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의 조선통치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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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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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단히 가난한 농촌의 자녀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
일본인이 와 의무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모가 처벌받는다고 명령해 학교에 가게 됐다.
그리고 성적이 좋자 일본인 선생이 사범학교에 가라고 권했고,
그후 군관학교를 거쳐 도쿄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일본의 교육은 대단히 공평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인이 와 의무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모가 처벌받는다고 명령해 학교에 가게 됐다.
그리고 성적이 좋자 일본인 선생이 사범학교에 가라고 권했고,
그후 군관학교를 거쳐 도쿄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일본의 교육은 대단히 공평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통계자료 1 of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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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통계청 일차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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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일람
"나는 88세입니다. 이제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최기호 가야대학 객원교수]
나는 1923년생입니다. 이제 한국을 위해도, 일본을 위해도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합니다. 생명의 위험도 각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사명인 것입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평양이나 토쿄에 갔습니다. 그 당시의 한국인은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입니다. 극장에 가면 영화의 전에 전쟁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뉴기니에서 일본이 이긴 영상이 흐르자, 박수와 만세의 폭풍우입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해, 토쿄에서도 갔습니다만, 일본인은 냉정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전원이 미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보통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친일파」라고 하는 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사용할 수 없는 말」을 사용해, 선조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일본인」이라고 하는 인상을, 필사적으로 지우기 위해 「반일」을 지도자는 꼬드김은 왔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육을 비교하면, 일본이 10%왜곡이라고 하면, 한국은 90%왜곡입니다. 조선말기의 비정상인 정치 부패를 가르치지 않고, 일본이 관여하지 않으면 독립을 할 수 있던 것처럼 쓰여져 있습니다.
한일합방에 의해 「교육」 「의료」 「공업」 「사회 인프라」가 정비되었습니다.근대국가의 기초가 쌓아 올려진 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실적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의 산물이다!」라고 규탄하는 한국에는 기가 막힙니다. 더욱 「일제가 민족 산업을 정체시켰다!」라고 하는 주장에는 코멘트하는 기분도 없어집니다.
민족 산업을 죽인 것은, 조선왕조입니다. 근대화를 주장하는 선진적인 사상가는 반역자로서 친족까지도 처형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일제의 학대! 성 노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만,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말기은 「지옥」이었습니다. 그것은 대한제국 시대가 되어도 같았습니다. 1904년 , 일본은 조선의 참상을 구하기 때문에, 재정 지원을 결단합니다. 예를 들면 1907년도 , 조선왕조의 세입은 748만엔이었지만 , 세출은 3000만엔 이상이었습니다. 그 차액은 일본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1908년에는 더욱 증가해 , 3100만엔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88세의 노인의 절규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평양이나 토쿄에 갔습니다. 그 당시의 한국인은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입니다. 극장에 가면 영화의 전에 전쟁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뉴기니에서 일본이 이긴 영상이 흐르자, 박수와 만세의 폭풍우입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해, 토쿄에서도 갔습니다만, 일본인은 냉정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전원이 미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보통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친일파」라고 하는 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사용할 수 없는 말」을 사용해, 선조까지 비판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상냥한 일본인」이라고 하는 인상을, 필사적으로 지우기 위해 「반일」을 지도자는 꼬드김은 왔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육을 비교하면, 일본이 10%왜곡이라고 하면, 한국은 90%왜곡입니다. 조선말기의 비정상인 정치 부패를 가르치지 않고, 일본이 관여하지 않으면 독립을 할 수 있던 것처럼 쓰여져 있습니다.
한일합방에 의해 「교육」 「의료」 「공업」 「사회 인프라」가 정비되었습니다.근대국가의 기초가 쌓아 올려진 일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실적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의 산물이다!」라고 규탄하는 한국에는 기가 막힙니다. 더욱 「일제가 민족 산업을 정체시켰다!」라고 하는 주장에는 코멘트하는 기분도 없어집니다.
민족 산업을 죽인 것은, 조선왕조입니다. 근대화를 주장하는 선진적인 사상가는 반역자로서 친족까지도 처형되었습니다. 한국인은 「일제의 학대! 성 노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만,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말기은 「지옥」이었습니다. 그것은 대한제국 시대가 되어도 같았습니다. 1904년 , 일본은 조선의 참상을 구하기 때문에, 재정 지원을 결단합니다. 예를 들면 1907년도 , 조선왕조의 세입은 748만엔이었지만 , 세출은 3000만엔 이상이었습니다. 그 차액은 일본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1908년에는 더욱 증가해 , 3100만엔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88세의 노인의 절규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제강점기 통계자료 2 of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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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일제시대 (통계청 일차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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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일람
중요한 점은 상당수 한인 자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하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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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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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제시기에 근대 자본주의를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식민지 초기에 일제는 근대적 관료국가를 구축함으로써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를 통해 근대적 소유관계를 확립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하여 “종래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전근대적 수취관계를 대신하여 자본주의 논리가 새로운 수취관계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토지조사사업이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교육제도나 재정·금융제도 및 교통·통신시설과 같은 각종 사회간접자본도 적극적으로 육성되었다.
근대적 제도의 정비가 일단락 된 이후부터는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경제는 1930년을 전후한 공황기를 제외하고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성장을 보였다. 이는 매우 장기지속적인 경제성장이었다. 또한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면, 농산액(農産額)의 경우 80%에서 43%로 하락하였으나 공산액(工産額)의 경우에는 18%에서 41%로 성장하였다. 국내총생산에 있어 광공업의 비중은 1911년의 4.5%에서 1938년의 18.7%로 증가하였으며, 공장수에 있어서는 같은 기간 동안에 110개에서 6,590개로 늘어났다. 또한 공장노동자의 숫자는 1931년부터 1943년 사이 86,000여 명에서 36만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전체 노동자 숫자는 1943년까지 17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1940년대 초에 이르면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식민지 시대 경제성장의 동력은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유입 및 일본과의 수출입이었다. 따라서 공업화의 전형적인 패턴은 일본인 자본과 한국인 노동력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조선인 공장수를 보면 1918년에는 965개였다가 1939년까지 4,185개로 증가하였음에 반해, 일본인 공장수는 같은 기간 동안 929개에서 2,768개로 늘어났을 따름이다. 한국인 자본가의 대부분이 비교적 큰 규모의 일본인·조선인 합작회사에 투자·참여하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상당수 한인 자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일제하에서 괄목할만한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원문 :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