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 할머니의 증언
"어느날 내가 일해주던 주인집 아들이 나를 강간하려 해서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반항하여 겨우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빠져나와 혼자 몸으로 부산 바닷가에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연락선은 떠나가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몇명의 일본군인들이 나타났다. 나는 반항하지 못하고 입과 눈을 틀어막힌 채로 군용트럭에 실렸다. 그 때 나는 열네살(1938년)이었다."
정대협에서 채록한 정할머니의 증언을 보면 14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군인에 의해 납치를 당한 후 강제로 위안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할머니의 증언은 일제의 위안부 모집에 있어 공권력에 의한 폭력과 강제가 수반된 사례로 학계에서 널리 인용되어왔다.
그런데 1996년 3월 6일 연합뉴스「北韓국적 정신대 할머니 영주귀국」제하의 기사를 보면
"외무부에 따르면 정할머니는 지난 39년 14살때 부산 어느 부잣집에서 식모살이하다 청년들에 의해 하얼빈으로 강제로 끌려가 군대 위안부가 됐다."고 되어 있다. 납치를 당한 나이는 같으나 연도가 1939년으로 다르고, 일본군인이 아닌 신원불상의 괴청년들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고 한다. 일본군인에 의해 납치를 당한 것과 일반 청년들에 의해 납치를 당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이보다 앞선 1992년 7월 31일 동아일보「종군위안부 정부보고서로 본 전모」제하의 기사에는
"1942년 3월 당시 내 나이가 14세에 불과할 때였다. 부산에서 식모살이를 하던중 잠깐 놀러나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임시구금소에 10일 가량 구금된 뒤 기차로 만주의 위안소에 넘겨져 하루 15~20명의 군인을 상대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바, 역시 나이는 같지만 납치당한 년도가 1942년으로 다르고 납치된 경위도 놀러갔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군용트럭에 의해 곧바로 압송된 것이 아니라 임시구금소에 10일 가량 구금된 뒤에 만주로 이동하였다고 되어 있어 납치과정도 상이하다.
4. 정△△ 할머니의 증언
살아 생전 위안부 피해보상 및 사죄촉구 활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정△△ 할머니의 증언은 안타깝지만 그대로 가져다 쓰기에는 오류가 너무 심각해 보인다. 정대협에서 채록한 그의 증언을 보면 구체적인 연대기가 나와있지 않은데 다행히 서문에 간단한 약력이 나와있다.
◈ 1924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
◈ 1937년(14세) 집에서 취업사기로 연행
◈ 1938년(15세) 부산→시모노세키→대만→중국 광동→태국→싱가포르→사이공→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
◈ 1938년(15세) 인도네시아 수마라이에서 위안부 생활
◈ 1945년(22세) 해방 후 싱가포르 수용소 생활
◈ 1946년(23세) 부산으로 귀국
위의 약력 중 취업사기에 속아 위안부가 된 시점이 가장 중요한다. 할머니의 구술을 보면 "열 네살에 잡혀가서 동짓달에 갔어."라고 언급하고 있어 위의 약력상 연대기는 할머니의 구술 내용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할머니가 14세였던 1937년에 부친은 창씨개명 거부하다 일제의 미움을 샀고, 그 후 놋그릇 공출까지 거부하다 일제에 잡혀갔다고 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창씨개명은 1939년의 일이고, 마을 단위 놋그릇 공출은 1941년「유기 제작 및 판매 금지령」이 공포된 이후의 일이다.
할머니가 연대를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피해 연령대를 낮추고 있을 수도 있다. 시간을 달리는 할머니의 증언은 계속된다. 15세였던 1938년에 취업사기에 속아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는데 인도네시아는 1942년에 일본이 점령했으므로 할머니의 증언은 심각한 오류에 부딪히게 된다. 또한 위안부 이송은 할머니의 설명처럼 수천명씩 태운 대규모 함선이 저렇게 중국과 동남아 각지를 셔틀하며 사람을 내려주는 일은 없었다. 병력을 태운 군수송선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또 취업사기의 순간을 증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메칠 후에 이장이 와 '아가씨, 일본에 센님바리 맨드는 공장에 가서 한 일년 아니 이년 내지 이년 반만 고생하시고 나오시면 됩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가는 날 아버지가 풀리 나온다 이기라."
그런데 센님바리 만드는 공장이란 없다. 센님바리는 천인침(千人針), 말그대로 가가호호 천명의 여자가 아래의 사진과 같이 돌아가며 군인의 복대를 1인당 한땀씩 바느질을 하는 것으로 이걸 차고 다니면 전쟁터에서 총알도 피해다닐 수 있다는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다. 이게 이상했던지, 다른 증언자료에서는 센님바리 공장이라 하지 않고 "방직공장"이라 정정되고 있다.
TAG 위안부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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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대제 2012/01/06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ㅡㅡ;;
BigTrain 2012/01/06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술사 연구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중요성도 없진 않지만 왜 제한적으로, 검증을 거쳐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악의곰푸우 2012/01/07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할머니의 의도보다는 일제 만행을 무조건 부각시키려는 주변의 멍청이들과 할머니의 흐릿해진 기억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여성단체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해서 정부지원금도 갈취하고, 일본의 양심적 시민단체가 '아세아여성기금' 지원을 받게 해주려던 것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걸 안 심미자 할머니 같은 분들은 진작에 그 여성단체 년들하고 결별했지요. 다른 분들은 그냥 그 여성단체년들 피해서 숨어버렸지만
심미자 할머니 같은 분들은 지만원 박사한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광복회 원로들 귀에도 그 얘기가 들어가는 바람에 광복회 근처에 위안부기념관 짓는다 하니까 지금 고인이 되신 광복회 원로분들이 열받아서 반대했던 거고요.
그게 진짜 위안부할머니들을 도와주는 인간들이 그 이상한 기념관 설립 그런 일을 했더라면 광복회 아저씨들이 90이 다됐던 양반들이 그렇게 열받아서 펄펄 날뛰지는 않았을 겁니다.
인민해방군 2012/01/11 09: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상금에 눈먼 할매들의 소설이 아니기를....... 인샬라....
보상금에 눈먼건 여성단체 운동가들입니다.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단체에서 노력해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아시아여성기금'의 기금 지원과 진료와 상담, 생계 지원 등을 약속했는데
어떤 여성단체 간부란 년이 지원, 보상 다 필요없으니까 돈만 많이 내놓으라고 지껄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망할 여성단체 간부년은 아무도 비난하지 않더군요.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단체에서 나서서 주선까지 해주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