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던 황신(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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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대마도 정벌을 주장했던 황신(Ⅱ)

[중앙일보] 입력 2011.01.13 00:25 / 수정 2011.01.13 00:25
황신을 모신 창강서원(滄江書院). 적국 일본에 건너가 갖은 수모를 겪었던 황신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일본에 복수하려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소재.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일본의 상황은 황신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 황제의 책봉을 받는 의식은 거행했지만 황신 일행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명나라 사신들 또한 황신이 본국으로 장계를 보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일본이 명에 조공하려 했는데 조선이 방해했기 때문에 자신이 출병하게 되었다’며 전쟁 발생의 책임을 모두 조선 탓으로 돌렸다.

 히데요시는 또 자신의 요구 조건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격분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하겠다고 공언했다. 심지어 오사카 주변에서는 ‘히데요시가 조선 사절 일행을 전부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황신을 따라간 수행원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다. 황신은 수행원들에게 일갈한다. “진짜 죽인다면 우리에게는 불행이지만 나라에는 다행이다. 히데요시의 무모한 소행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나라에는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모두 이런 뜻을 알아야 한다.” 사신으로 온 이상 일본의 재침 계획을 본국에 알리고 그에 대비할 수 있도록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 황신의 생각이었다.

 통신사 일행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히데요시의 부하들은 황신에게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다. 선조를 설득하여 왕자를 일본에 보내거나 정기적으로 사신과 예물을 보내라는 요구였다. 황신은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1596년 9월 9일 귀국길에 오른다.

 이윽고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임진전쟁은 끝났다. 일본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것이 분했던 황신은 대마도를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선조에게 “조선이 주는 쌀과 면포로 먹고 살던 대마도가 배은망덕하게 히데요시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며 “그들이라도 정벌하여 씨를 말림으로써 원한을 풀자”고 건의했다. 선조도 “대마도는 본래 조선 땅”이라며 호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문제였다. 황신은 수군을 동원하되 명군 화기수 7000∼8000명을 빌리자고 제안했다. 명군 지휘부는 강하게 반대했다. 혹시라도 일본을 자극하여 그들이 다시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로 여겨 복수하고자 했던 황신은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갖은 수모를 겪으며 소외된 조선 사신의 비애를 절감했던 황신이지만 미약한 국가적 역량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셈이다.

 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열려 양국 사이의 군사협력을 논의했다고 한다. 일본과의 군사적 밀착은 분명 중국을 자극할 것이다. 명군을 이용하여 일본에 복수하려 했던 황신이 다시 살아난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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