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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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 】::┣이영훈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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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Ⅳ 일본군위안부의 강제동원 (시대정신 2005봄 통권 28호)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전시기의 일제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순결한 처녀들을 강제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로 약칭)로 삼은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그 분노는 오늘날의 일본정부가 위안부 생존자에 대한 공적 배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국인들의 공통된 시각과 일본정부에 대한 요구는 매우 강고하며 전혀 흔들림이 없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이해와 해결방식이 국내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벌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인들은 정신대 또는 위안부에 관해 그 같이 확고한 인식과 입장을 취해 왔던가. 역사가는 그의 직업윤리 상 자칫 몰매를 맞을지도 모를 이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국사 교과서에서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것은 1952년 신석호가 쓴 교과서에서이다(申奭鎬 1952: 213).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혹은 징용, 혹은 징병, 혹은 학병, 혹은 보국대, 혹은 정신대(挺身隊) 등으로 붙들어 가서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최후에는 소위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 민족을 전쟁에 몰살시키려 하였으며…….
정신대에 관한 신석호의 이 같은 서술은 1962년 발행의 그의 교과서에서까지 한 자귀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 1973년에 그가 쓴 교과서에서는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언제부터 정신대에 관한 기술이 생략되기 시작했는지 추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무척 흥미로운 점은 위의 기술에서 정신대가 위안부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징용, 징병, 학병, 보국대 등과 함께 열거된 다음, ‘과중한 노동’에 사역된 존재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병사를 접대한 행위를 ‘과도한 노동’이라고 표현했다고 읽기는 한국인들의 일반적 언어감각에서 무리이다. 말하자면 신석호의 교과서에서 정신대는 공장 등에 동원된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신대가 원래 그러한 것이었음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소련의 연합국이 여성 노동을 군수공장에 동원하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일제도 그에 자극을 받아 전장으로 끌려간 남자의 빈 자리를 여자로 채우고자 했는데 바로 그것이 정신대이다. 정신대라는 말이 최초로 나온 것은 1943년 9월 일본정부의 차관회의에서이며, 1944년 3월에는 내각에서 「여자정신대강화방책요강(女子挺身隊强化方策要綱)」이 결의되었다(井上節子 1998: 7-14). 그에 의하면 14세 이상의 미혼여성을 자발적으로 학교·지역·직장을 단위로 정신대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에서 노동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한 것이어서 볼 만한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일제는 1944년 8월에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을 발동하여 12-40세 미혼여성을 산업현장으로 강제동원한다. 그렇지만 이 법령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였지 식민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발동되지는 않았다. 식민지에서 정신대가 조직된 최초의 사례는 1943년 11월 서울 시내의 접객업소에 종사한 남녀 가운데 3,349명(내 조선인 2,454명)의 여자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 1944년 3월에는 여자정신대 제1대가 평양의 공장에, 4월에는 고녀생 제1회 정신대가 인천의 조병창(造兵廠)에 투입되었다. 뒤이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군수공장에 투입된 정신대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정확한 총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전시기의 동원체제를 신석호는 나이 40에 목도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1952년에 그의 교과서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 그 뜻이 애매할 수는 없었다. 앞서 해설한대로 그것은 군수공장 등에서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 연약한 여성들을 가리켰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대 신화가 생겨난 과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중대한 전제를 발견한다. 말하자면 신석호가 국사 교과서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를 구사한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러한 집단기억이 강하게 성립해 있었다면, 신석호의 정신대 기술이 원래 위와 같은 형태일 수도 없거니와 그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항의가 그 같은 정신대 기술을 10년 이상 교과서에서 건재하도록 방치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1960년대 이후부터 생겨난 것임에 틀림없다.
잠시 위안부의 역사를 소개한다.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상하이의 일본 해군기지의 주변에서 생겨났다. 현지 부대장의 재량으로 병사들의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기지 주변의 유흥업자들에게 일본군 전용의 위안소를 설치하고 경영을 위탁한 것이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수뇌는 중국 및 동남아 전역의 일본군 주둔지에서 대체로 병사 100명 당 1명의 위안부를 충원하는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그 중 최전선에 속하는 일부를 제외한 대개의 위안소가 민간업자들에게 위탁 경영되었다. 위안부는 주로 일본·중국·한국 세 민족으로 구성되었는데, 말기가 될수록 한국 여자의 비중이 커졌다. 그 정확한 숫자에 대해선 구구한 추측이 있다. 위안소 경영주 가운데는 한국인도 있었다. 한국 여자가 많은 위안소는 대개 한국인에 의해 경영되었다. 위안부의 모집은 위안소 경영주나 그들의 대리인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일본군과 총독부는 알선이나 도항증(渡航證)의 발급으로 그에 적극 협조하였다. 모집책에 의한 위안부의 모집에는 광범한 인신약취와 취업사기가 동반되었다. 생존 위안부 175명의 증언에 의하면,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다(정진성 2004: 66). 위안부들은 위안소를 함부로 이탈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사실상의 구금상태에서 병사들의 위안을 강요받았다. 그들은 당시 국제법이 금하고 있는 성노예(性奴隸)였으며, 일제는 노예제를 조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위안부들은 병사들을 접대한 대가로 군표(軍票) 형태로 소정의 보수를 받고 위안소 주인과 분배하였다. 그렇지만 축적에 성공한 위안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안부는 주인으로부터 받은 선대금(先貸金) 등을 이유로 빚에 시달렸으며, 전쟁 말기에는 금융망이 마비되어 군표를 현금화할 수 없었던 불쌍한 경우도 많았다.1)
이상과 같이 정신대와 위안부는 그 역사적 경로에서 확연히 다른 두 존재였다. 그리고 전술한 대로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양자를 동일시하는 대중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 두 가지를 전혀 구분하고 있지 않을까? 지난 40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나. 그 원인을 완벽하게 다 밝힐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만큼은 쉽게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실제 1943∼1945년간 정신대가 비록 자발적인 참여라고 하나 사실상 강제동원되다시피 할 때 민간에서는 큰 혼란이 있었다. 예컨대 학교에 다니는 딸을 중퇴시킨 다음 결혼시키는 소동이 적지 않았다. 필자의 집안에도 가까운 친척 여자의 결혼이 그러하였다. 저항이 불가능한 강력한 외래 권력이 일찍이 없었던 여성노동을 동원한다고 했을 때 식민지 민중의 정신적 공황이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위안소에 여자들을 데려가기 위한 모집책들의 사기와 약취가 극성에 달해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악성의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 강조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신대로 공장에 간 여자들 가운데는 대오를 이탈하거나 공장이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되는 통에 위안부로 떨어진 여자들이 있었다. 생존 위안부 175명 가운데 8명이 그러했다는 증언이 채취되어 있다(정진성 2004: 66).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산발적이거나 비체계적인 기억만으로는 대중의 집단기억이 형성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계기와 작용이 있어서 이들 산발적이고 비체계적인 재료들을 잘 다듬어진 민족설화로 가공해 낸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국사 교과서의 관련 서술을 유심히 추적해 보자. 신석호의 교과서 이외에서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1968년의 교과서에서이다(문교부, 1968: 173).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로 징용령을 실시하여 막대한 노동력을 공장, 광산, 군사 기지로 끌어갔으며 심지어 연약한 여성들까지도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비명에 죽고, 고초를 당한 우리 동포는 수백만이나 되었다.
여기서의 ‘여자정신대’는 그들이 강제동원되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 없어 그 실체가 매우 애매하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끌려간 곳 가운데 ‘군사 기지’가 있어 그녀들의 성(性)이 일본군에 의해 착취되었음이 강하게 시사되고 있다. 간호부도 아닐진대 정신대란 이름의 여성이 ‘군사 기지’에서 달리 무슨 일을 하였겠는가? 나는 이 1968년의 언저리에서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민족설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망치질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2) 공교롭게도 전술한 대로 일제가 토지의 40%를 수탈했다는 신화도 바로 이 언저리에서 생겨났다. 신화의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위의 글을 썼으며, 그의 정신세계에서 어떠한 개인적 체험이나 정보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부지불식간에 양자를 오버랩시키게 했는지까지 파헤칠 필요가 있으나 추후의 연구과제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1968년 교과서의 정신대 서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으며, 이후 1978년까지 교과서에서 정신대나 위안부에 관한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79년의 국정 교과서에서이며 이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중등 교과서를 중심으로 서술이 변해온 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79∼1982년: (일제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학생과 청년들을 전선으로 끌어갔으며 심지어는 젊은 여자들까지도 산업 시설과 전선으로 강제로 끌어갔다.
1983∼1996년: (일제는) 우리 청장년을 강제로 징용하여 공장에서 노동을 시켰고 마침내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청년 학생들을 전선으로 끌어갔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
1997∼2001년: 일제는 <중략> 강제 징병제와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많은 한국의 청장년들이 각지의 전선에서 희생되었다, 이 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2002년∼ : 일제는 여성들도 근로 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끌고 가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더욱이 많은 수의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시아 각 지역으로 보내 군대 위안부로 만들어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게 하였다.
1979∼1982년간은 젊은 여자가 끌려 간 곳 가운데 ‘산업 시설’이 있어 원래의 정신대를 가리키는 취지가 엿보이나 동시에 ‘전선’에도 끌려갔다고 하여 곧 위안부로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83-1996년의 14년간에는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여자가 희생되었다고 할 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연상하지 못할 중학생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의 망치질을 통해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1997년이다. 이후 2001년까지 중등 국사 교과서는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에 이르러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이 국사의 이름으로 훌륭히 공식화되었다.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집단기억의 성립에는 국사 교과서만이 유일한 공로자가 아니었다. 특히 언론의 부주의하고 심지어 선정적이기까지 한 보도자세가 한 몫을 하였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인의 국민적 관심사로 떠 오른 것은 1992년이다. 그 해에 김학순(金學順)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고백함으로써 성노예제를 조직한 구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하였다. 당시 도하 신문과 방송에서 위안부에 관한 공식 호칭은 거의 정신대 일색이었다. 역사가라고도 할 수 없는 어느 교수는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을 낡은 법전에서 찾아 낸 다음, 일제가 순결한 여학생들을 위안부로 대량 동원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고 소란을 떨었다. 그러자 가장 유력한 일간지의 하나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1면의 톱기사로 보도하였다.
1997년도 교과서의 극단적인 오류는 2002년에 이르러 수정되었다. 앞서 인용, 소개한 대로 2002년도 교과서는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여 전자가 노동력의 착취임을, 후자가 성의 착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같은 수정은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여 써야만 하는 역사가의 직업윤리에서 볼 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저간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내의 높아진 연구수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거기서는 아직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여 위안부를 일제가 동원한 정신대의 부분집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한번 만들어진 민족설화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좀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전시기의 일제가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순결한 처녀들을 강제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로 약칭)로 삼은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에 대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그 분노는 오늘날의 일본정부가 위안부 생존자에 대한 공적 배상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한 한국인들의 공통된 시각과 일본정부에 대한 요구는 매우 강고하며 전혀 흔들림이 없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이해와 해결방식이 국내에서 공개적인 논쟁을 벌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인들은 정신대 또는 위안부에 관해 그 같이 확고한 인식과 입장을 취해 왔던가. 역사가는 그의 직업윤리 상 자칫 몰매를 맞을지도 모를 이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국사 교과서에서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것은 1952년 신석호가 쓴 교과서에서이다(申奭鎬 1952: 213).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혹은 징용, 혹은 징병, 혹은 학병, 혹은 보국대, 혹은 정신대(挺身隊) 등으로 붙들어 가서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최후에는 소위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 민족을 전쟁에 몰살시키려 하였으며…….
정신대에 관한 신석호의 이 같은 서술은 1962년 발행의 그의 교과서에서까지 한 자귀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 1973년에 그가 쓴 교과서에서는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언제부터 정신대에 관한 기술이 생략되기 시작했는지 추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무척 흥미로운 점은 위의 기술에서 정신대가 위안부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징용, 징병, 학병, 보국대 등과 함께 열거된 다음, ‘과중한 노동’에 사역된 존재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가 병사를 접대한 행위를 ‘과도한 노동’이라고 표현했다고 읽기는 한국인들의 일반적 언어감각에서 무리이다. 말하자면 신석호의 교과서에서 정신대는 공장 등에 동원된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신대가 원래 그러한 것이었음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소련의 연합국이 여성 노동을 군수공장에 동원하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일제도 그에 자극을 받아 전장으로 끌려간 남자의 빈 자리를 여자로 채우고자 했는데 바로 그것이 정신대이다. 정신대라는 말이 최초로 나온 것은 1943년 9월 일본정부의 차관회의에서이며, 1944년 3월에는 내각에서 「여자정신대강화방책요강(女子挺身隊强化方策要綱)」이 결의되었다(井上節子 1998: 7-14). 그에 의하면 14세 이상의 미혼여성을 자발적으로 학교·지역·직장을 단위로 정신대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에서 노동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참여를 전제한 것이어서 볼 만한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일제는 1944년 8월에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을 발동하여 12-40세 미혼여성을 산업현장으로 강제동원한다. 그렇지만 이 법령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였지 식민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발동되지는 않았다. 식민지에서 정신대가 조직된 최초의 사례는 1943년 11월 서울 시내의 접객업소에 종사한 남녀 가운데 3,349명(내 조선인 2,454명)의 여자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어 1944년 3월에는 여자정신대 제1대가 평양의 공장에, 4월에는 고녀생 제1회 정신대가 인천의 조병창(造兵廠)에 투입되었다. 뒤이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군수공장에 투입된 정신대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 정확한 총수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전시기의 동원체제를 신석호는 나이 40에 목도하였다. 그러했던 그가 1952년에 그의 교과서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 때 그 뜻이 애매할 수는 없었다. 앞서 해설한대로 그것은 군수공장 등에서 ‘과중한 노동’에 시달린 연약한 여성들을 가리켰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대 신화가 생겨난 과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중대한 전제를 발견한다. 말하자면 신석호가 국사 교과서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를 구사한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일시하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러한 집단기억이 강하게 성립해 있었다면, 신석호의 정신대 기술이 원래 위와 같은 형태일 수도 없거니와 그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항의가 그 같은 정신대 기술을 10년 이상 교과서에서 건재하도록 방치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1960년대 이후부터 생겨난 것임에 틀림없다.
잠시 위안부의 역사를 소개한다. 최초의 위안소는 1932년 상하이의 일본 해군기지의 주변에서 생겨났다. 현지 부대장의 재량으로 병사들의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기지 주변의 유흥업자들에게 일본군 전용의 위안소를 설치하고 경영을 위탁한 것이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수뇌는 중국 및 동남아 전역의 일본군 주둔지에서 대체로 병사 100명 당 1명의 위안부를 충원하는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그 중 최전선에 속하는 일부를 제외한 대개의 위안소가 민간업자들에게 위탁 경영되었다. 위안부는 주로 일본·중국·한국 세 민족으로 구성되었는데, 말기가 될수록 한국 여자의 비중이 커졌다. 그 정확한 숫자에 대해선 구구한 추측이 있다. 위안소 경영주 가운데는 한국인도 있었다. 한국 여자가 많은 위안소는 대개 한국인에 의해 경영되었다. 위안부의 모집은 위안소 경영주나 그들의 대리인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일본군과 총독부는 알선이나 도항증(渡航證)의 발급으로 그에 적극 협조하였다. 모집책에 의한 위안부의 모집에는 광범한 인신약취와 취업사기가 동반되었다. 생존 위안부 175명의 증언에 의하면,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다(정진성 2004: 66). 위안부들은 위안소를 함부로 이탈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사실상의 구금상태에서 병사들의 위안을 강요받았다. 그들은 당시 국제법이 금하고 있는 성노예(性奴隸)였으며, 일제는 노예제를 조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위안부들은 병사들을 접대한 대가로 군표(軍票) 형태로 소정의 보수를 받고 위안소 주인과 분배하였다. 그렇지만 축적에 성공한 위안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안부는 주인으로부터 받은 선대금(先貸金) 등을 이유로 빚에 시달렸으며, 전쟁 말기에는 금융망이 마비되어 군표를 현금화할 수 없었던 불쌍한 경우도 많았다.1)
이상과 같이 정신대와 위안부는 그 역사적 경로에서 확연히 다른 두 존재였다. 그리고 전술한 대로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양자를 동일시하는 대중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이 두 가지를 전혀 구분하고 있지 않을까? 지난 40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되었나. 그 원인을 완벽하게 다 밝힐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몇 가지만큼은 쉽게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실제 1943∼1945년간 정신대가 비록 자발적인 참여라고 하나 사실상 강제동원되다시피 할 때 민간에서는 큰 혼란이 있었다. 예컨대 학교에 다니는 딸을 중퇴시킨 다음 결혼시키는 소동이 적지 않았다. 필자의 집안에도 가까운 친척 여자의 결혼이 그러하였다. 저항이 불가능한 강력한 외래 권력이 일찍이 없었던 여성노동을 동원한다고 했을 때 식민지 민중의 정신적 공황이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위안소에 여자들을 데려가기 위한 모집책들의 사기와 약취가 극성에 달해 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정신대에 가면 위안부가 된다는 소문이,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악성의 유언비어가, 떠돌아다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 강조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신대로 공장에 간 여자들 가운데는 대오를 이탈하거나 공장이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되는 통에 위안부로 떨어진 여자들이 있었다. 생존 위안부 175명 가운데 8명이 그러했다는 증언이 채취되어 있다(정진성 2004: 66).
그러나 나는 이러한 산발적이거나 비체계적인 기억만으로는 대중의 집단기억이 형성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계기와 작용이 있어서 이들 산발적이고 비체계적인 재료들을 잘 다듬어진 민족설화로 가공해 낸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국사 교과서의 관련 서술을 유심히 추적해 보자. 신석호의 교과서 이외에서 정신대에 관한 언급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1968년의 교과서에서이다(문교부, 1968: 173).
근로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폭발된 후로 징용령을 실시하여 막대한 노동력을 공장, 광산, 군사 기지로 끌어갔으며 심지어 연약한 여성들까지도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아시아 전역에서 비명에 죽고, 고초를 당한 우리 동포는 수백만이나 되었다.
여기서의 ‘여자정신대’는 그들이 강제동원되어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 없어 그 실체가 매우 애매하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끌려간 곳 가운데 ‘군사 기지’가 있어 그녀들의 성(性)이 일본군에 의해 착취되었음이 강하게 시사되고 있다. 간호부도 아닐진대 정신대란 이름의 여성이 ‘군사 기지’에서 달리 무슨 일을 하였겠는가? 나는 이 1968년의 언저리에서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는 민족설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망치질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2) 공교롭게도 전술한 대로 일제가 토지의 40%를 수탈했다는 신화도 바로 이 언저리에서 생겨났다. 신화의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위의 글을 썼으며, 그의 정신세계에서 어떠한 개인적 체험이나 정보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부지불식간에 양자를 오버랩시키게 했는지까지 파헤칠 필요가 있으나 추후의 연구과제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1968년 교과서의 정신대 서술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으며, 이후 1978년까지 교과서에서 정신대나 위안부에 관한 서술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79년의 국정 교과서에서이며 이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중등 교과서를 중심으로 서술이 변해온 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79∼1982년: (일제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학생과 청년들을 전선으로 끌어갔으며 심지어는 젊은 여자들까지도 산업 시설과 전선으로 강제로 끌어갔다.
1983∼1996년: (일제는) 우리 청장년을 강제로 징용하여 공장에서 노동을 시켰고 마침내는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하여 우리 청년 학생들을 전선으로 끌어갔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
1997∼2001년: 일제는 <중략> 강제 징병제와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많은 한국의 청장년들이 각지의 전선에서 희생되었다, 이 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2002년∼ : 일제는 여성들도 근로 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끌고 가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더욱이 많은 수의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아시아 각 지역으로 보내 군대 위안부로 만들어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게 하였다.
1979∼1982년간은 젊은 여자가 끌려 간 곳 가운데 ‘산업 시설’이 있어 원래의 정신대를 가리키는 취지가 엿보이나 동시에 ‘전선’에도 끌려갔다고 하여 곧 위안부로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83-1996년의 14년간에는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여자가 희생되었다고 할 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연상하지 못할 중학생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의 망치질을 통해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1997년이다. 이후 2001년까지 중등 국사 교과서는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기에 이르러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이 국사의 이름으로 훌륭히 공식화되었다.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집단기억의 성립에는 국사 교과서만이 유일한 공로자가 아니었다. 특히 언론의 부주의하고 심지어 선정적이기까지 한 보도자세가 한 몫을 하였다. 위안부 문제가 한국인의 국민적 관심사로 떠 오른 것은 1992년이다. 그 해에 김학순(金學順) 할머니가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고백함으로써 성노예제를 조직한 구 일본군의 범죄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하였다. 당시 도하 신문과 방송에서 위안부에 관한 공식 호칭은 거의 정신대 일색이었다. 역사가라고도 할 수 없는 어느 교수는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을 낡은 법전에서 찾아 낸 다음, 일제가 순결한 여학생들을 위안부로 대량 동원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고 소란을 떨었다. 그러자 가장 유력한 일간지의 하나가 그의 주장을 그대로 1면의 톱기사로 보도하였다.
1997년도 교과서의 극단적인 오류는 2002년에 이르러 수정되었다. 앞서 인용, 소개한 대로 2002년도 교과서는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여 전자가 노동력의 착취임을, 후자가 성의 착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같은 수정은 역사를 사실에 근거하여 써야만 하는 역사가의 직업윤리에서 볼 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저간에 위안부 문제에 관한 국내의 높아진 연구수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거기서는 아직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여 위안부를 일제가 동원한 정신대의 부분집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한번 만들어진 민족설화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좀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Ⅴ. 맺음말 「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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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 】::┣이영훈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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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 Ⅴ 맺음말 (시대정신 2005봄 통권 28호)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지난 20세기 전반의 식민지기와 관련하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들, 예컨대 일제가 대규모 토지를 수탈하였다거나 대량의 쌀을 약탈하여 실어 날랐다든가 전시기에 여자정신대를 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로 삼았다든가 하는 대중적 이해는 역사가의 시각에서 지적하자면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오해가 국민의 집단기억으로 성립한 것은 이 글에서 추적한 대로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친 효과가 장기간 누적됨에 의해서이다. 해방 후부터 국사 교과서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실관계의 왜곡은 없었던 편이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조짐은 1960년대부터 조금씩 관찰되며, 1974년 이후 교과서 편찬제도가 국정으로 바뀌면서 전면화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의 40%가 수탈되었다는 이야기가, 식량의 절반이 수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정설로 자리 잡는 것은 1974년부터이다. 1932년부터 존재한 위안부를 1943∼1945년간의 정신대와 혼동하는 교과서의 서술은 1979년부터 1997년까지의 18년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되었다.
국민국가가 그의 국민을 고급스런 문명인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그 교과서에서 사실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신화가 근 30년간이나 전파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나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은 거기까지 충분히 추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장래의 연구과제이다. 한 가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과서 집필자들의 질적 수준이다. 특히 국정(國定)제도로 바뀐 이후 그 문제가 심각하였다. 예컨대 토지의 40% 수탈설의 경우 그 40%라는 수치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를 근 3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따진 적이 없음은 솔직히 말해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3) 그것도 처음에는 ‘전국의 토지’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전국의 농토’로 표현이 바뀌고 있다. 심지어 같은 해의 중등 교과서와 고등 교과서의 표현이 ‘토지’와 ‘농토’로 서로 다르다. 그 둘의 뜻이 같지 않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교과서 집필자들은 그에 대해 무신경하였다. 대개 그들은 전임자가 쓴 것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기본 줄기는 그냥 답습하고 나머지 가지 부분은 마치 수필을 쓰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이러 저리 표현을 고쳤던 것이다. 정신대와 위안부에 관한 각 연도의 기술도 집필자들이 정성을 다해 정확히 쓴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교과서를 적절히 윤색하다가 우연히 양자를 등치시키는 그 곳에까지 다다랐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교과서의 집필자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정치적으로 동원함에 신화를 필요로 하였던 정치인들, 신화를 기꺼이 수용하였던 국민 대중, 나아가 이들 모두를 포섭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문명, 그 비교사적 수준과 구조적 특질, 이 모두가 신화 만들기의 주역과 조연으로서 앞으로 우리가 추적해야 할 대상들이다.
나는 이 글을 20세기 전반 한·일 양국의 불행한 역사를 초래함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해 그 점에 대해 우려가 없지 않지만, 그 점을 회피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에서라면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어떠한 글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개의치 않는다. 나는 역사가로서 역사의 신이 주관하는 법정에 선 증인과 같은 심정으로, 오직 진실만을 말하리라는 선서에 기초하여,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글에 대해 한국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개의함이 있다면, 이 글이 한국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로부터 주체적인 책임의식과 통합적인 성찰을 얻음에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책임의식과 성찰이 배제된 역사의식은, 다시 말해 다른 민족과 다른 인간에 대한 비난과 분노만의 역사의식은, 국가 간에 또 사회구성원 간에 갈등과 대립만을 야기할 뿐이다. 거기서는 배려와 협동의 미덕을 상실한 인간들이 거칠게 충돌할 뿐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각 층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갈등과 대립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이미 그러한 충돌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소용돌이의 원천에는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한 신화의 마성이 작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점을 다시 한번 경계해 둔다.
* 2004년 11월 <한일연대 21>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이상과 같은 위안부의 역사와 관련하여 주로 참고한 전문 연구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7), 요시미(1999), 秦郁彦(1999), 尹明淑(2003), 정진성(2004) 등이다. 개략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예민한 논점과 관련하여 일일이 주기를 달지 않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2) 이 글의 초고를 읽은 朴枝香 교수는 이 대목에서 필자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고 충고하였다. 박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부분을 수정할 의향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원래대로 그냥 두었다. 내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기보다 읽는 사람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교과서 서술의 애매함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3)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2002년 이후 국사 교육의 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도 함께 집필진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라는 교과서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숫자가 함부로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김한종 외 5인은 위안부로 동원된 수를 ‘수십만’ 명으로, 한철호 외 5인은 위안부로 된 여자를 포함한 정신대의 수를 ‘수십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수십만’이란 숫자의 근거도 이해할 수 없지만, 설령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서로 달리 인용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김광남 외 4인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의 총수가 ‘650만’이라고 쓰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 교과서에 이렇게 소설 쓰듯이 근거 없는 수치를 함부로 열거해도 되는지 필자는 참으로 회의적이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지난 20세기 전반의 식민지기와 관련하여 그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들, 예컨대 일제가 대규모 토지를 수탈하였다거나 대량의 쌀을 약탈하여 실어 날랐다든가 전시기에 여자정신대를 동원하여 일본군위안부로 삼았다든가 하는 대중적 이해는 역사가의 시각에서 지적하자면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오해가 국민의 집단기억으로 성립한 것은 이 글에서 추적한 대로 한국의 국사 교과서가 학생들을 그렇게 가르친 효과가 장기간 누적됨에 의해서이다. 해방 후부터 국사 교과서가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사실관계의 왜곡은 없었던 편이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조짐은 1960년대부터 조금씩 관찰되며, 1974년 이후 교과서 편찬제도가 국정으로 바뀌면서 전면화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토지의 40%가 수탈되었다는 이야기가, 식량의 절반이 수탈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정설로 자리 잡는 것은 1974년부터이다. 1932년부터 존재한 위안부를 1943∼1945년간의 정신대와 혼동하는 교과서의 서술은 1979년부터 1997년까지의 18년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되었다.
국민국가가 그의 국민을 고급스런 문명인으로 교육하고자 하는 그 교과서에서 사실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신화가 근 30년간이나 전파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나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은 거기까지 충분히 추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장래의 연구과제이다. 한 가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교과서 집필자들의 질적 수준이다. 특히 국정(國定)제도로 바뀐 이후 그 문제가 심각하였다. 예컨대 토지의 40% 수탈설의 경우 그 40%라는 수치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를 근 3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따진 적이 없음은 솔직히 말해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3) 그것도 처음에는 ‘전국의 토지’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전국의 농토’로 표현이 바뀌고 있다. 심지어 같은 해의 중등 교과서와 고등 교과서의 표현이 ‘토지’와 ‘농토’로 서로 다르다. 그 둘의 뜻이 같지 않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만, 교과서 집필자들은 그에 대해 무신경하였다. 대개 그들은 전임자가 쓴 것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기본 줄기는 그냥 답습하고 나머지 가지 부분은 마치 수필을 쓰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이러 저리 표현을 고쳤던 것이다. 정신대와 위안부에 관한 각 연도의 기술도 집필자들이 정성을 다해 정확히 쓴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교과서를 적절히 윤색하다가 우연히 양자를 등치시키는 그 곳에까지 다다랐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교과서의 집필자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을 정치적으로 동원함에 신화를 필요로 하였던 정치인들, 신화를 기꺼이 수용하였던 국민 대중, 나아가 이들 모두를 포섭한 20세기 후반 한국사회의 문명, 그 비교사적 수준과 구조적 특질, 이 모두가 신화 만들기의 주역과 조연으로서 앞으로 우리가 추적해야 할 대상들이다.
나는 이 글을 20세기 전반 한·일 양국의 불행한 역사를 초래함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식민지 지배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쓴 것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해 그 점에 대해 우려가 없지 않지만, 그 점을 회피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에서라면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어떠한 글도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개의치 않는다. 나는 역사가로서 역사의 신이 주관하는 법정에 선 증인과 같은 심정으로, 오직 진실만을 말하리라는 선서에 기초하여, 말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글에 대해 한국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개의함이 있다면, 이 글이 한국인들이 그들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로부터 주체적인 책임의식과 통합적인 성찰을 얻음에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책임의식과 성찰이 배제된 역사의식은, 다시 말해 다른 민족과 다른 인간에 대한 비난과 분노만의 역사의식은, 국가 간에 또 사회구성원 간에 갈등과 대립만을 야기할 뿐이다. 거기서는 배려와 협동의 미덕을 상실한 인간들이 거칠게 충돌할 뿐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각 층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갈등과 대립의 현장을 목도하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이미 그러한 충돌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진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소용돌이의 원천에는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한 신화의 마성이 작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점을 다시 한번 경계해 둔다.
* 2004년 11월 <한일연대 21>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이상과 같은 위안부의 역사와 관련하여 주로 참고한 전문 연구서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7), 요시미(1999), 秦郁彦(1999), 尹明淑(2003), 정진성(2004) 등이다. 개략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예민한 논점과 관련하여 일일이 주기를 달지 않음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2) 이 글의 초고를 읽은 朴枝香 교수는 이 대목에서 필자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고 충고하였다. 박 교수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부분을 수정할 의향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원래대로 그냥 두었다. 내가 논리를 비약시키고 있다기보다 읽는 사람마다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교과서 서술의 애매함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3)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2002년 이후 국사 교육의 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도 함께 집필진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근현대사』라는 교과서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숫자가 함부로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김한종 외 5인은 위안부로 동원된 수를 ‘수십만’ 명으로, 한철호 외 5인은 위안부로 된 여자를 포함한 정신대의 수를 ‘수십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수십만’이란 숫자의 근거도 이해할 수 없지만, 설령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서로 달리 인용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김광남 외 4인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의 총수가 ‘650만’이라고 쓰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 교과서에 이렇게 소설 쓰듯이 근거 없는 수치를 함부로 열거해도 되는지 필자는 참으로 회의적이다.
Ⅰ. 머리말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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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 】::┣이영훈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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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Ⅰ 머리말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서 가장 심각했던 갈등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지를 돌리면 아마도 제1 순위는 2008년의 쇠고기 파동이고, 제2순위는 2010년의 천안함 폭침이 아닐까 싶다. 두 순서는 바뀌어도 좋다. 이 두 사건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갈등의 결과 국민의 분열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한편의 국민은 광우병의 위험을 안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너무나 쉽게 허락한 대통령은 마땅히 퇴진해야 한다고 거의 석 달이나 촛불시위를 통해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의 국민은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을뿐더러 불과 두어 달 전에 출범한 정부의 퇴진을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상궤를 벗어난 일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두 주장은 지금도 맞서고 있다. 천안함 폭침도 마찬가지이다. 서해에서 해군 함정이 북한의 기습적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를 야당과 그를 지지하는 국민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심각한 갈등은 과거에도 있었다. 60~80년대에는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이 치열했고, 80~90년대에는 노사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많은 비용을 지불했지만, 국민을 더 높은 수준의 통합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최근의 갈등에는 그러한 통합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갈등은 분열을 낳고 분열은 더 큰 갈등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성립된 듯이 보인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한국 정치와 사회의 갈등을 예사롭지 않게 불길한 예감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갈등이 분열을 증폭시키는 악성 구조로 고착하고 있다는 느낌의 저변에는 지역감정 또는 지역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지역감정을 민주화운동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수용하였다. 어느 특정 지역의 정치세력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였으므로 차별을 받은 지역이 그에 저항하는 것은 국민적 통합을 위해 좋고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근자에 벌어진 국민적 갈등의 배경이 되고 있는 지역감정은 더 이상 약자의 항변이 아니다. 어느덧 지역감정은 피차간에 숨길 것 없는 기득권으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성립한 한국 정치의 악성 구조에서 행정수도, 4대강 사업, 신공항, 과학벨트, LH공사 문제 등에서 보듯이 갈등은 전 국토와 전 국민의 범위로 확대 증폭되고 있다.
분열을 확대 증폭시키는 갈등의 악성 구조는 어디에 원인이 있는가? 이 글은 이 같은 의문에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역사가 해답인 것은 아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느 인간집단이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한 행동양식을 선택하는 것은 그 인간집단이 세대 간에 전승하는 문화적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 적어도 100~200년의 짧은 기간 안에서는 잘 변화하지 않는다는 가설에 의해서이다. 어디까지나 증명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가설에 입각한 역사에의 성찰은 때때로 현실의 인과에 대한 단기적인 관찰에서는 포착되기 힘든 특정한 인간집단의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속성을 살아 있는 교훈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한 기대에서 우선 우리 역사가 우리에게 물려줬다고 생각되는, 그대로 두면 나라를 망치고서야 그만 둘, 지역감정의 문제부터 살피기로 하자.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서 가장 심각했던 갈등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지를 돌리면 아마도 제1 순위는 2008년의 쇠고기 파동이고, 제2순위는 2010년의 천안함 폭침이 아닐까 싶다. 두 순서는 바뀌어도 좋다. 이 두 사건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갈등의 결과 국민의 분열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한편의 국민은 광우병의 위험을 안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너무나 쉽게 허락한 대통령은 마땅히 퇴진해야 한다고 거의 석 달이나 촛불시위를 통해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의 국민은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주장에 찬성하지 않을뿐더러 불과 두어 달 전에 출범한 정부의 퇴진을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상궤를 벗어난 일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두 주장은 지금도 맞서고 있다. 천안함 폭침도 마찬가지이다. 서해에서 해군 함정이 북한의 기습적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를 야당과 그를 지지하는 국민은 지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심각한 갈등은 과거에도 있었다. 60~80년대에는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이 치열했고, 80~90년대에는 노사 갈등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많은 비용을 지불했지만, 국민을 더 높은 수준의 통합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최근의 갈등에는 그러한 통합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갈등은 분열을 낳고 분열은 더 큰 갈등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성립된 듯이 보인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한국 정치와 사회의 갈등을 예사롭지 않게 불길한 예감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갈등이 분열을 증폭시키는 악성 구조로 고착하고 있다는 느낌의 저변에는 지역감정 또는 지역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지역감정을 민주화운동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수용하였다. 어느 특정 지역의 정치세력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였으므로 차별을 받은 지역이 그에 저항하는 것은 국민적 통합을 위해 좋고 필요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근자에 벌어진 국민적 갈등의 배경이 되고 있는 지역감정은 더 이상 약자의 항변이 아니다. 어느덧 지역감정은 피차간에 숨길 것 없는 기득권으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성립한 한국 정치의 악성 구조에서 행정수도, 4대강 사업, 신공항, 과학벨트, LH공사 문제 등에서 보듯이 갈등은 전 국토와 전 국민의 범위로 확대 증폭되고 있다.
분열을 확대 증폭시키는 갈등의 악성 구조는 어디에 원인이 있는가? 이 글은 이 같은 의문에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역사가 해답인 것은 아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느 인간집단이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한 행동양식을 선택하는 것은 그 인간집단이 세대 간에 전승하는 문화적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 적어도 100~200년의 짧은 기간 안에서는 잘 변화하지 않는다는 가설에 의해서이다. 어디까지나 증명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가설에 입각한 역사에의 성찰은 때때로 현실의 인과에 대한 단기적인 관찰에서는 포착되기 힘든 특정한 인간집단의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속성을 살아 있는 교훈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한 기대에서 우선 우리 역사가 우리에게 물려줬다고 생각되는, 그대로 두면 나라를 망치고서야 그만 둘, 지역감정의 문제부터 살피기로 하자.
Ⅱ. 지역감정의 원류 「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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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교수들의 견해 】::┣이영훈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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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갈등의 역사적 배경」 Ⅱ 지역감정의 원류 (시대정신 2011년 여름호)
흔히들 지역감정이라 하면 1961년 이후 영남인이 오랫동안 집권하는 기간에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50년대에는 호남 출신의 인사가 영남에서, 거꾸로 영남 출신의 인사가 호남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영남 출신의 박정희가 서울 출신의 윤보선을 가까스로 누른 것은 호남 지역의 커다란 지지 덕분이었다. 그랬던 영남과 호남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영남 출신의 집권기에 호남 지역이 경제개발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호남 출신의 인사가 불리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호남을 차별하는 지역감정은 그보다 훨씬 더 연원이 깊다. 호남차별의 지역감정은 영남의 일만은 아니고 경기와 충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한국심리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두 지역의 호남에 대한 차별감정은 영남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호남차별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고려왕조부터였다. 태조 왕건이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8조는 금강 바깥의 사람들은 그 지역의 지세로 보아 반역하기 쉬우니 조정에 참여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왕건이 후백제를 아주 힘겹게 이긴 기억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이후의 조선왕조도 이 같은 지역감정을 이어받았다. 예컨대 1488년 김제 군수를 역임한 김미(金楣)가 왕에게 아뢰기를 전라도는 백제의 터인데 아직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강도가 횡행하고 왜적과 붙고 윤리가 문란하여 심히 다스리기 힘든 고장이라고 하였다. 왜적과 붙는다고 했듯이 전라도는 언제나 반역의 위험성으로 경계되었다. 이후 1589년에 벌어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호남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이후 호남을 반역향(叛逆鄕)으로 간주하는 조선왕조의 편견은 더욱 굳어졌다.
곧이어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전란의 기간 동안 전라도는 늘 반역의 가능성으로 경계되었다. 1594년 국왕과 대신이 전황을 논하는 자리에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호남의 인심이 평소 악한데 토적이 봉기하여 혹은 왜적에 붙고 혹은 산곡에 가득 숨어있으니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1595년의 어느 회의에서도 마찬가지 지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호남의 인심이 강퍅하고 완악하여 영남과 상이한 것이 마치 초나라와 월나라와 같다고 하였다.
이후 19세기까지는 당쟁의 시대였다. 당쟁의 결과 기호 출신의 노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됨에 따라 영남인도 소외되기 시작했는데, 호남인은 그보다 먼저 아득하게 버려졌다. 18세기 후반 전라도 흥덕 출신의 황윤석(黃胤錫)이 미관말직으로 서울에 체류하면서 적은 일기가 있다. 그는 서울의 지배세력이 호남에 대해 얼마나 심한 편견을 갖고 있는지를 그의 일기에 몇 차례나 소상하게 적었다. 그에 의하면 서울사람들은 호남인의 기질이 경박하고 속임수가 많다는 편견을 가졌다. 또한 서울사람들은 호남인들이 잡술을 숭상하며, 이에 자주 변괴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황윤석은 이 같은 서울사람들의 편견을 고쳐보기 위해 호남인으로서 훌륭한 도학과 문장과 충절을 남긴 인물의 문집을 간행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황윤석이 쓰라리게 체험한 지역차별은 동시대 왕조실록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1735년 국왕 영조는 대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호남의 풍속이 참위설(讖緯說)을 숭상하여 인심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관련 서적을 몰수하여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실제 18세기의 여러 문적을 살피면 잡술, 곧 참위설을 숭상한 것은 호남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남차별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것도 참위설 또는 풍수지리설이었다. 예컨대 실학의 대가 이익(李瀷)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정간에는 기가 듬뿍 담겨 있어 물자가 번식하고 인재가 많이 양성되는 반면, 지리산 이서의 호남은 기가 흩어지는 국면이라 덕망 있는 자가 드물게 나오니 사대부가 거처할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그의 풍수지리학은 영남을 찬양한 반면 호남을 홀대하였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 나타난 호남에 대한 편견은 일층 지독하다. 그는 호남의 샘물에 병기가 가득하고 남원의 지세에서는 살기가 느껴진다고까지 하였다.
호남에 대한 편견이 이렇게 한 시대의 문화를 이룬 가운데 조선왕조는 조세의 수취에서도 호남을 심하게 차별하였다. 호남의 토지에 대해서는 높은 등급을 부여하여 다른 지방에 비해 더 많은 조세를 수탈하였다. 그 수탈의 실태는 이후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구체적으로 폭로되었다. 1917년 일제는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기준에 따라 사정된 토지가격의 1.3%를 지세로 수취하기 시작하였다. 1.3%라는 부과율은 기존의 지세 총액보다 대략 20% 더 걷겠다는 목적에 따라 책정된 것이다. 그런데 전라도에서는 오히려 지세부담이 이전보다 3% 줄어들었다. 반면에 경기도는 58%, 충청도는 14%, 경상도는 33%나 증가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남은 일제의 지배기에 조선왕조의 차별과 수탈로부터 해방되었다.
고려왕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것은 936년의 일이다. 이후 14세기말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교체되었지만, 지배세력이 발본적으로 교체되지는 않았다. 그러한 지배세력의 초장기적 연속성으로 인해 고대왕조의 상호 쟁투에 관한 정치적 기억이 19세기까지 그대로 전승되었던 셈이다. 조선왕조가 지방을 차별한 것은 호남만이 아니었다. 평안도에 대한 차별은 일층 극심하였다. 그 지역의 주민은 조선왕조가 일제에 패망하자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그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에게) 일본 사람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 사람들은 500년 동안의 적”이었다면서 “기호파를 먼저 없애고 그 다음에 독립하자”고 할 정도였다.
요컨대 19세기까지의 왕조 지배체제는 잘 통합된 정치적 공동체의식을 함양하지는 않았다. 그 왕조가 해체되었을 때 남겨진 그의 백성들은 분열의 소지를 잔뜩 안고 있었다. 이민족 일제가 초월적인 권력으로 군림한 기간에는 갈등은 미봉되었다. 해방 후 이념의 극단적 대립과 함께 극한적인 정치투쟁이 벌어졌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50년대의 한국 정치에서 호남 인사가 영남에서, 영남인사가 호남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감정보다 훨씬 고차적인 이념 대립이 그 시대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 대립의 장이 60년대부터 슬슬 걷히고 각 지방에 정치적 발언의 기회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그와 더불어 지역감정도 슬슬 표출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을 보다 세밀히 복원해 내기 위해서는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다른 몇 가지 유산이나 부채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지역감정이라 하면 1961년 이후 영남인이 오랫동안 집권하는 기간에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50년대에는 호남 출신의 인사가 영남에서, 거꾸로 영남 출신의 인사가 호남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영남 출신의 박정희가 서울 출신의 윤보선을 가까스로 누른 것은 호남 지역의 커다란 지지 덕분이었다. 그랬던 영남과 호남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영남 출신의 집권기에 호남 지역이 경제개발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호남 출신의 인사가 불리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호남을 차별하는 지역감정은 그보다 훨씬 더 연원이 깊다. 호남차별의 지역감정은 영남의 일만은 아니고 경기와 충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한국심리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두 지역의 호남에 대한 차별감정은 영남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호남차별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고려왕조부터였다. 태조 왕건이 내린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8조는 금강 바깥의 사람들은 그 지역의 지세로 보아 반역하기 쉬우니 조정에 참여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왕건이 후백제를 아주 힘겹게 이긴 기억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이후의 조선왕조도 이 같은 지역감정을 이어받았다. 예컨대 1488년 김제 군수를 역임한 김미(金楣)가 왕에게 아뢰기를 전라도는 백제의 터인데 아직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강도가 횡행하고 왜적과 붙고 윤리가 문란하여 심히 다스리기 힘든 고장이라고 하였다. 왜적과 붙는다고 했듯이 전라도는 언제나 반역의 위험성으로 경계되었다. 이후 1589년에 벌어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호남인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이후 호남을 반역향(叛逆鄕)으로 간주하는 조선왕조의 편견은 더욱 굳어졌다.
곧이어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전란의 기간 동안 전라도는 늘 반역의 가능성으로 경계되었다. 1594년 국왕과 대신이 전황을 논하는 자리에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호남의 인심이 평소 악한데 토적이 봉기하여 혹은 왜적에 붙고 혹은 산곡에 가득 숨어있으니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1595년의 어느 회의에서도 마찬가지 지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호남의 인심이 강퍅하고 완악하여 영남과 상이한 것이 마치 초나라와 월나라와 같다고 하였다.
이후 19세기까지는 당쟁의 시대였다. 당쟁의 결과 기호 출신의 노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됨에 따라 영남인도 소외되기 시작했는데, 호남인은 그보다 먼저 아득하게 버려졌다. 18세기 후반 전라도 흥덕 출신의 황윤석(黃胤錫)이 미관말직으로 서울에 체류하면서 적은 일기가 있다. 그는 서울의 지배세력이 호남에 대해 얼마나 심한 편견을 갖고 있는지를 그의 일기에 몇 차례나 소상하게 적었다. 그에 의하면 서울사람들은 호남인의 기질이 경박하고 속임수가 많다는 편견을 가졌다. 또한 서울사람들은 호남인들이 잡술을 숭상하며, 이에 자주 변괴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황윤석은 이 같은 서울사람들의 편견을 고쳐보기 위해 호남인으로서 훌륭한 도학과 문장과 충절을 남긴 인물의 문집을 간행하고 보급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황윤석이 쓰라리게 체험한 지역차별은 동시대 왕조실록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1735년 국왕 영조는 대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호남의 풍속이 참위설(讖緯說)을 숭상하여 인심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관련 서적을 몰수하여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실제 18세기의 여러 문적을 살피면 잡술, 곧 참위설을 숭상한 것은 호남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남차별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것도 참위설 또는 풍수지리설이었다. 예컨대 실학의 대가 이익(李瀷)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정간에는 기가 듬뿍 담겨 있어 물자가 번식하고 인재가 많이 양성되는 반면, 지리산 이서의 호남은 기가 흩어지는 국면이라 덕망 있는 자가 드물게 나오니 사대부가 거처할 곳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그의 풍수지리학은 영남을 찬양한 반면 호남을 홀대하였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 나타난 호남에 대한 편견은 일층 지독하다. 그는 호남의 샘물에 병기가 가득하고 남원의 지세에서는 살기가 느껴진다고까지 하였다.
호남에 대한 편견이 이렇게 한 시대의 문화를 이룬 가운데 조선왕조는 조세의 수취에서도 호남을 심하게 차별하였다. 호남의 토지에 대해서는 높은 등급을 부여하여 다른 지방에 비해 더 많은 조세를 수탈하였다. 그 수탈의 실태는 이후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구체적으로 폭로되었다. 1917년 일제는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기준에 따라 사정된 토지가격의 1.3%를 지세로 수취하기 시작하였다. 1.3%라는 부과율은 기존의 지세 총액보다 대략 20% 더 걷겠다는 목적에 따라 책정된 것이다. 그런데 전라도에서는 오히려 지세부담이 이전보다 3% 줄어들었다. 반면에 경기도는 58%, 충청도는 14%, 경상도는 33%나 증가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호남은 일제의 지배기에 조선왕조의 차별과 수탈로부터 해방되었다.
고려왕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것은 936년의 일이다. 이후 14세기말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교체되었지만, 지배세력이 발본적으로 교체되지는 않았다. 그러한 지배세력의 초장기적 연속성으로 인해 고대왕조의 상호 쟁투에 관한 정치적 기억이 19세기까지 그대로 전승되었던 셈이다. 조선왕조가 지방을 차별한 것은 호남만이 아니었다. 평안도에 대한 차별은 일층 극심하였다. 그 지역의 주민은 조선왕조가 일제에 패망하자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그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우리에게) 일본 사람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 사람들은 500년 동안의 적”이었다면서 “기호파를 먼저 없애고 그 다음에 독립하자”고 할 정도였다.
요컨대 19세기까지의 왕조 지배체제는 잘 통합된 정치적 공동체의식을 함양하지는 않았다. 그 왕조가 해체되었을 때 남겨진 그의 백성들은 분열의 소지를 잔뜩 안고 있었다. 이민족 일제가 초월적인 권력으로 군림한 기간에는 갈등은 미봉되었다. 해방 후 이념의 극단적 대립과 함께 극한적인 정치투쟁이 벌어졌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50년대의 한국 정치에서 호남 인사가 영남에서, 영남인사가 호남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감정보다 훨씬 고차적인 이념 대립이 그 시대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 대립의 장이 60년대부터 슬슬 걷히고 각 지방에 정치적 발언의 기회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그와 더불어 지역감정도 슬슬 표출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을 보다 세밀히 복원해 내기 위해서는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다른 몇 가지 유산이나 부채에 대해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