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주민 통곡, 패망때 日모습 보는 듯
일제 전철 밟지 말고 개방·평화 택하길

북한과 일본. 언뜻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두 사회다. 그런데 지난 한 주 기자는 이 두 사회에서 묘한 ‘데자뷰(dejavu)’를 느꼈다.

데자뷰의 시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을 보여주면서 ‘북한 당국에 의한 연출’ ‘살아남기 위한 연극’이라고 해설하고 있는 후지TV 화면에서부터였다. 일본인들은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 주민들의 과장된 반응이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하지만 한국인인 나의 눈에 북한 주민의 반응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때의 북한 풍경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NHK를 비롯한 일본 방송들이 매년 8월마다 반복해 내보내고 있는 태평양전쟁 다큐멘터리의 기록화면 속에서다.

1945년 8월15일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당시 일왕의 항복선언이 낭독되자 일본 국민들은 도쿄의 왕궁 방향을 향해 엎드려 울었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충을 탓하는 책망의 눈물이었다. 누가 억지로 시킨 것도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에 몰입된 일본 국민 스스로 택한 반응이었다.

따지고 보면 일왕 중심의 구(舊) 일본 제국주의 체제와 김일성 가문 중심의 현(現) 북한 독재체제는 유사성이 적지 않다.

두 체제 모두 개인숭배 체제였다. 일왕은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가미사마(신)’를 자처했다. 공장과 학교, 관공서, 심지어 민가에까지 일왕 사진을 붙여 놓고 절하게 했다. 조선인들에게까지 일왕을 신으로 추앙하도록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의 국민 교육목표는 일왕 혈통을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이어가는 데 이바지하는 ‘신민(臣民)’을 길러내는 데 있었다.

북한에서는 일왕이 김일성 가문으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가랑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 신출귀몰한 위대한 수령’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자는 구호가 난무한다. 수령을 인민 대중의 ‘뇌수’라고 부르고, 인민을 손발로 표현하는 주체사상은 일왕이 ‘국가의 주인’이고 국민은 단지 그 명령에 따르는 신하로 규정한 일본 제국주의 헌법 전문을 연상시킨다.

유사점은 권력구조만 아니다. 둘 다 극단적 반미를 부르짖었다. 미국의 미자만 붙어도 배척했다. 일제는 ‘적성어 배척 원칙’에 따라 야구용어 스트라이크를 ‘요시’(좋음), 볼을 ‘다메’(안좋음), 아웃을 ‘히케’(물러남) 등으로 대체하는 등 영어 단어에까지 적대감을 드러냈다. 북한도 축구의 코너킥을 ‘구석차기’, 프리킥을 ‘벌차기’, 슈팅을 ‘차넣기’ 등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두 체제 모두 중·고생들에게까지 수업시간에 전투훈련을 시켰다. 일제는 소년전국체전을 열어 스포츠종목이 아니라 각개전투 겨루기와 사격, 중무장하고 달리기 등의 시합을 했다. 북한도 어린 청소년들에게 똑같은 짓을 시키고 있다. 일제가 ‘강한 군사력만이 일본의 살길’이라면서 군사 우선정책을 썼던 것이 북한에선 ‘선군 정치’구호 아래 자행되고 있다. 전쟁물자 마련을 위해 극도로 내핍한 생활을 강요하면서 철저한 식량배급제를 유지하는 것도 두 체제가 쏙 빼닮았다.

흔히 북한이 한국보다 친일파 청산에서만큼은 앞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체제 작동방식만 놓고 보면 훨씬 더 일제스럽다. 한반도 북부에서 일왕의 액자사진이 김 부자 사진으로 바뀌었을 뿐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는 셈이다.

일본과 북한이 여러 면에서 닮았다는 사실은 일제의 패망 과정이 향후 북한 정치흐름에서 반복될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일제는 패색이 짙어졌는데도 전국민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일왕을 위해 싸우다 죽으라는 ‘옥쇄(玉碎)’명령을 내리며 저항했다. 전쟁 말기로 가면서 일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군부가 전권을 휘둘렀다. 외부세계는 일본이 곧 무너질 것처럼 보았지만 세뇌된 수많은 일본인들의 맹목적 충성 덕분에 좀처럼 붕괴되지 않았다. 이에 질린 미국이 원폭이라는 극약 처방을 쓰고서야 이 비극은 막을 내렸다.

북한의 후계자 김정은과 그 추종자들이 일제의 전철을 밟지 말고 제발 개혁과 개방, 평화 노선을 택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김동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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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별유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