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사회 편성의 양태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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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 】::┣이영훈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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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Ⅲ 사회 편성의 양태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사회학자 송복은 조선왕조 시대에 다 같이 차별을 받았던 영남과 호남이 60년대 이후 지역갈등의 주역으로 대립하게 된 것은 급속한 인구이동이 빚어낸 결과라고 해석하였다. 주지하듯이 고도성장기 한국의 인구이동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급격하였다. 1960년 군부와 시부의 인구비율은 72 대 28이었는데, 1985년에는 35 대 65로 역전되었다. 1987년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한 총인구이동은 22.6%에나 달하였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이동은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익명성의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의 정체를 이해하거나 규정함에 있어서 탈 개성화 된 범주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출신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지역감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에 공감하면서 필자 나름으로 보충하고 싶은 점은 이주자들이 새로운 이주지에서 맞게 된 익명성의 사회가 그들의 원거지에서 또는 새로운 이주지에서 원래부터 존재했던 사회의 특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주자들이 그들의 원거지에서 공동체성이 강한 사회에 소속되었더라면 이주 후에도 그러한 공동체를 건설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이주지에 원래부터 강한 공동체사회가 존재했었다면, 이주자는 그 공동체에 포섭되는 방식으로 정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익명성의 사회가 아니라 실명성의 공동체사회가 성립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경험하게 되는 익명성의 사회는 실은 한국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또는 부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전통사회가 미풍양속으로 가득 찬 공동체사회였으리라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한국의 전통사회는 자아중심의 비공동체사회로서의 특질을 강하게 지녔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서유럽이나 일본의 전통사회가 좋은 예를 보이고 있는,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잘 뭉쳐진 민간단체의 예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18세기까지 상인과 수공업자의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인들의 단체는 19세기 중엽부터 조직되기 시작했는데, 단체 결성의 기본 취지는 상업적이라기보다 상호부조의 도덕적인 데 있었으며, 가입과 탈퇴도 자유로운 열린 조직이었다.
농촌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할 마을도 잘 뭉쳐진 영속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마을이라 함은 인간들이 거주하는 공간의 구획을 의미할 뿐이었다. 마을은 인간들의 사회ㆍ경제생활에 필요한 치안, 질서, 수리, 영림, 교육, 도로, 축제 등의 공공재를 공동으로 생산하거나 그에 필요한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단체 내지 법인격이 아니었다. 그러한 공공재는 마을 내외의 다양한 신분층위와 공간범위에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로 구성된 계(稧)에 의해 공급되었다. 계는 특정의 목적 기능을 위해 직접적인 이해를 지닌 사람들끼리 구성한 결사체로서 공동체라기보다 이익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예컨대 어느 마을의 신분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동계가 결성될 때, 마을의 모든 사람이 거기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계는 그 취지에 찬성하는 양반신분을 정식 구성원으로 하였으며, 같은 양반신분이라도 초대되지 않은 부류가 있었다. 또한 양반신분이 아닌 주민은 동계의 멤버라기보다 지배의 대상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전통사회를 두고 다층이심(多層異心)의 사회라고 그 유형적 특질을 규정한 적이 있다.
사회조직의 이 같은 특질로 인해 사회가 갈등기에 접어든 19세기 이후 마을은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세기말 전국적으로 3만 9천 이었던 마을의 수가 20세기 초까지 6만 3천으로 증가하였다. 사회적 갈등이 격심하였던 다른 한 가지 징표로서 소송의 수를 들 수 있다. 전라도 영광군의 경우 1871년 한 해에 2,949건의 소송이 있었는데, 그 절반이 민사소송이었다. 당시 영광군의 호수는 12,600여 호, 이에 평균 8-9호에서 1건의 민사소송이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8-9호의 작은 범위에서 적어도 2호가 이해관계의 갈등을 원만히 조정하거나 타협하지 못하여 관청으로까지 나아가 송사를 벌였던 것이다.
1998년의 『사법연감』에 의하면 1987-97년간 인구수는 11.2% 증가하였으나 소송사건은 106%나 증가하였으며, 1997년 한 해 동안 3.2명당 1명이 소송 관계로 법원을 이용하였다. 이 같은 소송의 빈도는 다원화된 산업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수준 이상의 과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컨대 현대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한국의 인구 당 민사소송의 건수는 일본의 거의 60배라고 한다. 사회가 일본에서처럼 지연단체나 직능단체로 탄탄하게 조직되어 있을 때 분쟁은 미연에 억제되거나 사후에라도 자율적으로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쟁송자에 대한 단체의 나쁜 평판은 승소에 따른 이익을 초과하는 소송의 비용일 수 있다. 현대 한국사회가 위와 같은 소송의 남발 현상을 보이고 있음은 이 같은 기능을 수행할 사회의 단체성 내지 공동체성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대 한국사회의 특질은 위의 영광 사례에서 보듯이 자연경제가 지배적이었던 19세기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20세기 전반 일제의 조선 지배는 그 전통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가하였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6만 3천 여 마을을 2만 3천 여 동리로 통폐합하였다. 들어선지 불과 3년 밖에 되지 않은 외래권력이 원주민의 일상생활이 전개되는 주거공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던 것은 구래의 마을이 자기 재산과 인격으로 영속하는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수십만에 달하던 계가 담당해 온 질서, 수리, 영림, 교육 등의 공공기능이 총독부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 질서에 흡수되었다. 민간사회에 남겨진 자율적 질서는 상장례(喪葬禮)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族稧) 정도에 한정되었다. 30년대에 총독부가 벌인 농촌진흥운동은 그나마 전통사회가 보유하고 있던 각종 자치기능을 해체하는 중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해방 후 한국의 사회 편성이 어떠한 양태였는지는 50년대에 행해진 농촌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당시 농촌을 방문한 사회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사회조직은 면사무소와 같은 관료제적 행정기구, 가입이 거의 강제된 자유당의 지방조직, 그리고 상장례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외에 교회, 학교 사친회, 4H클럽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참여자나 활동의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농촌 주민의 생활재료를 수급한 장시도 일반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시장이었다. 도시에는 상공회의소나 방직협회와 같은 상공인들의 단체가 존재했지만, 정부의 정책을 대행하는 준(準) 관료기구이거나 동업자들의 대정부 로비 창구로 기능함이 일반적이었다.
이 같은 한국 전통사회의 비조직적 특질은 70년대 초 박정희정부가 새마을운동의 준비를 위해 전국 34,665개 마을을 대상으로 행한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그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리더십을 결여하고 있는 마을이 50%, 리더십이 후진적인 마을이 41%나 되었으며, 강건한 리더십으로 자조계획을 수립하고 집행 중인 마을은 9%에 불과하였다.
사회학자 송복은 조선왕조 시대에 다 같이 차별을 받았던 영남과 호남이 60년대 이후 지역갈등의 주역으로 대립하게 된 것은 급속한 인구이동이 빚어낸 결과라고 해석하였다. 주지하듯이 고도성장기 한국의 인구이동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급격하였다. 1960년 군부와 시부의 인구비율은 72 대 28이었는데, 1985년에는 35 대 65로 역전되었다. 1987년 주민등록을 기준으로 한 총인구이동은 22.6%에나 달하였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이동은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거대한 익명성의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의 정체를 이해하거나 규정함에 있어서 탈 개성화 된 범주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출신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지역감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에 공감하면서 필자 나름으로 보충하고 싶은 점은 이주자들이 새로운 이주지에서 맞게 된 익명성의 사회가 그들의 원거지에서 또는 새로운 이주지에서 원래부터 존재했던 사회의 특질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주자들이 그들의 원거지에서 공동체성이 강한 사회에 소속되었더라면 이주 후에도 그러한 공동체를 건설했을 것이다. 또한 새로운 이주지에 원래부터 강한 공동체사회가 존재했었다면, 이주자는 그 공동체에 포섭되는 방식으로 정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익명성의 사회가 아니라 실명성의 공동체사회가 성립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경험하게 되는 익명성의 사회는 실은 한국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또는 부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전통사회가 미풍양속으로 가득 찬 공동체사회였으리라는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한국의 전통사회는 자아중심의 비공동체사회로서의 특질을 강하게 지녔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서유럽이나 일본의 전통사회가 좋은 예를 보이고 있는,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잘 뭉쳐진 민간단체의 예를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18세기까지 상인과 수공업자의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인들의 단체는 19세기 중엽부터 조직되기 시작했는데, 단체 결성의 기본 취지는 상업적이라기보다 상호부조의 도덕적인 데 있었으며, 가입과 탈퇴도 자유로운 열린 조직이었다.
농촌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할 마을도 잘 뭉쳐진 영속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마을이라 함은 인간들이 거주하는 공간의 구획을 의미할 뿐이었다. 마을은 인간들의 사회ㆍ경제생활에 필요한 치안, 질서, 수리, 영림, 교육, 도로, 축제 등의 공공재를 공동으로 생산하거나 그에 필요한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단체 내지 법인격이 아니었다. 그러한 공공재는 마을 내외의 다양한 신분층위와 공간범위에서 이해관계의 당사자들로 구성된 계(稧)에 의해 공급되었다. 계는 특정의 목적 기능을 위해 직접적인 이해를 지닌 사람들끼리 구성한 결사체로서 공동체라기보다 이익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예컨대 어느 마을의 신분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동계가 결성될 때, 마을의 모든 사람이 거기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계는 그 취지에 찬성하는 양반신분을 정식 구성원으로 하였으며, 같은 양반신분이라도 초대되지 않은 부류가 있었다. 또한 양반신분이 아닌 주민은 동계의 멤버라기보다 지배의 대상이었다. 필자는 이러한 전통사회를 두고 다층이심(多層異心)의 사회라고 그 유형적 특질을 규정한 적이 있다.
사회조직의 이 같은 특질로 인해 사회가 갈등기에 접어든 19세기 이후 마을은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세기말 전국적으로 3만 9천 이었던 마을의 수가 20세기 초까지 6만 3천으로 증가하였다. 사회적 갈등이 격심하였던 다른 한 가지 징표로서 소송의 수를 들 수 있다. 전라도 영광군의 경우 1871년 한 해에 2,949건의 소송이 있었는데, 그 절반이 민사소송이었다. 당시 영광군의 호수는 12,600여 호, 이에 평균 8-9호에서 1건의 민사소송이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8-9호의 작은 범위에서 적어도 2호가 이해관계의 갈등을 원만히 조정하거나 타협하지 못하여 관청으로까지 나아가 송사를 벌였던 것이다.
1998년의 『사법연감』에 의하면 1987-97년간 인구수는 11.2% 증가하였으나 소송사건은 106%나 증가하였으며, 1997년 한 해 동안 3.2명당 1명이 소송 관계로 법원을 이용하였다. 이 같은 소송의 빈도는 다원화된 산업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수준 이상의 과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컨대 현대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한국의 인구 당 민사소송의 건수는 일본의 거의 60배라고 한다. 사회가 일본에서처럼 지연단체나 직능단체로 탄탄하게 조직되어 있을 때 분쟁은 미연에 억제되거나 사후에라도 자율적으로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쟁송자에 대한 단체의 나쁜 평판은 승소에 따른 이익을 초과하는 소송의 비용일 수 있다. 현대 한국사회가 위와 같은 소송의 남발 현상을 보이고 있음은 이 같은 기능을 수행할 사회의 단체성 내지 공동체성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현대 한국사회의 특질은 위의 영광 사례에서 보듯이 자연경제가 지배적이었던 19세기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20세기 전반 일제의 조선 지배는 그 전통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가하였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6만 3천 여 마을을 2만 3천 여 동리로 통폐합하였다. 들어선지 불과 3년 밖에 되지 않은 외래권력이 원주민의 일상생활이 전개되는 주거공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던 것은 구래의 마을이 자기 재산과 인격으로 영속하는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수십만에 달하던 계가 담당해 온 질서, 수리, 영림, 교육 등의 공공기능이 총독부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 질서에 흡수되었다. 민간사회에 남겨진 자율적 질서는 상장례(喪葬禮)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族稧) 정도에 한정되었다. 30년대에 총독부가 벌인 농촌진흥운동은 그나마 전통사회가 보유하고 있던 각종 자치기능을 해체하는 중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해방 후 한국의 사회 편성이 어떠한 양태였는지는 50년대에 행해진 농촌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당시 농촌을 방문한 사회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사회조직은 면사무소와 같은 관료제적 행정기구, 가입이 거의 강제된 자유당의 지방조직, 그리고 상장례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외에 교회, 학교 사친회, 4H클럽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참여자나 활동의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농촌 주민의 생활재료를 수급한 장시도 일반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시장이었다. 도시에는 상공회의소나 방직협회와 같은 상공인들의 단체가 존재했지만, 정부의 정책을 대행하는 준(準) 관료기구이거나 동업자들의 대정부 로비 창구로 기능함이 일반적이었다.
이 같은 한국 전통사회의 비조직적 특질은 70년대 초 박정희정부가 새마을운동의 준비를 위해 전국 34,665개 마을을 대상으로 행한 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그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리더십을 결여하고 있는 마을이 50%, 리더십이 후진적인 마을이 41%나 되었으며, 강건한 리더십으로 자조계획을 수립하고 집행 중인 마을은 9%에 불과하였다.
Ⅳ. 사와 공의 원리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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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Ⅳ 사와 공의 원리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속하게 된 서로가 서로에 낯선 익명성의 사회는 지역감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사회조직의 특질이었다. 이 저신뢰의 대중사회가 그에 속한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를 포함하여 타인의 정체를 규정하거나 구별함에 있어서 몰개성적 범주에 의존하게 만든 인과관계를 납득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왜 몰개성적 범주냐, 다시 말해 왜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나 타인의 정체를 확인함에 있어서 다른 것도 아닌 지역감정이나 후술하는 민족감정과 같은 몰개성적 범주 내지 집단적 상징에 기댈 수밖에 없었느냐는 좀 더 엄밀히 그 역사적 배경과 인과를 따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의 정신사에 있어서 사적 개체로서 개별 인간이 공적 질서로 통합되는 원리, 곧 한국인의 공사관(公私觀)이 검토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이하 그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조선성리학이 정치와 문화에 절대적 지배력을 행세한 17-19세기의 공사 관계를 검토하면 그것이 두드러지게 관념적이고 윤리적이었다는 특질을 발견한다. 예컨대 조선성리학의 세계에서 공은 공리(公理)로서 자연과 인간사회의 생성과 운동을 관통하는 근본 원리에 해당하였다. 반면 사라 함은 사욕(私慾)으로써 어디까지나 공리에 의해 억제되고 순치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설정되었다. 공이 선이라면 사는 악이었다. 그 점이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 비해 조선성리학이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비교사적 특질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성리학의 교의에서 인간 욕망의 자연성에 바탕을 둔 자립적 개체로서 사의 존재는 끝까지 긍정되지 않았다. 공과 사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전자에 의해 후자는 소멸되어야 하는 이공멸사의 관계였다.
17세기 후반 유형원(柳馨遠)이 그의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이라는 토지개혁을 주장할 때의 논리가 바로 그와 같았다. 곧 농업이 천하의 대본인 것처럼 토지는 천하의 공물로서 공유이어야 하며, 이에 개인이 토지를 사유지로 갖는 것은 공리에 어긋나는 사욕으로서 마땅히 폐지되어야 했다. 이 같은 논리는 19세기 말까지 여러 성리학자가 펼친 토지개혁론에서도 마찬가지였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 있었던 농지개혁의 명분으로까지 이어졌다. 나아가 오늘날 이른바 진보파로 불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게 천박한 인간 이해가 어디 있느냐고 펄펄 뛰는 것도 길게 보면 위와 같은 17-19세기 공사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까지 조선성리학의 공사관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공과 사의 상하 위계질서이다. 공리를 터득하고 실천하여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군자로서 임금이고 양반이고 관료이고 어른이고 선배이다. 공의 질서나 권위는 이 사람들에 의해 담당된다. 반면 사욕에 사로 잡혀 도덕적으로 미완성이나 실패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신하이고 상놈이고 농민이고 어린이고 후배이다. 사에 속하는 이 부류의 사람들은 공을 섬기고 공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 같은 신분적 위계의 공사관은 봉공(奉公)이란 말의 용례에서 잘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는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황(賑荒), 해관(解官)의 13부로 이루어져 있다. 수령에 임명된 자가 임지에 도착하여[부임] 임지를 떠날[해관] 때까지 마음에 두고 행할 바를 위와 같이 나열한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 모두가 봉공이다. 그런데 정약용이 열세 가지의 하나로 나열한 봉공은 수령이 임금의 명을 충(忠)으로 받들고, 상사인 관찰사를 성(誠)으로 섬기고, 이웃 고을의 수령과 우애함을 말하였다. 곧 공의 영역은 양반관료 사회로 국한되며 거기서 수령이 취할 올바른 마음자세와 몸가짐을 봉공이라 하였다.
조선성리학의 공사관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공을 구성하는 권위가 상호 충돌하게 되면, 예컨대 부모에 대한 효와 임금에 대한 충이 우선순위를 다투는 갈등이 발생하면 언제나 효가 충보다 우선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17세기에 유명한 예송(禮訟)이 두 차례나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임금은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여부였는데, 그렇다고 주장한 쪽이 결국 패하여 나중에 사약까지 받고 말았다. 이후 효의 윤리가 충을 제압하면서 19세기말까지 부동의 헤게모니를 차지하였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1908년 조선왕조가 패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13도의병총대장 이인영이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그 합리성이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조선왕조의 신하들에게서 임금은 타넘을 수 없는 권위였지만 초월적인 권위는 아니었다. 송(宋) 이래 중국에서는 황제 지배체제를 두고 일군만민(一君萬民)이라 하였는데,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말이었다. 조선왕조의 신하들은 집집마다 임금보다 더 높은 자신의 조상을 하늘로 모셨기 때문이다. 왕조가 위태로워지자 기호에 군림한 노론의 명문 송씨 가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 가문과 대립해 온 인근의 윤씨 가문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조상이 송씨 가문의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기인 1898년의 일이다. 비운에 죽은 명성황후의 능을 찾은 고종황제의 행차가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광통교 위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그러자 행차에 참가하고 있던 백관들은 물론 황제를 지근에서 모시는 시종원경과 경호병들조차 어가를 다리 위에 두고 흩어졌다. 그렇게 황제라 하지만 소낙비에 근위병이 흩어질 만큼 그 권위가 초라하고 분산적이었다. 충보다 효를 우선으로 여겼던 조선성리학이 오랫동안 나라를 지배한 결과였다.
요컨대 조선성리학의 사회ㆍ정치철학에서 자립적 개체로서 사의 존재는 끝까지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러했던 한 개별 사의 총화로서 공의 세계는 끝까지 미출현이었다. 사를 규정한 최고 도덕으로서 효는 인간들을 가문 단위로 분립케 했다. 조선성리학의 세계에서 가문을 초월하는 더 크고 높은 공의 세계로서 사회나 국가는 닫혀 있었다. 사람들은 가문이나 동향이나 동학의 인연을 벗어난 이방의 세계에서는 마치 쟁반 위의 모래알처럼 분산하고 대립하였다. 지극히 개성적이지만 좀처럼 단결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사회조직적 특질은, 흔히들 그러한 지적이 일제가 부식한 정체성론(停滯性論)의 편견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곤 하지만, 실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익숙하게 그의 사회생활에서 경험해 온 삶의 상식이기도 했던 것이다.
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속하게 된 서로가 서로에 낯선 익명성의 사회는 지역감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인들이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사회조직의 특질이었다. 이 저신뢰의 대중사회가 그에 속한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를 포함하여 타인의 정체를 규정하거나 구별함에 있어서 몰개성적 범주에 의존하게 만든 인과관계를 납득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왜 몰개성적 범주냐, 다시 말해 왜 인간들이 자신의 정체나 타인의 정체를 확인함에 있어서 다른 것도 아닌 지역감정이나 후술하는 민족감정과 같은 몰개성적 범주 내지 집단적 상징에 기댈 수밖에 없었느냐는 좀 더 엄밀히 그 역사적 배경과 인과를 따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의 정신사에 있어서 사적 개체로서 개별 인간이 공적 질서로 통합되는 원리, 곧 한국인의 공사관(公私觀)이 검토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이하 그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조선성리학이 정치와 문화에 절대적 지배력을 행세한 17-19세기의 공사 관계를 검토하면 그것이 두드러지게 관념적이고 윤리적이었다는 특질을 발견한다. 예컨대 조선성리학의 세계에서 공은 공리(公理)로서 자연과 인간사회의 생성과 운동을 관통하는 근본 원리에 해당하였다. 반면 사라 함은 사욕(私慾)으로써 어디까지나 공리에 의해 억제되고 순치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설정되었다. 공이 선이라면 사는 악이었다. 그 점이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 비해 조선성리학이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비교사적 특질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성리학의 교의에서 인간 욕망의 자연성에 바탕을 둔 자립적 개체로서 사의 존재는 끝까지 긍정되지 않았다. 공과 사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전자에 의해 후자는 소멸되어야 하는 이공멸사의 관계였다.
17세기 후반 유형원(柳馨遠)이 그의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이라는 토지개혁을 주장할 때의 논리가 바로 그와 같았다. 곧 농업이 천하의 대본인 것처럼 토지는 천하의 공물로서 공유이어야 하며, 이에 개인이 토지를 사유지로 갖는 것은 공리에 어긋나는 사욕으로서 마땅히 폐지되어야 했다. 이 같은 논리는 19세기 말까지 여러 성리학자가 펼친 토지개혁론에서도 마찬가지였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 있었던 농지개혁의 명분으로까지 이어졌다. 나아가 오늘날 이른바 진보파로 불리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게 천박한 인간 이해가 어디 있느냐고 펄펄 뛰는 것도 길게 보면 위와 같은 17-19세기 공사관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까지 조선성리학의 공사관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공과 사의 상하 위계질서이다. 공리를 터득하고 실천하여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군자로서 임금이고 양반이고 관료이고 어른이고 선배이다. 공의 질서나 권위는 이 사람들에 의해 담당된다. 반면 사욕에 사로 잡혀 도덕적으로 미완성이나 실패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신하이고 상놈이고 농민이고 어린이고 후배이다. 사에 속하는 이 부류의 사람들은 공을 섬기고 공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 같은 신분적 위계의 공사관은 봉공(奉公)이란 말의 용례에서 잘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는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황(賑荒), 해관(解官)의 13부로 이루어져 있다. 수령에 임명된 자가 임지에 도착하여[부임] 임지를 떠날[해관] 때까지 마음에 두고 행할 바를 위와 같이 나열한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 모두가 봉공이다. 그런데 정약용이 열세 가지의 하나로 나열한 봉공은 수령이 임금의 명을 충(忠)으로 받들고, 상사인 관찰사를 성(誠)으로 섬기고, 이웃 고을의 수령과 우애함을 말하였다. 곧 공의 영역은 양반관료 사회로 국한되며 거기서 수령이 취할 올바른 마음자세와 몸가짐을 봉공이라 하였다.
조선성리학의 공사관에서 관찰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공을 구성하는 권위가 상호 충돌하게 되면, 예컨대 부모에 대한 효와 임금에 대한 충이 우선순위를 다투는 갈등이 발생하면 언제나 효가 충보다 우선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17세기에 유명한 예송(禮訟)이 두 차례나 있었다. 논쟁의 핵심은 임금은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여부였는데, 그렇다고 주장한 쪽이 결국 패하여 나중에 사약까지 받고 말았다. 이후 효의 윤리가 충을 제압하면서 19세기말까지 부동의 헤게모니를 차지하였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1908년 조선왕조가 패망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13도의병총대장 이인영이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그 합리성이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조선왕조의 신하들에게서 임금은 타넘을 수 없는 권위였지만 초월적인 권위는 아니었다. 송(宋) 이래 중국에서는 황제 지배체제를 두고 일군만민(一君萬民)이라 하였는데, 조선왕조의 지배체제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말이었다. 조선왕조의 신하들은 집집마다 임금보다 더 높은 자신의 조상을 하늘로 모셨기 때문이다. 왕조가 위태로워지자 기호에 군림한 노론의 명문 송씨 가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그 가문과 대립해 온 인근의 윤씨 가문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조상이 송씨 가문의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기인 1898년의 일이다. 비운에 죽은 명성황후의 능을 찾은 고종황제의 행차가 궁궐로 돌아오는 길에 광통교 위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그러자 행차에 참가하고 있던 백관들은 물론 황제를 지근에서 모시는 시종원경과 경호병들조차 어가를 다리 위에 두고 흩어졌다. 그렇게 황제라 하지만 소낙비에 근위병이 흩어질 만큼 그 권위가 초라하고 분산적이었다. 충보다 효를 우선으로 여겼던 조선성리학이 오랫동안 나라를 지배한 결과였다.
요컨대 조선성리학의 사회ㆍ정치철학에서 자립적 개체로서 사의 존재는 끝까지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러했던 한 개별 사의 총화로서 공의 세계는 끝까지 미출현이었다. 사를 규정한 최고 도덕으로서 효는 인간들을 가문 단위로 분립케 했다. 조선성리학의 세계에서 가문을 초월하는 더 크고 높은 공의 세계로서 사회나 국가는 닫혀 있었다. 사람들은 가문이나 동향이나 동학의 인연을 벗어난 이방의 세계에서는 마치 쟁반 위의 모래알처럼 분산하고 대립하였다. 지극히 개성적이지만 좀처럼 단결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사회조직적 특질은, 흔히들 그러한 지적이 일제가 부식한 정체성론(停滯性論)의 편견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곤 하지만, 실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익숙하게 그의 사회생활에서 경험해 온 삶의 상식이기도 했던 것이다.
Ⅴ. 국민의 발견과 해체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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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 】::┣이영훈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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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Ⅴ 국민의 발견과 해체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지난 20세기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이 구래의 조선성리학을 대신하여 새롭게 발견한 커다란 하늘은 어떠한 것이었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인간들을 평화로운 질서로 통합하는 공화(共和)의 큰 원리는 무엇이었던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대답은 국민이란 새로운 정치철학의 범주이다. 1948년의 제헌헌법은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가리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이라고 칭하였다. 뒤이어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선언한 다음, 그 국민이 보유한 천부의 권리로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 이주, 직업선택 등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21세기 초에 이르러 그 국민의 권위가 19세기말 고종황제의 행차처럼 초라해졌다. 80년대 후반 민주화시대가 열리면서 민족, 시민 등과 같은 다른 범주의 정치철학이 국민을 해체하거나 분열시켜 왔기 때문이다. 여러 범주가 상호 경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통합하는 정치의 정신세계가 보다 고차의 원리로 진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합의 근본이 되는 범주를 해체해 버린다면, 그 때부터는 분열을 증폭하는 갈등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국민 범주를 해체시킨 상징적인 사건의 한 가지는 1996년에 있었던 국민학교의 초등학교로의 개칭이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1941년 일제가 전시동원을 위해 기존의 소학교에다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서투른 민족주의적 해석은 한국사에서 국민이란 범주가 어떻게 자생하였고 주체적으로 수용되었던가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였다. 19세기말까지 오늘날과 같은 국민이란 용어나 범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 범주는 개화기에 자유민권사상과 함께 도입되었다. 식민지기에 독립운동에 종사한 분들도 국민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선포하여 이후 제헌헌법의 선례가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 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1947년에 의결한 조선임시약헌(朝鮮臨時約憲) 제2조도 “조선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까지만 해도 여러 정치적 선언에서 국민과 인민이란 두 범주가 헤게모니를 다투었다. 1948년 제헌헌법이 만들어질 때도 국민을 대신하여 인민이란 용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국민 범주가 채택된 것은 인민이란 범주가 그 본래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전용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범주는 정치적 선언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ㆍ보통선거가 치러질 때 투표권을 행사할 국민의 범주가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세밀하게 규정되었다. 그에 따라 북한에서 내려왔거나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은 남한에 새로운 본적지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말해 38도 이남의 지역에 귀속 의지를 표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이 부여되었다. 그렇게 국민은 대한민국과 함께 새롭게 창출된 역사적 범주였다.
요컨대 국민이란 범주는 구한말 자유민권사상과 함께 유입된 이래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성숙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의 정치적 투쟁을 이겨내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주권자로 확정되고 선포된 것이었다. 그 역사적 성취가 김영삼 정부의 서투른 민족주의에 의해 일제의 잔재라는 누명을 쓰고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부류에 속하는 김영삼 정부의 실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사실상 폐기되었으며, 1995년에는 건국사의 갖가지 기억을 안고 있는 중앙정부의 청사를, 동양건축사에서 걸작으로 평가되는 그 건물을, 일제가 건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철거하였다.
민족이란 범주가 언제 어떻게 성립했는지, 그것이 보통 한국인들의 상식과 달리 불과 100년 전에 도입되고 확산되어 온 것인지에 관해서는 지난 10년간 훌륭한 연구가 많이 쌓여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민족이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예는 1900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후 민족은 한국인들을 하나의 역사적 운명공동체로 감각하는 정치적 범주로서 식민지기에 걸쳐 널리 유포되었다. 민족 범주가 확정되는 것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성립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민족의 성조가 기자인가 단군인가를 둘러싸고 지식인들의 의식은 분열되어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성립과 함께 단기 연호가 사용되고 개천절이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됨에 따라 기자에 대한 단군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민족주의는 40-50년대에는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대한국민’을 결속시키는 힘으로, 이후 60-70년대에 걸쳐서는 조국근대화를 위한 국민적 역량을 동원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민족주의의 역할이 변질되는 것은 80년 후반 민주화시대 이후 부쩍 활성화하기 시작한 통일운동의 과정에서였다. 민족통일을 위한 역사학은 대한민국을 민족의 분단을 초래하면서까지 반민족 친일세력이 미제와 결탁하여 세운 반공파시즘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하였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민족통일과 함께 없어질 나라로 그 역사적 위치가 설정되었다.
민족주의의 역사학과 정치학이 최고 절정에 달한 것은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에서였다. 여기서 남북의 두 정상은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며,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현행 헌법 제4조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지향하고 있음과 명확히 상치되는 것이지만, 공동선언을 주도한 정치가의 개인적 명망과 통일이 임박한 듯이 느끼는 대중의 착각이 어울려 커다란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선언을 통해 민족은 국민보다 상위 범주의 정치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점이 명확해짐과 더불어 국민의 분열은 노골화하고 민족주의의 쇠락도 시작되었다.
2000년의 공동선언은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는 남북한의 경제적 교류를, 실은 남한의 대북 지원을 다소간에 활성화하였을 뿐,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하등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국가를 부수고 합치고 하는 것은 고도의 이념적 내지 이성적 영역의 문제이다. 인종이 다르더라도 이념이 같으면 로마제국이나 오늘날의 유럽연합처럼 통일을 이룰 수 있지만, 인종이 같더라도 이념이 다르면 통일은커녕 내전만 일어날 뿐이다. 본질이 그러한 문제를 민족이란 감성적 범주로 접근하려고 했으니 한계는 처음부터 명확하였다. 아마 ‘우리 민족끼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선언을 이끌어낸 두 당사자도 알지 못했을 터이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감성정치가 그들의 헌법적 가치를 짓누르기 시작하자 많은 한국인들은 비로소 그들의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원 ‘대한국민’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대립해 왔으며, 그 결과 쉽게 치유되기 힘든 깊은 분열의 상처를 안게 되었다.
분열의 저변에서는 자유 이념의 빈곤이라는 근본적인 제약이 가로 놓여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처참한 인권 실태를 고발한 작가를 초청한 것은 청와대가 아니라 백악관이었다.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킨 것은 한국의 국회가 아니라 미국의 의회였다. 탈북자들의 수용소 체험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깊은 관심을 표하는 것은 일본의 대학생이지 한국의 대학생은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무려 28년을 버텨낸 어느 탈북자는 자신의 체험을 전하는 강연장에서 대학생들이 질문은커녕 졸기만 하는 데 더 없는 실망감을 표하였다.
이러한 황망한 사태가 초래된 것은 원래 자유 또는 인권이란 범주의 정치철학이 불과 100년 전에 들어온 수입품이라는 사실, 그런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 범주를 해체한 뒤 자유ㆍ인권 지향의 어떠한 국민교육도 시행하지 않고 있는 현실, 게다가 자유주의 하면 있는 자의 논리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한국 지성사회의 저급한 평등주의 무엇보다 그런 풍토를 떠받치면서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조선성리학의 정치철학 등의 상호작용에 의해서인데,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별도의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지난 20세기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이 구래의 조선성리학을 대신하여 새롭게 발견한 커다란 하늘은 어떠한 것이었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인간들을 평화로운 질서로 통합하는 공화(共和)의 큰 원리는 무엇이었던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대답은 국민이란 새로운 정치철학의 범주이다. 1948년의 제헌헌법은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가리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이라고 칭하였다. 뒤이어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선언한 다음, 그 국민이 보유한 천부의 권리로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 이주, 직업선택 등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21세기 초에 이르러 그 국민의 권위가 19세기말 고종황제의 행차처럼 초라해졌다. 80년대 후반 민주화시대가 열리면서 민족, 시민 등과 같은 다른 범주의 정치철학이 국민을 해체하거나 분열시켜 왔기 때문이다. 여러 범주가 상호 경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통합하는 정치의 정신세계가 보다 고차의 원리로 진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합의 근본이 되는 범주를 해체해 버린다면, 그 때부터는 분열을 증폭하는 갈등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국민 범주를 해체시킨 상징적인 사건의 한 가지는 1996년에 있었던 국민학교의 초등학교로의 개칭이었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1941년 일제가 전시동원을 위해 기존의 소학교에다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서투른 민족주의적 해석은 한국사에서 국민이란 범주가 어떻게 자생하였고 주체적으로 수용되었던가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였다. 19세기말까지 오늘날과 같은 국민이란 용어나 범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 범주는 개화기에 자유민권사상과 함께 도입되었다. 식민지기에 독립운동에 종사한 분들도 국민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임시약헌(大韓民國臨時約憲)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선포하여 이후 제헌헌법의 선례가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 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1947년에 의결한 조선임시약헌(朝鮮臨時約憲) 제2조도 “조선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까지만 해도 여러 정치적 선언에서 국민과 인민이란 두 범주가 헤게모니를 다투었다. 1948년 제헌헌법이 만들어질 때도 국민을 대신하여 인민이란 용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국민 범주가 채택된 것은 인민이란 범주가 그 본래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전용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범주는 정치적 선언만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ㆍ보통선거가 치러질 때 투표권을 행사할 국민의 범주가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세밀하게 규정되었다. 그에 따라 북한에서 내려왔거나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들은 남한에 새로운 본적지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말해 38도 이남의 지역에 귀속 의지를 표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이 부여되었다. 그렇게 국민은 대한민국과 함께 새롭게 창출된 역사적 범주였다.
요컨대 국민이란 범주는 구한말 자유민권사상과 함께 유입된 이래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성숙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의 정치적 투쟁을 이겨내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주권자로 확정되고 선포된 것이었다. 그 역사적 성취가 김영삼 정부의 서투른 민족주의에 의해 일제의 잔재라는 누명을 쓰고 해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부류에 속하는 김영삼 정부의 실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사실상 폐기되었으며, 1995년에는 건국사의 갖가지 기억을 안고 있는 중앙정부의 청사를, 동양건축사에서 걸작으로 평가되는 그 건물을, 일제가 건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철거하였다.
민족이란 범주가 언제 어떻게 성립했는지, 그것이 보통 한국인들의 상식과 달리 불과 100년 전에 도입되고 확산되어 온 것인지에 관해서는 지난 10년간 훌륭한 연구가 많이 쌓여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민족이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예는 1900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후 민족은 한국인들을 하나의 역사적 운명공동체로 감각하는 정치적 범주로서 식민지기에 걸쳐 널리 유포되었다. 민족 범주가 확정되는 것은 해방 후 대한민국의 성립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민족의 성조가 기자인가 단군인가를 둘러싸고 지식인들의 의식은 분열되어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성립과 함께 단기 연호가 사용되고 개천절이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됨에 따라 기자에 대한 단군의 승리가 결정되었다.
민족주의는 40-50년대에는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대한국민’을 결속시키는 힘으로, 이후 60-70년대에 걸쳐서는 조국근대화를 위한 국민적 역량을 동원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민족주의의 역할이 변질되는 것은 80년 후반 민주화시대 이후 부쩍 활성화하기 시작한 통일운동의 과정에서였다. 민족통일을 위한 역사학은 대한민국을 민족의 분단을 초래하면서까지 반민족 친일세력이 미제와 결탁하여 세운 반공파시즘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하였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민족통일과 함께 없어질 나라로 그 역사적 위치가 설정되었다.
민족주의의 역사학과 정치학이 최고 절정에 달한 것은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에서였다. 여기서 남북의 두 정상은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며,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현행 헌법 제4조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지향하고 있음과 명확히 상치되는 것이지만, 공동선언을 주도한 정치가의 개인적 명망과 통일이 임박한 듯이 느끼는 대중의 착각이 어울려 커다란 정치적 갈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선언을 통해 민족은 국민보다 상위 범주의 정치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점이 명확해짐과 더불어 국민의 분열은 노골화하고 민족주의의 쇠락도 시작되었다.
2000년의 공동선언은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는 남북한의 경제적 교류를, 실은 남한의 대북 지원을 다소간에 활성화하였을 뿐,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하등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국가를 부수고 합치고 하는 것은 고도의 이념적 내지 이성적 영역의 문제이다. 인종이 다르더라도 이념이 같으면 로마제국이나 오늘날의 유럽연합처럼 통일을 이룰 수 있지만, 인종이 같더라도 이념이 다르면 통일은커녕 내전만 일어날 뿐이다. 본질이 그러한 문제를 민족이란 감성적 범주로 접근하려고 했으니 한계는 처음부터 명확하였다. 아마 ‘우리 민족끼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선언을 이끌어낸 두 당사자도 알지 못했을 터이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감성정치가 그들의 헌법적 가치를 짓누르기 시작하자 많은 한국인들은 비로소 그들의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원 ‘대한국민’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대립해 왔으며, 그 결과 쉽게 치유되기 힘든 깊은 분열의 상처를 안게 되었다.
분열의 저변에서는 자유 이념의 빈곤이라는 근본적인 제약이 가로 놓여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처참한 인권 실태를 고발한 작가를 초청한 것은 청와대가 아니라 백악관이었다.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킨 것은 한국의 국회가 아니라 미국의 의회였다. 탈북자들의 수용소 체험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깊은 관심을 표하는 것은 일본의 대학생이지 한국의 대학생은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무려 28년을 버텨낸 어느 탈북자는 자신의 체험을 전하는 강연장에서 대학생들이 질문은커녕 졸기만 하는 데 더 없는 실망감을 표하였다.
이러한 황망한 사태가 초래된 것은 원래 자유 또는 인권이란 범주의 정치철학이 불과 100년 전에 들어온 수입품이라는 사실, 그런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 범주를 해체한 뒤 자유ㆍ인권 지향의 어떠한 국민교육도 시행하지 않고 있는 현실, 게다가 자유주의 하면 있는 자의 논리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한국 지성사회의 저급한 평등주의 무엇보다 그런 풍토를 떠받치면서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조선성리학의 정치철학 등의 상호작용에 의해서인데,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별도의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Ⅵ. 맺음말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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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Ⅵ 맺음말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갈등의 악성구조는 그에 상응하는 깊은 역사적 인과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을 가장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있는 지역감정은 60년대 이후 특정 지역 출신의 정치세력이 장기간 집권하는 과정에서 생겼다기보다 고려ㆍ조선왕조의 천년에 걸친 지역차별 정책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역대의 왕조는 그에 속한 지역과 신민을 지배함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잘 단합된 공동체의식을 배양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초월적인 정치철학과 통합적인 사회윤리를 역대의 왕조는 결여하였다.
한국의 전통사회는 높은 신뢰의 공동체사회라기보다 낮은 신뢰의 대중사회로서의 특질을 지녔다. 지연이나 직능에 바탕을 둔 영속하는 인격으로서 단체 또는 공동체는 결여된 편이었다. 인간의 사회적 생존에 불가결한 규범, 질서, 공공기능은 이해의 직접적 당사자의 결사인 계에 의해 공급되었는데, 그것은 그 목적 기능에 따라 다양한 공간적 범위와 신분적 층위에서 분산적으로 또 중층적으로 맺어졌다.
19세기까지의 전통사회를 통합한 조선성리학에서 인간 욕망의 자연성과 그에 바탕을 둔 자립적 개체로서 사(私)의 범주는 끝내 승인되지 않았다. 인간들은 성리학의 윤리에 따라 상하 위계의 질서로 통합되었다. 가장 강인한 통합의 단위는 효의 윤리에 바탕을 둔 친족집단으로서 가문이었다. 개별 가문을 고차의 정치로 통합하는 충의 윤리는 강력하지 못했으며 자주 효의 윤리에 압도되었다.
이 같은 분산적 구조의 전통사회는 일제의 지배기를 거치면서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국가로 재편성되었다. 국가는 사회를 통합하고 지배하는 유일하고 초월적인 권위로 군림하였다. 사회에서 관찰되는 자치기능은 상장례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를 넘어서는 사회의 영역에서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익명과 불신으로 대립하였다. 이 같은 국가와 사회의 존재형태는 그대로 해방 후의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 사회를 통합하는, 무연(無緣)의 인간들을 빨아올리는, 유일한 권위로서 중앙권력이 건국, 전쟁, 조국근대화와 같은 정당하고 강력한 공의 권위로 장악되었던 60-70년대까지 사회가 분열하고 갈등할 여지는 그리 없었다. 그 사이 한국인들을 새롭게 통합한 정치철학의 범주는 국민이었다. 19세기말에 도입된 자유민권사상이 독립운동을 통해 발전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투쟁한 결과로 쟁취한 것이 1948년 제헌헌법이 선포한 국민의 범주였다.
오늘날과 같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가 갈등의 악성구조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것은 80년대 이후 민주화시대를 경과하면서부터이다. 크게 보면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그의 향유자들에게 청구하는 마땅한 비용이었다. 그런데 비용이 지불된 결과는 민주주의의 순기능으로서 통합의 고양이 아니라 분열의 증폭이었다. 그러한 갈등의 악성구조가 성립한 것은 국민이란 최고 수준의 범주가 민족이란 또 하나의 거대 범주에 의해 짓눌리고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통일운동을 견인한 민족이란 감성적 범주는 그 거대한 정치적 동원력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을 보다 높은 수준의 문명으로 이끌 보편적 원리를 결여하였다. 2000년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을 선포한 남북정상회담은 민족 범주가 국민 범주를 압도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래 한국인을 하나의 질서로 통합해 온 국민 범주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고 그 자리에 갈등의 악성 구조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상이 이 글의 내용이다. 이후 지난 10년간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사족을 붙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2002년의 대선 과정에서 모당의 대선 후보가 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 필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수도 이전이라는 그야말로 천하 공공의 사업이 전문가의 검토나 공론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채 공당의 공약으로 걸린 것이다. 그것은 대선 후보자의 경박함에 기인한다기보다 필자가 보기엔 역사적으로 커다란 공의 세계를 창출하고 받들어보지 못한 한국사의 유산이나 부채에 속하는 현상이었다. 2007년의 대선에서 채산성도 없는 공항을 특정 지역에 건설하겠다는 모당 대선후보의 공약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빙공영사(憑公營私)의 공약이었건만 향당(鄕黨)의 완고한 정치세력은 그것을 지역의 기득권으로 고착시킴으로서 국민의 분열에 일조를 하였다.
가장 심각한 분열의 증후는 2008년 정권의 교체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은 촛불시위에서 관찰되었다. 여러 가지로 내걸린 명분에 구애되지 않고 시위를 조직하거나 참여한 정치세력을 분석하면 그것은 명확히 국민 범주를 복구하려는 신정부의 정책 지향에 맞선 민족 정치의 완강한 저항에 다름 아니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천안함 폭침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군사에 대해 하등의 전문 지식이나 경험을 갖지 못한 자들이 민족감정과 지역정치를 동원하여 정부의 공식 발표를 부정하였으며, 공당인 야당조차 그에 동조하였다. 그렇게 커다란 공의 세계가 붕괴했음이 더 없이 명백해지자 이번에서 각양의 시민단체, 환경단체, 심지어 종교단체까지 나서 마치 왕조시대의 붕당정치처럼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공(公)을 참칭(僭稱)하고 있는 뭇 사당(私黨)의 소란을 잠재우려면 국민 범주를 건강하게 재건한 위에 정치가 정직하고 강건해지는 길 밖에 없다.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갈등의 악성구조는 그에 상응하는 깊은 역사적 인과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을 가장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있는 지역감정은 60년대 이후 특정 지역 출신의 정치세력이 장기간 집권하는 과정에서 생겼다기보다 고려ㆍ조선왕조의 천년에 걸친 지역차별 정책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역대의 왕조는 그에 속한 지역과 신민을 지배함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잘 단합된 공동체의식을 배양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초월적인 정치철학과 통합적인 사회윤리를 역대의 왕조는 결여하였다.
한국의 전통사회는 높은 신뢰의 공동체사회라기보다 낮은 신뢰의 대중사회로서의 특질을 지녔다. 지연이나 직능에 바탕을 둔 영속하는 인격으로서 단체 또는 공동체는 결여된 편이었다. 인간의 사회적 생존에 불가결한 규범, 질서, 공공기능은 이해의 직접적 당사자의 결사인 계에 의해 공급되었는데, 그것은 그 목적 기능에 따라 다양한 공간적 범위와 신분적 층위에서 분산적으로 또 중층적으로 맺어졌다.
19세기까지의 전통사회를 통합한 조선성리학에서 인간 욕망의 자연성과 그에 바탕을 둔 자립적 개체로서 사(私)의 범주는 끝내 승인되지 않았다. 인간들은 성리학의 윤리에 따라 상하 위계의 질서로 통합되었다. 가장 강인한 통합의 단위는 효의 윤리에 바탕을 둔 친족집단으로서 가문이었다. 개별 가문을 고차의 정치로 통합하는 충의 윤리는 강력하지 못했으며 자주 효의 윤리에 압도되었다.
이 같은 분산적 구조의 전통사회는 일제의 지배기를 거치면서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국가로 재편성되었다. 국가는 사회를 통합하고 지배하는 유일하고 초월적인 권위로 군림하였다. 사회에서 관찰되는 자치기능은 상장례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를 넘어서는 사회의 영역에서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익명과 불신으로 대립하였다. 이 같은 국가와 사회의 존재형태는 그대로 해방 후의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 사회를 통합하는, 무연(無緣)의 인간들을 빨아올리는, 유일한 권위로서 중앙권력이 건국, 전쟁, 조국근대화와 같은 정당하고 강력한 공의 권위로 장악되었던 60-70년대까지 사회가 분열하고 갈등할 여지는 그리 없었다. 그 사이 한국인들을 새롭게 통합한 정치철학의 범주는 국민이었다. 19세기말에 도입된 자유민권사상이 독립운동을 통해 발전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투쟁한 결과로 쟁취한 것이 1948년 제헌헌법이 선포한 국민의 범주였다.
오늘날과 같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가 갈등의 악성구조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것은 80년대 이후 민주화시대를 경과하면서부터이다. 크게 보면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그의 향유자들에게 청구하는 마땅한 비용이었다. 그런데 비용이 지불된 결과는 민주주의의 순기능으로서 통합의 고양이 아니라 분열의 증폭이었다. 그러한 갈등의 악성구조가 성립한 것은 국민이란 최고 수준의 범주가 민족이란 또 하나의 거대 범주에 의해 짓눌리고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통일운동을 견인한 민족이란 감성적 범주는 그 거대한 정치적 동원력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을 보다 높은 수준의 문명으로 이끌 보편적 원리를 결여하였다. 2000년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을 선포한 남북정상회담은 민족 범주가 국민 범주를 압도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래 한국인을 하나의 질서로 통합해 온 국민 범주에 커다란 균열이 발생하고 그 자리에 갈등의 악성 구조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상이 이 글의 내용이다. 이후 지난 10년간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사족을 붙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2002년의 대선 과정에서 모당의 대선 후보가 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 필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수도 이전이라는 그야말로 천하 공공의 사업이 전문가의 검토나 공론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채 공당의 공약으로 걸린 것이다. 그것은 대선 후보자의 경박함에 기인한다기보다 필자가 보기엔 역사적으로 커다란 공의 세계를 창출하고 받들어보지 못한 한국사의 유산이나 부채에 속하는 현상이었다. 2007년의 대선에서 채산성도 없는 공항을 특정 지역에 건설하겠다는 모당 대선후보의 공약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빙공영사(憑公營私)의 공약이었건만 향당(鄕黨)의 완고한 정치세력은 그것을 지역의 기득권으로 고착시킴으로서 국민의 분열에 일조를 하였다.
가장 심각한 분열의 증후는 2008년 정권의 교체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은 촛불시위에서 관찰되었다. 여러 가지로 내걸린 명분에 구애되지 않고 시위를 조직하거나 참여한 정치세력을 분석하면 그것은 명확히 국민 범주를 복구하려는 신정부의 정책 지향에 맞선 민족 정치의 완강한 저항에 다름 아니었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천안함 폭침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군사에 대해 하등의 전문 지식이나 경험을 갖지 못한 자들이 민족감정과 지역정치를 동원하여 정부의 공식 발표를 부정하였으며, 공당인 야당조차 그에 동조하였다. 그렇게 커다란 공의 세계가 붕괴했음이 더 없이 명백해지자 이번에서 각양의 시민단체, 환경단체, 심지어 종교단체까지 나서 마치 왕조시대의 붕당정치처럼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공(公)을 참칭(僭稱)하고 있는 뭇 사당(私黨)의 소란을 잠재우려면 국민 범주를 건강하게 재건한 위에 정치가 정직하고 강건해지는 길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