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을 맞아 승전국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때 독일 총리가 처음 초청됐다. 당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인사말은 감동적이었다. "연합국은 승전기념일이겠지만 독일은 (나치의) 파시즘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이어 슈뢰더는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와 화해의 포옹을 나눴다. 이튿날 프랑스 신문들은 이 사진을 싣고는 '2차세계대전이 오늘에야 비로소 끝났다'는 제목을 달았다.

독일과 달리 일본은 왜 아직도 주변국들과 불편하고 때로는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걸까.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 일본통으로 꼽히는 패트릭 레녹스 티어니 유타대 명예교수가 한 신문에 기고문을 실었다.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고희를 앞둔 '가이진 쇼군(Gaijin Shogun)'의 얼굴엔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두 다리를 책상 위에 걸치고는 옥수수대 파이프에 불을 당겼다. 바로 옆 방에는 일왕 히로히토가 면담을 요청하며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는 퇴짜를 놨다.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가이진 쇼군' 곧 '외국인 통치자'는 일본인들이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 붙여준 별명이었다. 미국의 일본지배가 끝나갈 무렵인 1949년 말 히로히토는 맥아더를 만나 일본이 주변국들에 행한 잔혹사를 고해하고 진주만 폭격에 대해서 공식 사과하겠다고 알려왔다. 미국인 '쇼군'은 그러나 제발로 찾아온 일왕을 문전박대해 쫓아버렸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티어니를 포함해 극소수였다. 일본인들을 자극할까 우려해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런 티어니가 가슴에 묻어뒀던 진실을 밝힌 것이다. 맥아더는 왜 과거를 털고 가겠다는 히로히토의 입을 막았을까. 알려진대로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비롯해 전범혐의를 받고 있던 왕족들을 몽땅 살생부에서 뺐다. 일왕을 내세워 일본을 개혁하고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히로히토는 목숨을 건진 대가로 맥아더에 '충성서약'을 바쳤다.

일왕의 협조와 맥아더의 카리스마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일본은 단시일내에 민주화와 경제부흥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로히토가 주변국들에 사과하면 여론의 역풍이 불 가능성이 컸다. 일왕 스스로 일본군의 잔악행위에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면 왜 진작 그를 처벌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이 맥아더에 쏟아질 게 뻔했다.

서양인들은 '쏘리'를 입에 달고 살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문화에서 사과는 치욕이나 다름없다. 히로히토가 결단을 내렸는데도 맥아더는 "그 입 다물라"고 면박을 줬다는 것이다. 티어니에 따르면 이후 미국과 밀월관계를 유지하게 된 일본은 사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주변국들이 항의를 할라치면 '불행한 과거'라고 얼버무리고는 유감을 표시했을 뿐이다. 사과할 기회를 잃은 일본은 결국 주변국들과 앙금이 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티어니의 견해다.

얼마 전 미국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에서 벌어진 일본의 위안부 기림비 철거 요구도 거슬러 올라가면 맥아더의 과오에서 비롯됐다. 그때 히로히토가 공식 사과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돈을 줄테니 추모비를 없애달라는 일본의 요구는 뻔뻔함의 극치다.

일본이 추모비 옆에 나란히 사죄비를 세운다면 국제사회에서 걸맞는 대우를 받을텐데. 2차세계대전은 동북아시아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