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패전 때 반일감정은 거의 없었네.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던 사람도 있었다네."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10여년 전 일본 도쿄 진보초(神保町)의 고서점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다. 헌책 몇 권을 사면서 가게 주인인 60대 할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한국에서 일한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말했다. “한국에서 일한다니 힘들겠네. 반일감정이 아직 있을 테니까. 일본 패전 때 반일감정은 거의 없었네. 패전을 맞아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조선인들 중에는 ‘왜 일본으로 돌아가는 거지? 여기서 함께 살자’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했던 사람도 있었다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정책 때문에 손바닥을 뒤집은 것처럼 일본을 혐오하게 되었어.”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고, 해방 때에는 눈물을 흘려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4년 정도 지나, 한국인 사회학 교수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사이좋게 살았고, 해방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해방 후 새롭게 나라를 규합해 운영하려고 할 때 국민이 일제 황국신민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독립국가가 될 수가 없지요? 국민의식을 일제 황국신민으로부터 탈각시키기 위해서는 반일정책을 해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가 있었어요.”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반일 세뇌 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해방 후에 한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었다는 것을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대는 크게 바뀌었다. ‘민족주의 세뇌정책’은 사회에 다양한 폐해를 가져올 것이다.
원문 : [서울신문 2011-01-31 30면]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고, 해방 때에는 눈물을 흘려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4년 정도 지나, 한국인 사회학 교수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식민지 상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사이좋게 살았고, 해방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해방 후 새롭게 나라를 규합해 운영하려고 할 때 국민이 일제 황국신민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독립국가가 될 수가 없지요? 국민의식을 일제 황국신민으로부터 탈각시키기 위해서는 반일정책을 해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가 있었어요.”
현대의 한국인에게는 ‘반일 세뇌 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해방 후에 한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이었다는 것을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시대는 크게 바뀌었다. ‘민족주의 세뇌정책’은 사회에 다양한 폐해를 가져올 것이다.
원문 : [서울신문 2011-01-31 30면]
일제강점기 통계자료 9 of 16
Category :
【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통계청 일차사료)】
Tag :
통계일람
"미즈사키 린타로씨는 진정으로 한국의 농민들을 생각해 관개시설을 갖춘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선한 일본인의 업적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야 한다"
Category :
【 전재 기사 】
Tag :
▲ 시민들의 휴식처가 된 대구 수성못
대구의 명물 수성못. 옛 사람들에게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고, 지금 사람들에게는 레포츠와 유흥으로 또 다른 의미를 선사하는 곳이다. 수성못 맞은 편 야트막한 산 입구에는 대구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소가 숨어 있다. 한 일본인의 묘다. 옛날에는 수성못을 굽어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건물 일부에 막혀 수성못 전체가 보이지는 않는다. 묘의 주인공은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水崎 林太郞). 바로 수성못을 축조한 인물이다. 수성못과 그의 묘는 '한일 우호의 상징'이기도 하다.
1914년 그는 가뭄과 홍수로 인해 황폐한 수성들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사재(私財)와 총독부의 지원으로 받은 당시 돈 1만2000엔(현재 10억엔상당)을 수성못 축조공사에 털어 넣었다. 미즈사키 린타로씨는 10여년의 공사 끝에 현대적 관개 시설을 갖춘 수성못을 축조해 대구의 농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공사 때 못 축조를 반대한 사람이 던진 돌에 다리를 맞아 곤경에 처했던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후일담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런 수성못은 관개시설로서의 기능은 다했지만 지금까지도 대구사람들에게는 추억과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 대구 수성못 건너편 야산에 자리한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씨의 묘에서
열린 70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고인의 공로를 기리고 있다.
한일친선교류회에서는 그의 기일인 4월 13일 묘지에서 70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일본측에서 다미스치 슈이츠 부산주재 총영사, 사가야마 유시 고 미즈사키 린타로 현창회장 등 일본인 25명을 비롯 한일친선교류회 회원, 한일다문화연구회 회원 등 60여명이 참석해 미즈사키 린타로씨의 공을 기렸다. 한일친선교류회측은 앞으로 인근 수성관광호텔에서 묘지에 이르는 직선 코스 조성, 묘지 주변에 심어져 있는 이태리 포플러 대신 벚꽃을 심는 등 묘지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주력할 계획이다.
서창교 한일친선교류회 회장은 "미즈사키 린타로씨는 진정으로 한국의 농민들을 생각해 관개시설을 갖춘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이었다"며 "우리는 선한 일본인의 업적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회장은 자신과 부인이 죽으면 화장해 유골을 미즈사키씨의 묘지 부근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 상태다. 이 같은 사람은 몇명이 더 있다고 했다.
출처 : [대구·경북] "수성못 덕분에 홍수·가뭄 극복했지요"
이 묘소의 주인은 1915년 일본에서 건너와 수성못을
축조하고 관리하시던 미즈사키 린타로 선생님 입니다.
선생님은 일본 岐阜縣에서 출생하여
岐阜縣 岐阜시장을 지낸 뒤 개척농민으로 대구에 와
농업에 종사하던 중 당시 수성벌이 한발과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조선총독을 직접 면담
1만2천엔(현재 10억엔상당)의 공사비를 지원받아
10년간의 공사 끝에 수성못을 완공 하므로 수성들을
항상 풍요롭게 하신 분으로서 1939년 12월까지
못을 관리하시다가 임종을 맞아
“수성못을 보이는 곳에 한국식의 무덤으로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 곳에 안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