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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22 19:14 수정 : 2012.05.22 19:14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5월5일 햇살이 눈부셨던 어린이날,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자락에 수천마리 나비가 날았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개관한 것이다.

우리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1945년이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다시 40여년이나 지난 1980년대 후반이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해온 시위도 지난해 12월, 1000회를 기록했다.

정대협은 일본군 위안부의 명예와 인권을 위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해 왔고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내로 터가 확정됐지만 첫 삽을 뜨지 못했다. 한 단체가 순국선열을 기리는 독립공원 안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건립되는 것이 ‘격’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까지 주장하자, 터를 허락한 당시 서울시가 건립에 난색을 보인 것이다.

아이러니는 동일 단체가 독도는 우리 땅, 민족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도 일본 식민지의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수치스러운 역사를 상기시키는 ‘민족 밖’의 존재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는 여성을 민족의 과거와 미래를 담보하는 상징적 존재로 호명하지만 민족적 주체로서의 실질적인 위치를 거부하는 가부장적 민족주의 담론의 모순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당한 공식적 역사에 균열을 내고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단순히 역사의 피해자로 추모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들의 삶과 정신을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도록 하고 운동과 교육으로 승화하고자 한 박물관은 정부의 예산 지원이나 기업의 거대 후원금 없이 오로지 돼지저금통에 담긴 고사리 마음들이 모여 현실화되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다시금 인권운동가로 우뚝 선 이들이 겪었던 역사를 환기하고 다시는 이 땅에 유사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하며, 지금도 전세계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고 행동하는 박물관이 시민들의 힘으로 건립된 것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먼저 차가운 시멘트 벽 위로 하얗게 부서지듯 내려앉는 수천마리의 나비 이미지를 마주하게 된다. 나비는 식민주의, 가부장제의 폭력으로 산산이 부서진 꿈이자, 차별과 억압, 폭력에 고통받는 여성들이 해방되어 자유롭게 훨훨 날기를 염원하는 희망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포스트/식민 한국의 특수성을 넘어 전지구적 인권과 정의, 평화를 염원하는 상징물이다.

이에 만들어진 것이 ‘나비기금’이다. 김복동·길원옥 할머니가 지난 3월8일, 일본 정부로부터 받게 될 배상금 전액을 콩고의 강간피해 여성들을 돕는 데 기부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이 뜻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어 만든 기금이다. 잔인한 내전으로 강간과 폭력에 시달리는 콩고 여성들이 참혹한 죽음의 들판에서 개인적 고통을 딛고 일어나 생존을 위해 뿌리는 씨앗, 그 희망의 씨앗에 물을 주고 싹을 틔워 가꾸는 공감의 대화, 사랑과 희망의 연대가 바로 나비기금이다. 이제 나비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평화의 날갯짓으로 제국주의·식민주의·민족주의·가부장제·전지구적 자본주의 속에 젠더·인종·민족·계급이라는 다양한 억압의 축이 맞물린 여성들의 경험과 만난다.

오늘 이 글을 읽을 즈음이면 할머니들은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에 계실 것이다. 짬을 내어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박물관을 찾으면 어떨까? 간혹 유령처럼 출몰하는, 역사 속에 꽁꽁 숨겨진 불편한 진실이 희망의 나비가 되어 내 가슴에 담길 것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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