움과 패싸움 등, 당동벌이(黨同伐異)에 익숙한 습성을 고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완성들은 우리에게 ‘대한민국 찬가’를 부르는 데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완성’을 위해 정진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미완성이 혹독한 비판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 아름다운 것처럼, 대한민국의 미완성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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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옛날사진 모음 친일파를 위한 변명 [목차](전문 게재) 대한민국 이야기 [목차](전문 게재) 동아일보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정 독도 바로 알기 화해를 위해서_박유하(일부발췌) 근대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