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9]-2 물적 유산

[9]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유산  [9]-2 물적 유산


1961년 이승기 박사의 비날론 개발을 기념하는 북한의 우표

1961년 이승기 박사의 비날론 개발을 기념하는 북한의 우표.

그럼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이 땅에 남긴 유산이 무엇인지 차근히 따져 보도록 합시다. 유산이라 함은 우선 물적인 것으로 공장 등의 생산시설과 철도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보이지 않은 것들로서 숙련이나 기업가능력 등의 인적 자본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외에 사유재산제도와 같은 제도적 유산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물적 유산과 관련해서는 남한과 북한의 사정이 크게 달랐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는 북한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 이상의 풍부한 물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추진한 군수공업화의 결과였지요. 해방 후 1946년 현재 북한에서는 대략 800개 이상의 대규모 공장이 가동 중이었습니다. 제철·제련·전기·화학 등, 당시로선 세계 첨단 수준의 공장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1939년 이후 일본에서 건너온 전기·화학공업의 대규모 공장은 종업원 수가 3,000 또는 6,000을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00개가 넘습니다. 그 외에 북한에 깔린 철도망은 1인당 철도길이에서 일본보다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1인당 발전량도 북한은 일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해방 후 이들 첨단 공업시설의 일부는 철거되어 점령군 소련의 전리품으로 넘어갔지만, 거의 대부분은 북한정부에 정상 인계되었습니다. 그 상당 부분이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군의 폭격으로 파괴외었다고 합니다만, 드러난 건물이나 저장시설이야 그러했지, 분리 가능한 핵심 설비를 폭격의 대상으로 방치해 둘 정도로 북한의 지도부가 어리석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북한이 1960년대까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앞섰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이 선전하는 대로 사회주의 생산력의 덕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북한이 일제로부터 받은 물적 유산이 풍부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1950년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도발할 수 있었던 것도 개인화기나 화약에 관한 한, 북한은 이미 자체 생산능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자면 남한에는 군수산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남북한의 경제구조와 경제력의 차이가 김일성으로 하여금 한국전쟁을 도발하도록 유혹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반면에 남한은 쌀농사 중심의 농업지대였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남한에서 가장 큰 산업은 수출 쌀농사였습니다. 공업시설이라곤 양조장·정미소와 같은 식품가공업이나 인쇄업·도자기업 따위가 주종을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 밖에 서울, 부산, 대구와 같은 도시에 면방직·견직 산업으로 몇 개 큰 공장이 있었던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1934년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산업전기가 보급되자 서울 부근에 중소 기계공업이 조금 발달합니다만, 대개 공장제수공업의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이들 남한의 공업시설은 해방 후의 혼란기에 많이 훼손되었으며, 남았던 것도 한국전쟁 과정에서 60% 이상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9]-3 제도적 유산

[9]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유산  [9]-3 제도적 유산
그렇지만 남한은 일제가 남긴 또 다른 역사적 자산을 소중히 잘 보존하였습니다. 다름 아니라 근대적인 법, 제도와 시장경제체제가 그것이었습니다. 해방 후의 대한민국은 이러한 근대 문명으로서 법과 제도를 그대로 보전하고 또 발전시켰습니다. 경제에 관해 더 자세히 소개하면, 일제는 1937년 이후 전시기에 접어들면서 시장경제체제를 상당 부분 중지하고 국가사회주의적인 통제정책을 취합니다. 식량의 강제수매, 곧 공출과 배급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제의 전시경제체제는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는 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일제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시장경제체제를 복구하고 발전시켜 오늘날과 같은 번영하는 시장경제를 성취하게 된 것이지요.

반면에 사회주의 북한은 풍부한 물적 유산을 받았지만 일제를 통해 들어온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폐기하고 말았습니다. 1946년 북한은 ‘건국 20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일제가 통치의 목적으로 시행한 모든 법을 폐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일제의 재판기구를 인민으로부터 선발된 대표에 의한 인민재판기구로 대체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근대적인 인간으로서 인격권과 재산권을 규정한 민법이 폐지되고, 또 사법(司法)에 의한 재판기구를 대신하여 인민재판이 행해지게 되면 그 사회의 인간들은 어떻게 됩니까. 다시 국가의 농노와 같은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북한은 근대문명을 부정하고 말았습니다. 앞서 저는 근대화란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생물학적으로 불가역적인 변화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변화과정을 강제로 중단시키면 그 애벌레는 어떻게 됩니까. 비틀린 불구의 상태가 되고 말지요. 그렇게 북한은 비극적이게도 문명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산다는 사회주의의 아름다운 이상, 그 혁명의 열기에 들떠 있던 당대인들이 그러한 문명사의 비극을 어찌 예감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인간정신의 본질인 자유, 그 자유의 물적 토대인 재산제도가 폐지되면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사가 남긴 소중한 교훈이지요.

[10]-1 갑작스런 해방


해방에 환호하는 사람들

해방에 환호하는 사람들

[10]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10]-1 갑작스런 해방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수많은 애국선열이 오랜 세월 붉은 마음으로 기다려 오던 해방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정인보 선생은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선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라고 하여 독립투쟁에 몸바쳐 먼저 가신 분들을 안타까워했지요. 해방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태준의 소설 《해방전후》를 보면, 주인공 현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이미 망한데다 일본이 사이판을 잃고 오키나와에까지 적을 맞아들였다는 신문보도를 통해 일제의 패망이 길어야 1년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8월 15일 그날의 해방은 모두에게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함석헌 선생은 성서의 표현을 인용하여 해방이 도적같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했지요. 국제정세에 누구보다 밝은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도 일제가 패망한 소식을 듣고 넋이 빠진 듯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부인에게 “여보, 우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어”라고 했다 합니다.

이태준의 체험이겠습니다만, 《해방전후》의 주인공 현도 그러하였습니다. 현은 8월 17일 경기도 철원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운전사로부터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전쟁이 끝났답니다.” “뭐요? 전쟁이?” “인제 끝이 났어요.” 현은 코허리가 찌르르해집니다. “옳구나! 올 것이 왔구나! 그 지루하던 것이….” 그러면서 버스 안의 좌우를 둘러봅니다. 확실히 일본 사람은 아닌 얼굴들인데 하나같이 다들 무심한 표정입니다. 답답해진 현이 소리칩니다. 일본이 망했다는데 왜들 그렇게 조용히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한 영감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세상이라고 똑똑히 모르는 걸 입을 놀리겠소.” 저는 이 대목에서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의 민초들에겐 해방의 소식은 놀라움 그 자체이자 일종의 두려움이었던 모양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10]-3 독립운동의 실태

[10]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10]-3 독립운동의 실태
기타 남한의 역사교과서나 많은 연구서를 보면 1920년대 이래 만주와 중국에서 ‘무장 독립전쟁’이 줄기차게 벌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독립전쟁은 드디어 1944년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국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연합군과 합동으로 국내로의 진격작전을 준비하였으나 미국이 너무 일찍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통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애석해하는 서술로 독립전쟁의 역사는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1985년 판 국정 교과서에서 관련 서술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합군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은 그해 9월에 국내 진입을 실행하려던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과장이거나 실태와 동떨어진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주벌판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독자의 힘으로 전투를 벌인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 한 해였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 장군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서로 합심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둡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그것이지요.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받은 독립군은 연해주 소련령인 알렉세예프스크로 퇴각합니다. 그곳에서 여러 정파 간에 독립군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큰 내분이 벌어지고 그 틈을 타서 소련 적군(赤軍)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여 수백 명이 사살되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자유시참변’이라고 하지요. 이후 독립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이든 진지전이든 독자의 전선을 형성한 적은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1930년대가 되면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받는 항일연군과 팔로군에 속한 조선 청년들의 무장투쟁이 전개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과 중국 간 전쟁의 일환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1945년12월5일

임시정부 요인들(1945.12.5)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항일연군의 영웅적인 전사의 한 사람으로서 양정우 장군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보다 상위의 연대장급 인물이었습니다. 1990년 저는 중국 션양[審陽]의 역사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양정우의 위대한 항일투쟁이 커다랗게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더군요. 반가워서 자세히 읽어 보았더니 조선 출신이란 말이 없더군요. 민족사의 비극을 다시 한번 실감한 대목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국제적 조건과 관련하여 유의할 점은 미국, 소련, 중국 등 연합국의 어느 정부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임시정부 독자의 군사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을 정도로 임시정부의 대표성은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은 이념이나 노선에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체적 조건도 부족한 가운데 임시정부를 지원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장차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걸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1941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행동준승(準繩)’을 임시정부에 강요하여 광복군을 중국군 참모총장의 통제하에 둡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임시정부의 조소앙 외무부장이 주중 미국대사에게 중국이 일본의 패배 후에 다시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 하에 두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같은 입장은 정도의 차가 있겠지만 중국의 공산당 정부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차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강대국 간의 긴장관계가 벌써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요컨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러한 긴장관계의 국제질서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거나 발언권을 확보한 조선인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일제의 부속 영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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