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는 안 되는 일제시대의 진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일제강점기의 실상

[7]-5 위안부들의 처지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5 위안부들의 처지
기록에 따르면 위안소의 입구에는 이용수칙을 적은 판자가 걸려있었습니다. 위안소 내에서 술을 마시지 못한다,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이용시간은 저녁 몇 시까지이다, 단 하사관과 장교는 밤 몇 시까지이다, 등등과 더불어 이용요금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사와 장교의 차이가 있었는데 병사는 대개 1~2원이었습니다. 병사의 한 달 월급이 7~1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위안소 이용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셈입니다. 이용 시에는 반드시 콘돔을 사용해야 했는데, 당시는 이를 삿쿠라고 하였습니다. 삿쿠는 한 달에 한 개씩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는데, 대개 위안소에 두었다가 병사들에게 직접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위안부는 1주일에 한 번씩 위생 검진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업자는 위안부의 명단과 변동 상황을 매번 군부대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수입금은 대개 위안부와 업자 간에 절반씩 분배하였습니다만, 업자에게 받은 선대금이 과중하거나 악덕 업주를 만날 경우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안부들은 지정된 장소를 이탈할 수 없었습니다. 기록에 따라서는 제법 자유롭게 시가를 돌아다녔던 여자들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노예와 같은 처지였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위안부 연구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性奴隸)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안부들의 경제적 처지는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앞서 상하이 위안소에서 깜짝 놀랄만한 큰돈을 벌은 위안부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습니다만, 여러 기록을 보면 아주 드문 일도 아니었습니다. 중국 한커우[漢口]에는 일본여자 130명과 조선여자 150명이 수용 된 규모가 큰 위안소가 있었는데, 이름이 경자라는 조선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3만 원을 저축하였는데, 5만 원이 되면 서울로 돌아가 작은 요릿집을 세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이 대단한 여자라고 표창을 하라고 했답니다. 1942~1945년간 미얀마 전선에서 머물다가 돌아 온 문옥주라는 위안부가 있는데, 자신의 기구한 역사를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녀는 5천 원의 거금을 고향집에 송금하고도 2만 5천 원이 든 군사우편 저금통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42년 당시 남의 집에 식모살이를 하면 대개 한 달에 11원을 받았습니다. 이에 견주면 경자나 옥주가 얼마나 큰돈을 모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요. 남태평양 라바울 섬의 어느 조선 위안부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본군에게 200원을 맡기면서 고향집으로 송금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야마나시[山梨] 현에 있는 자기 집값보다 많구나 라고 생각했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대하면서 밤마다 남태평양의 십자성을 바라보며 고향집을 그리워하고 가족의 생계를 걱정했던 한 조선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위안부의 계약기간은 보통 2년이었습니다. 기간이 지나서 모은 돈을 가지고 돌아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상당수의 위안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악덕업주에 걸려 돈을 구경하지 못한 불쌍한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동남아나 남태평양으로 간 여인들 가운데는 전쟁말기에 배편이 끊어져 돌아올 수 없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휴지조각으로 변한 군표를 가방 한가득 들고 있었던 여인들도 있었으며, 강을 건너다 그만 군표가 든 가방을 떠내려 보낸 어느 여인의 애달픈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어떻게 해서 저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내진 것일까요. 이 문제가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분노해 마지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제부터 그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7]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7]-6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 갔던가?
전장에서 언급한 대로 1938년 소설《농군》의 작가 이태준은 만주를 여행합니다. 펑티엔[奉天]역 이등대합실에서 그는 다섯 명의 조선 여자를 만납니다. 한 여자는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30이 훨씬 넘어 보이고, 다른 한 여자는 솜털이 까시시한 16살의 소녀이고, 다른 셋은 22~23세로서 핏기는 없으나 유들유들하고 건강해 보이는 여자들입니다. 다들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노랑수염의 노신사가 서 있습니다. 이태준이 여자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노신사가 다가와 시비조로 무엇 때문에 묻느냐고 하면서 베이징[北京] 근방으로 간다고 대답합니다. 여인들은 노신사를 아버지로 부릅니다. 이태준은 그 노신사를 베이징이나 티앤진[天津]의 여관이나 요릿집의 주인쯤으로 짐작하고 “험한 타국에 끌려가는 젊은 계집들”에 새삼스레 ‘골육감’을 느꼈다고 그의 여행기에 적었습니다(《무서록》, 서음출판사). ‘골육감’이란 말이 조금 낯섭니다만, 동포로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다음에는 1941년에 나온 최명익의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소설입니다. 어느 열차의 혼잡한 3등 칸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한 신사가 젊은 여인을 데리고 갑니다. 사람들은 신사와 여인의 관계를 궁금해 합니다. 신사가 화장실에 간 사이 어느 사람이 “만주나 북지로 다녀 보면 돈벌이는 색시장사가 제일인가 봐”라고 하여 여자가 끌려가는 색시임을 맞춥니다. 화장실에 다녀온 신사는 일선으로 다니면서 색사장사한 자기의 경력을 털어 놓습니다. 역시 돈벌이는 그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여인을 이삼십 명씩 거느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고도 합니다. 데리고 가는 색시는 도망쳤다가 잡혀가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역에 도착하자 신사는 내리고 그 아들이 탑니다. 아들은 다짜고짜 여인의 뺨을 후려칩니다. 도망에 대한 화풀이지요. 여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화장실로 갑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소설 속의 나는 그 여인이 자살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여인이 화장실에 간 것은 화장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리에 돌아온 여인은 아들에게 함께 도망친 다른 여인의 소식을 묻습니다.

이렇게 그 시대는 도처에서 여인을 끌고 가는 색시장사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은 결코 낯설거나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연히 여인의 뺨을 쳤지요. 그래도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앞서 저는 조선의 여인들이 어떻게 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보내졌는가를 물었습니다만, 저의 한 가지 대답은 색시장사입니다. 색시장사가 그녀들을 만주로, 중국으로, 동남아로, 남태평양으로 보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점은 그 시대의 상식이기도 했습니다. 생존 위안부 175명도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증언하였지요. 그에 따르면 175명 가운데 62명이 ‘협박 및 폭력’에 의해, 82명이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정진성,《일본군 성노예제》, 66쪽). ‘협박 및 폭력’과 ‘취업사기’가 어떻게 다른지 관련 책을 유심히 보아도 자세한 설명이 없군요. 제가 보기에 이 둘은 구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취업사기가 들통이 난 그 순간부터 색시장수는 폭력배로 돌변하지요. 그들은 딸을 가진 가난한 집에 접근하여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부모를 유혹하여 딸을 데리고 갑니다. 경우에 따라선 거액의 선대금을 지불하지요. 그런 경우엔 사실상 딸을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삼이사》에 의하면 1941년 색시들의 몸값은 1천 원의 거액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남긴 증언은 다양합니다. 상하이 위안소에 갔다가 어느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몸을 건진 김씨 할머니는 1937년 17살 때 돈벌 수 있다는 모집인의 말에 속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할머니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를 위해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위안부가 되는 줄 알고도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색시장수들은 군위문단을 사칭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7월 함경도 청진의 어느 소녀가 위안소로 끌려간 것은 관동군 위문단의 모집에 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도 유력한 경로의 하나였습니다. 군에서 간호부로 일한다거나 밥 짓고 빨래하는 여자를 구한다고 해놓고선 위안부로 끌고 간 경우가 되겠습니다. 1940년 일본군이 남중국 난닝[南寧]이란 곳을 점령한 다음 위안소를 개설하였습니다. 그곳으로 황씨 성을 가진 조선 남자가 수십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황씨는 지주의 아들이고 데리고 간 여자들은 모두 소작농의 딸이었지요. 황씨는 당초 육군 직할의 다방과 식당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위안소를 경영하면서 그 남자는 여자들에게 매춘을 강요했습니다.

1944년 한커우에서 위안소를 경영한 안씨 성의 조선 남자가 있었습니다. 원래 친구가 하던 것을 인수했다고 합니다. 위안소 경영의 가장 큰 애로는 계약기간이 끝나 돌아간 여자의 뒤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고향에 돌아간 친구가 여자들을 계속 대주어 큰 문제가 없는데, 다른 업자들은 1년에 한두 번씩 직접 고향에 가서 여자들을 구해 오는 것이 여간 큰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군령(軍令)을 사칭하는 등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답니다. 여자 군속의 모집이라고 속인다는 뜻이겠지요. 떳떳하게 신문광고를 내는 모집책도 있었습니다. 현재 알려진 신문광고로는 경성일보에 2건과 매일신보에 2건이 있습니다. 경성일보 1944년 7월 26일자 광고를 보면 “위안부 지급 대모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연령은 17~23세, 근무지는 후방 ○○대 위안부, 월수는 300원 이상, 전차금 3000원 가능”이라 하였군요.

[8]-2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1)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2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1)
제가 볼 때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건은 다음의 세 가지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略取)의 수준입니다. 둘째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수준입니다. 셋째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의 수준입니다. 이 세 수준은 서로 얽혀 있습니다. 얽혀 있는 것을 잘 풀어낸 다음 다시 잘 종합해야 사건의 전체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와 관련해서는 역사적으로 겁탈, 관리매춘, 자유매춘의 세 가지 방식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전쟁 때마다 여성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겁탈이나 능욕을 당했는지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겁탈은 병사의 굶주린 성욕을 채울 뿐 아니라 피점령 주민들에게 더 없는 공포심과 좌절감을 안겨주어 복종심을 유발하는 점령정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때마다 대량의 겁탈이 구조적으로 발생했던 겁니다. 인류의 양심이 진보하여 1907년이 되면 겁탈을 전쟁범죄로 규정한 ‘헤이그육전협약’ (陸戰協約)이 체결됩니다. 그래도 별무소용이었습니다. 1945년 4월 베를린이 함락될 때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베를린 여성의 50%, 약 10만 명을 겁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베트남, 콩고, 방글라데시, 우간다의 전쟁에서도 대량의 겁탈이 자행되었습니다. 극히 최근의 사례로서는 1991년의 구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들 수 있습니다. 세르비아계 병사들이 비세르비아계 주민의 추방을 목적으로 처녀들을 공개 장소에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집단 겁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전쟁범죄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미국 군대가 이미 그러한데요, 여성들이 전투병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랍니다. 남녀 혼성의 군대는 병사들 간의 사랑으로 전투력도 강해지고 민간인 여성의 피해도 줄인다는군요.

다음은 일본군 위안부 사건의 무대이기도 했던 중일전쟁에 참여한 조선인 병사의 증언입니다. 경북 예천군의 어느 마을을 조사하다가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중국 호북성 장사현 부근에서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어느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혹시 실례되는 말씀일지 몰라도 위안소에 한번 안 가봤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평생 누구에게도 털어 놓은 적이 없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전쟁이 자신을 방위할 능력이 없는 여성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예, 나도 구경하러 한번 가봤어요. 일요일에 거기 구경하러 가보니 벽돌집이 있는데 보니까 줄을 쭉 서서는 하나 들어갔다가 나오면 하나 들어가고. 그런데 거기 오래 생활하는 사람들은 거기 위안부 안가요. 왜 안가냐 하면 거기 아니라도 조금 나가면 처자들이 천지라요. 강탈합니다. 하메, 한 일 년만 거기 있는 사람 보면 그래요. 부락에 가면 처자, 중국 처자 참 이쁩니다. 참 인물 있어요. 첫 번에는 말을 안들을 거 아니래요. 죽이려 그러는데 우에요. 말을 듣지요.

[8]-3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2)

[8] 그날 나는 왜 그렇게 말하였던가  [8]-3 군에 의한 여성의 성 약취(2)


중국 한커우의 위안소 앞에 줄을 서있는 일본군 병사들

중국 한커우의 위안소 앞에 줄을 서있는 일본군 병사들.

다음, 군의 관리매춘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독일군도 일부 점령지에서 위안소를 조직했습니다만, 일본군만큼 전면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일본군은 전장에서 설명한 대로 일본 고유의 공창제의 역사를 전제로 한 위에, 병사들의 성을 집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와 여성의 성을 도구화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가 상호 작용하여 위안소라는 관리매춘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문화적 배경이 비슷한 사람들에겐 그런대로 합리적인 선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예컨대 1942년 싱가포르가 함락될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본군이 싱가포르의 여인들을 겁탈할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중에 싱가포르 수상이 된 10대 후반의 리콴유는 일본군이 세운 위안소 앞에 병사들이 200명이나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일본 나름의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속에는 일본여자와 조선여자가 있었답니다(《리콴유 자서전》, 문학사상사, 71~72쪽). 그녀들 덕분으로 싱가포르 여자들이 몸을 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역시 가부장 문화에 익숙한 중국계다운 생각입니다.

조금 놀라시겠지만, 군에 의한 관리매춘은 우리의 한국전쟁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서울, 춘천, 원주, 강릉, 속초 등지에 위안부대가 설치되었습니다. 서울의 위안소는 현재 중구의 백병원에서 쌍용빌딩으로 가는 그 고갯길에 있었습니다. 공식 보고에 의하면 1952년 서울 세 곳과 강릉 한 곳에 수용된 위안부는 모두 89명이었으며, 그해에 위안소를 방문한 병사는 총 20만 4,000여 명으로서 위안부당 하루 평균 6명의 꼴이었습니다. 제가 만날 수 있었던 어느 참전 용사의 회고에 따르면 춘천 소양강변에서는 여러 채의 천막이 세워지고 병사들이 죽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일본군 병사들이 위안소 앞에서 줄을 서 있는 광경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외에 각 부대는 부대장의 재량으로 주변의 사창가로부터 여인들을 조달하여 병사들에게 보급하였는데, 부대에 따라서는 위안부를 ‘제5종 보급품’이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 보급품을 트럭에 싣고 전선을 이동한 특무상사 출신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위안부를 전선으로까지 데려가는 것은 허락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드럼통에다 여인을 한 명씩 담아 트럭에 싣고 최전선으로까지 갔답니다. 밤이 되면 전(廛)이 펼쳐졌는데요, 미군들도 많이 이용하였답니다.
1956년 육군본부는 한국전쟁의 전사를 편찬하면서 위안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설치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위안소 제도를 도입한 일본군의 생각도 대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표면화한 이유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내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 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육군본부 군사감실,《후방전사(인사편)》, 1956,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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