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허형택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이사·전 한국해양연구원장
최근 동해 표기와 독도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정부 고위 당국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앞다투어 해법을 제시하고 독도 방위에 군대를 파견하는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동해 표기와 독도 문제는 새로운 문제도 아니고 갑자기 흥분해서 열을 올린다고 당장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차분히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외교 노력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한 해법이다.
정부 간 기구인 북태평양해양과학기구(PICES)는 동해를 일본해로 공식 표기해 오다 우리 정부와 해양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995년부터 공식 회의와 출판물에서 동해·일본해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은 그 다음해부터 PICES 집행위원회에서 철회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필자가 의장을 맡고 있던 1998~2002년에는 의장 직권으로 안건 상정을 막을 수 있었지만 필자가 의장직을 떠난 다음해에 일본은 외교부 고위 관리를 파견하여 동해·일본해 병기를 중지하고 일본해 단일 명칭만 사용할 것을 다시 강력하게 요구했다. 일본은 회의 한 달 전부터 PICES 사무국과 의장을 설득하여 이 문제를 다시 표결에 부치게 했다. 하지만 결과는 동해·일본해로 병기하자는 우리 안(案)이 3분의 2 찬성표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우리 외교부 담당자의 해박한 법률 지식과 외교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동해 표기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동·서양의 고지도에 '동해' '조선해' '동양해'라는 표기가 '일본해'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일본 스스로가 19세기 말까지 동해를 '조선해', 일본의 동쪽 바다인 태평양을 '대일본해'로 표기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다 우리가 일제 식민지 통치 하에 있던 1919년 런던에서 열린 제1차 국제수로회의에서 일본이 동해를 일본해로 일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그대로 통용되어 온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관련 정부, 국제기구, 지도 제작사 등에 일본보다 더 적극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널리 알리도록 국가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지금까지 동해 표기 문제는 일본의 강력한 외교 노력에 좌우되어 왔다. 프랑스 수로국은 동해·일본해를 병기한 세계해도(海圖)를 제작했으나 출판 직전 일본의 강력한 로비로 발매를 중단한 일이 있고, 유네스코는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일본인의 지시에 따라 대부분의 문서와 출판물에 일본해로 단독 표기하고 있다. 다행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학계와 관련 단체, 특히 민간단체 반크(VANK)의 꾸준한 노력으로 많은 세계지도, 교과서 및 출판물에 동해·일본해로 병기되기 시작했고 이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여서 시간은 우리 편에 서 있다고 하겠다. "복수의 주권국가 영향 하에 있는 지역이 하나의 명칭으로 통용되지 않을 경우 새 명칭이 합의될 때까지 복수 명칭으로 표기한다"는 UN 지명 전문가 그룹의 결의안(1977)과 이를 재확인한 결의(2003)는 우리의 동해 명칭 표기 노력의 국제법적 뒷받침이 되고 있다.
최근 '동해' 표기를 '한국해'로 바꾸는 방안이 제기됐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공식적으로 동해·일본해 병기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으므로 이를 관철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해로 표기하자는 주장은 역사·지정학적인 면에서는 적실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시점에서 그런 논의는 국제사회에 혼선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