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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아사카와 다쿠미, 旧 조선민족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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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서울 중심부의 광대한 부지 안에 눈부시게 화려한 궁전이 늘어선 조선왕조의 왕궁, 경복궁. 그 일각에 있는 집경당(緝敬堂)과 함화당(咸和堂)은 식민지 시대에 조선 총독부의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면서 조선민예를 연구했던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가 그의 형인 노리타카(伯教), 친구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와 함께 창설한 '조선민족미술관'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정열의 결정
1924년 4월에 개관한 미술관은 한반도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사용하는 공예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부인이자 유명한 성악가인 가네코(兼子)의 도움을 받아 자금을 모았으며, 전시품의 수집 및 운영은 다쿠미 등이 중심이 됐다. 조선의 문화와 사람을 깊이 사랑한 그들의 정열이 맺은 결정이었다.

미술관이 경봉국 건물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斎藤実)의 힘을 빌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이 미술관의 배후에는 조선총독부가 있었다"는 비판이 일고도 한다. 그러나 한국공예협동종합의 문옥배(63세) 전무이사는 "당시 조선 공예를 계승, 보존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다쿠미는 지금 기록해 두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라며 "다쿠미 등이 없었더라면 미술관은 설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산림녹화에 공헌
일본의 영림서(営林署)에 근무하던 다쿠미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7살 위의 형 노리타카를 따라 1914년 한반도로 건너갔다. 한국병합 후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 신천지였던 한반도로 향하는 일본인이 급증하던 때였다. 다쿠미는 임업시험장 고용원으로서 묘목을 기르는 등의 연구를 했으며, 수목의 씨앗을 뿌려 그 해 중으로 발아시키는 '노천매장 발아촉진법(露天埋蔵発芽促進法)'을 개발했다.

당시 사람의 힘으로 수목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노천매장법은 양묘(養苗)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성과. 피폐해진 한국의 땅을 부흥하고 녹화하는 사업에 크게 공헌했다"고 한국 국립산림과학원의 김석권(57세) 산림생태연구과장은 다쿠미의 업적의 위대함을 강조한다.

아사카와 다쿠미

 아사카와 다쿠미가 시험재배한 소나무 앞에 선
  한상배=서울 시내 국립산림과학원

▽다쿠미의 소나무
다쿠미는 임업에 전력을 다하는 한편으로 도자기에 관한 형의 연구・조사를 돕던 중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유창한 조선의 말로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그들과 같은 민족 의상을 즐겨 입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했다.

"출장 간 곳에서 구걸하는 청년을 보면 관공서로 데려가 일을 주라고 부탁했다. 봉급은 결코 풍족하지 않았지만, 많은 고학생을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국립산림과학원의 직원이었던 한상배(74세)는 다쿠미와 함께 일했다는 부친과 선배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기쁜 듯 소개했다.

다쿠미가 1931년 4월 급성폐렴으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마을 사람들이 이별을 고하고자 일제히 몰려들었으며, 출관시 관을 짊어지는 역할을 맡겠다는 사람이 줄을 지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쿠미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지났다. 옛 산림과학원을 방문하면 본관 현관 앞에 다쿠미가 시험 재배한 소나무가 한국전쟁의 피해를 면해 높이 25미터의 거목으로 자라 늠름한 가지를 뻗치고 있다. 그곳에서 가까운 망우리 기지에 있는 다쿠미의 묘에 직원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기념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겨져 있다.
출처 :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아사카와 다쿠미, 旧 조선민족미술관

일제강점기 통계자료 8 of 16

출전 :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http://kosis.kr/feature/feature_03List.jsp
도서관 1933-1941

도서관
1933-1941

전화 1908-1918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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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가입자 1933-1943

전화 가입자
1933-1943

전신 1908-1918

전신
1908-1918

전보 (한국어) 1934-1939

전보 (한글)
1934-1939

소포우편물 1908-1918

소포우편물
1908-1918


日本親舊(일본친구)여 ! [동아일보 1921년 3월 4일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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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_1921년3월4일
우리는 實(실)로 우리 가슴 가운데 뛰노는 生命(생명)의 줄이 또한 그대 가운데 뛰노는줄을 아노라. 그럼으로 그대를 親舊(친구)라하며 손을 붓잡고 吾人(오인)의 압흔 가삼을 터놋코 밀하고자 하노라.

아 ! 日本親舊(일본친구)여 우리로 하야금 忌憚(기탄)업시 말하게하라.
韓日併合後過去十年間(한일병합후과거십년간)에 그대는 總督府(총독부)가 우리들의게 무엇을 주엇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는 보기 조흔 푸른 山(산)이오 둘은 훌융한 道路(도로)요. 셋은 훌융한 裁判所(재판소)오 넷은 훌융한 行政官(행정관)이오 다섯은 훌융한 産業開發(산업개발)이오 여섯은 훌융한 敎育振興(교육진흥)이뇨.
그러면 朝鮮(조선)사람은 満足(만족)하고 幸福(행복)으로 생각하야 太平歌(태평가)를 불넛는가.

在來(재내)의 韓國政治(한국정치)가 惡(악)하엿다. 政府(정부)가 腐敗(부패)하고 大臣(대신)이 暗弱(암약)하고 法律(법률)이 紊亂(문란)하고 財政(재정)이 困乏(곤핍)하야 官職(관직)을 賣買(매매)하고 人民(인민)을 取利(취리)의 材料(재료)로 생각함으로 生命財産(생명재산)의 安全(안전)이 업스며 教育發達(교육발달)과 産業振興(산업진흥)은 企念(기념)도 업스며 더욱히 自由(자유)가 무엇인지는 아지도 못하엿다.
출처 :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동아일보 1921년 3월 4일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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