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 가야 백제 연합군 대방(帶方, 북경 천진) 전투에서 패하다
호태왕 비문
영락 14년 갑진년(404)에 '가야 백제 연합군(倭)'이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계(북경, 천진지방)로 침입하였다. □□□□□石城□連船□□□ … 석성(石城, 북경 동북 밀운호 동쪽)… 수많은 배가 이물과 고물을 맞대면서 몰려 왔다. 호태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평양(平穰, 위치 미상, 천진 부근)에서 출발하니 적의 선봉과 마주치게 되었다. 호태왕의 친위대가 적의 한가운데서 자르고 찌르면서 공격하였다. '가야 백제 연합군(倭)'이 무너져서 패퇴하였다. 베고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十四年
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영락 14년 조의 번역에서 핵심은 대방계(對方界)의 위치이다. 이곳이 지금 한반도의 평양 부근이라면 강단 사학자들의 한사군 위치 비정은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이는 수많은 모순을 내포하여 사실을 반영할 수 없다. 대방계가 북경 천진 부근이라는 재야 사학자가 옳다.
송종성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에서 대방계(帶方界)를 지금의 북경, 천진, 요서 지방으로 본다. 이 곳은 백제의 초기 건국지이다. 이는 많은 재야사학자들이 강단사학자들을 식민사관의 역사왜곡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할 때 주장하는 바다. 나도 재야 사학자의 편이다. 그렇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요점만 말하자.
온조가 나라를 세운 곳이 어디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 논의는 무의미해진다. 온조는 지금 대한민국의 서울 유역에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다. 지금 중국의 천진 부근에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에 온조왕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동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다(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이 해는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가 향년 61세로 돌아갔다. 그래서일까. 나라의 뿌리가 이곳이니 이곳만은 지켜라고 당부하였다는 말이다. 백제는 일식 관측 기록을 남긴다. 그 기록을 토대로 관찰 지역을 유츄하면 최적관측지가 발해만 서안을 낀 곳이 된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김영사, 56p)
차이나의 사서에도 나온다. 『북사(北史659)』, 『수서(隋書636-641)』에는 백제는 처음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始立國于帶方故地 『수서』 권 81, 『북사』 권 94). 이는 『태평어람』, 『책부원구』, 『만주원류고』 등에도 재확인 한다. 『주서(周書635)』 백제전에는 구태라는 이가 처음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有仇台者 始國於帶方 - 『주서』 권 49).
그렇다면 백제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었는가. 3세기 말의 백제 책계왕(286-298) 까지는 이곳이 백제의 땅이었다. 백제가 한강 부근으로 옮겨 온 후에도 3세기 말 또는 광개토대왕이 활약하던 4세기 말 또는 5세기 초까지도 보유하고 있었지는 알 수 없다. 백제가 이곳 평략을 위해 대규모 선단을 몰고 갔으므로 소서노의 사당은 유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영락 5년조에 호태왕이 선비족의 나라 후연을 치면서 돌아오는 길에 백제 소서노 황후의 능과 사당이 있는 이곳만은 건드리지 않고 지나간 것 같다. 천진 부근을 순유하면서 유관토경(遊觀土境)의 즐거운 마음으로 고구리의 서울로 돌아갔다.
(백제의 초기 도읍지는 지도에서 대방(帶方)이라고 표시한 지금의 천진 부근이다. 대방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 대방이 대동강 유역이면 그 동쪽에 어떻게 낙랑이 있을 수 있는가. 지도에서 요서 백제와 강남 백제는 영토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영향력이 미치는 곳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 후 동성왕(479-501)은 천진 일대의 요서백제만이 아니라 장강 유역에서 월남까지 이르는 강남 백제, 일본에는 비조 백제 등 광개토대왕보다 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다.
백제의 아신왕(392-404)은 응신 천황에게 일본의 지배권을 내 준다. 그 조건으로 가야의 지배권을 받았으나 403년 반환한다. 그 대신 응신천황에게 일본에 있는 왜군을 빌려 천진 유역에 요서 백제를 복구하여 대제국을 이루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사건이다. 호태왕은 자신의 친정으로 이룬 땅이므로 허용할 수 없어서 양측이 충돌한 사건이다. - 이상 송종성의 『가야 백제 그리고 일본』 요약
차이나의 동해안에 백제가 나라를 세웠다는 송종성의 주장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이를 대부분 수용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영락 14년조의 전쟁을 기록함에 장수왕은 왜(倭)라고만 표기하였다. 만약 백제군이 주력이었다면 백잔(百殘)등으로 표기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가야가 중심이 된 가야 백제의 연합군이라고 본다. 또 요서백제나 강남백제 등도 오늘날 영토 개념처럼 점령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고 볼 수 없다. 당시의 영토는 거점을 중심으로 세력이 미치는 정도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야의 철 상인들이 상권이 황하(黃河)에도 있었을 것이다. 가야에서는 철 무역의 상권을 보호해야 할 목적과 백제의 고토수복이라는 명분이 맞아떨어진 결과 이들은 연합세력을 형성하였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왜(倭)를 가야 백제 연합세력이라고 규정한다. 또 영락 10년조의 승리에 고양된 가야가 내친 김에 고구리의 식민지가 있는 후연을 점령하고자 벼른 것이라 볼 수 있다.
호태왕비문 번역을 10% 정도 남긴 나는 어떤 낭패감을 맛보았다. 글이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 일관성 때문에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영락 14년 조에서 대방(帶方), 평양(平穰)이라는 두 지명이 문제였다. 식민사관은 평양은 대동강 유역이고 대방도 대동강 임진강유역이니 가깝다. 그렇다면 천진에 대방이 있었다는 모든 기록은 거짓이 된다. 동시에 친일사학자들의 주장을 인정해야 한다. 낙랑의 남쪽에 대방이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인정하란 말인가. 천진 요동 지역에 낙랑이 있었다는 그 숱한 기록을 지우란 말인가. 마음을 가다듬고 글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평양(平壤)이 아니라 평양(平穰)이다. 아 식민사관론자들이 이래서 그르친 게로구나. 壤과 穰의 차이를 몰랐거나 穰은 壤을 잘못 쓴 거라고 우기었을 거다. 이를 확실히 바로잡아야 된다. 처음부터 조목조목 밝히어 나가자.
영락 14년 조에서 위치 비정의 단서는 대방계(對方界), 석성(石城), 평양(平穰)이다. 이 중에서 평양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한반도의 평양(平壤)과 한자가 다르다. 한반도의 평양이라면 대방은 평양 유역이 되고, 석성(石城)과 가까운 곳이라면 천진 부근이 된다.
영락 9년 조에 호태왕이 하평양(下平穰)을 순수하다가 신라 사신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평양은 하평양보다 북쪽이다. 차이나의 어떠한 사서에도 평양(平穰)이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평양은 단지 호태왕비문에만 나온다. 호태왕비의 묘지기(守墓人)에 평양(平穰)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아 여기서도 나오는구나. 1번은 실수일 수 있으나 2번은 실수가 아니다. 묘지기는 광개토대왕의 장군총이 있는 주변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묘지기로 선발하라는 곳의 지명을 살펴보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묘지기는 국연과 간연 2부류가 있다. 이 중 국연 중심으로 적어 보면 賣句余, 俳婁, 東海賈, 敦城, 于城, 碑利城, 平穰城, 改谷, 南蘇, 新來韓穢 沙水城, 舍城韓穢, 農賣城 등이다. 평양성은 국연 1호 간연 10호로 지키게 하였다. 무엇보다 호태왕 비문을 새긴 장수왕 때에 지금의 한반도의 평양을 평양(平穰)이라 하였는지 평양(平壤)이라 하였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장수왕이 도읍을 옮긴 대동강 유역의 평양은 평양(平壤)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평양(平穰)이란 글자는 없다. 평양(平壤)은 수백인지 수천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이를 정리해 보자.
1. 차이나 사서에는 평양(平穰)이 나오지 않는다.
2. 장수왕조차 한반도의 평양(平壤)을 평양(平壤)이라고만 적었다.
3. 『삼국사기』, 백제, 신라, 고구리 모든 기록에도 平壤은 있고 平穰은 없다.
4. 호태왕은 만주에 있다.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으로 가려면 길이 험하다. 천진 부근은 길이 벌판이다. 대동강으로 가는 것보다 천진으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
5. 광개토대왕은 평양 또는 한강 유역의 백제군 가야군과의 전쟁에서 수군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영락 14년조에는 수군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6. 광개토태왕의 비문 묘지기 부분의 지명 배열(碑利城, 平穰城, 改谷, 南蘇城)을 살펴보면 평양은 비리성(碑利城)과 남소성(南蘇城)의 사이에 있다.
아래 묘지기 분분의 지명을 살펴 보면 매구여(賣句余)에서 남소성(南蘇城)까지는 고구리의 서쪽 지방 즉 북경 천진, 요서 요동지방이며, 신래한예(新來韓穢)부터는 동쪽 지방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만 정리해 보면 돈성(敦城), 우성(于城), 비리성(碑利城), 평양성(平穰城), 양성(梁城), 신성(新城) 남소성(南蘇城)이다. 지명의 기재는 대개 공간적 순서를 따른다고 볼 때 평양성(平穰城)은 비리성(碑利城, 영락 5년 조의 산서지방)과 남소성(南蘇城, 요동의 발해 연안)임을 알 수 있다.
--- 아 래 ---
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 三, 梁谷二家爲看烟, 梁城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 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 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 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一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穰城卄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勾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
고로 평양(平壤)과 평양(平穰)은 다르다. 호태왕비문을 새기던 선비들이 헷갈렸었다고 추측할 근거가 없다.
대방 전투에서 패한 가야는 서서히 몰락한다. 패전만이 몰락의 주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이 시기에 동북아의 철기 생산이 보편화됨으로써 무역수지가 전 시기보다 못했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 나는 이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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