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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미국 내 한 소녀가 그의 부모조차 태어나지 않았던 시기를 놓고 시비를 폈다. 주인공은 당시 열 한 살이었던 한국계 미국 소녀 알렉스 허 (한국명, 허보은)였다. 시비 대상은 학교에서 추천한 도서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요코 이야기)였다. 책의 저자 86세 일본계 미국인 요코 카와시마 왓킨스 (Yoko Kawashima Watkins) 도 시비의 대상이었다.

알렉스 허는 왓킨스의 자전적 소설이 일본인을 피해자로, 한국인을 가해자로 설정한 것은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1945년 한반도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고 자신했다. 시시비비를 따져야 한다며 알렉스 허는 등교 거부에 들어갔다. 알렉스 부모를 비롯한 여러 한국계 학부모들은 학교가 속한 주 정부 교재채택위원회에 재심을 요청했다. 그들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었다. 몇몇 곳에서 그 책을 추천 교재 목록에서 탈락시키기에 이른다. 소설에 나오는 한국인의 일본 여성 강간 장면 등은 자신의 실제 경험에 입각한 것이라는 왓킨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소설은 조선과 일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고통에 관한 것이라며 왓킨스는 강변했다. 하지만 앞으로 그 책을 교재 명단에서 탈락시킬 곳은 더 늘어날 전망이라 한다.

알렉스와 왓킨스가 맞선 사건은 개인 간 기억 경쟁처럼 보인다. 기억 전쟁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교재퇴출 결정 과정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자며 중재하는 심의위원도 있었다고 한다. 개인 간 기억 차, 즉 기억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완곡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개인의 기억임을 강조하던 왓킨스도 자신의 생생한 기억에 기댄 소설일 뿐 특정 민족을 폄하하고, 비방하는 역사책이 아님을 강조했다. 물론 알렉스에겐 그를 반박할 직접 기억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디로부턴가 전해들은 내용을 기억해두었다가 그 책을 만나면서 기억을 끌어냈고, 시비를 폈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 사건은 직접적 개인 기억과 전해들은 개인 기억이 부딪친 개인 간 기억 경쟁, 기억 전쟁으로 읽힐 개연성이 많았다.

한국의 저널리즘은 이 개인적 기억 경쟁, 전쟁에 공분을 표했다. 알렉스는 그의 고국인 한국으로부터 영웅적 대접을 받았다. 어디로부턴가 전해 받은 간접적 개인 기억을 ‘훌륭하게’ 발휘했다는 이유였다. 알렉스는 이후 한국의 여러 곳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더더욱 개인 기억을 다듬는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사실상 알렉스와 왓킨스 간 경쟁은 단순히 그들 간의 기억 다툼으로만 볼 수 없는 면들을 지니고 있다.

미리 말하자면 어떤 기억이든 기억은 결코 개인적인 것으로 머물 순 없다 (Halbwachs, 1980, p. 182). 꿈은 개인이 남몰래 꾸는 기억이다. 하지만 그것이 억압된 것의 징표적 기억이라면, 또 억압이 사회적 동학(動學)이라면 꿈이라는 기억은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전진성, 2005, 70쪽). 프로이드(G. Freud)의 정신분석학이 개인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사회에 관한 학문이라는 점은 이 처럼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별 꿈조차도 분명히 사회적임을 알려주고 있다. 꿈의 근저인 무의식이 치환(置換) 과정을 거쳐 징표적 기억(꿈)으로 나타난다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라캉의 언설 또한 기억이 사회적임을 전해준다.

파롤(parole)이 랑그(langue)를 기반으로 한 개인적 실천이듯이 개인적 기억은 당연히 집합적 기억의 흔적이다. 기억을 분류하고 이야기 속에 끼어두기 위해서는 언어 사용을 불가피하다. 기억은 사회적 행위인 언어 행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집합적, 사회적이다. 사회와 관련 없는 것들은 기억될 수 없다. 사회와 연관성을 갖지 않으면 망각되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엄격한 의미의 개인적 기억 경쟁이란 가능하지 않다. 소녀와 할머니의 만남은 결코 개인적일 수 없다. 개별적 기억으로 다투었다기 보다 그들은 집단적, 사회적 기억의 최전선에서 만났을 뿐이다.

묵설법(黙說法, aposiopesis)은 개인적 기억의 이면에 도사린 집단 기억, 집합적 기억, 사회 기억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코모리, 2004, 28쪽). 묵설법을 이용해 저자가 하지 않은 말을 찾고, 왜 그것을 말하지 않았을까를 정리하면 소설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소설 속 왓킨스 아니 요코는 12살이다. 12살의 눈으로 본 사건의 연속이 소설의 대강이다. 그래서 정작 물어야 할 질문들이 소설에는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질문을 잘 하지 않는 수줍은 12살 소녀가 강조될 뿐이다.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기엔 12살은 너무 적은 나이다, 저자는 소설에서 그런 점을 잘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도 소중한 질문은 결코 말해지지 않고 있다. 왜 요코는 자신이 일본(靑森)을 떠나 대나무도 자라기 힘들다는 조선의 나남(羅南) 땅에서 살고 있었을까? 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에 12살 소녀는 계속 왜 피난을 다녀야 하는지, 자기가 왜 그런 운명에 처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요코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라고 강변한다. 소설에서 한 번도 자신이 왜 조선 땅에 있어야 하는지를 질문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질문하기를 시도하지 않은 탓에 86세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이 개별적 몸이라고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모른다.

역사와 기억 간 관계는 적어도 4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최호근, 2003). 그 첫 번째 관계는 기억이 역사의 소재가 되는 경우다. 기억은 역사로 수렴된다. 역사는 언제나 기억에 앞서고 기억이 역사에 수렴되기 위해서는 객관성, 과학성이라는 스크린을 통과해야 한다. 객관, 과학이라는 체(filter)로 걸러진 기억은 역사라는 그물의 부분이 된다.

이 경우 기억은 늘 의심의 대상일 뿐 최근의 경향인 기억 전경화를 누리진 못한다. 두 번째로는 기억과 역사의 대립적 관계를 들 수 있다. 역사와 기억은 연결 보다는 단절의 관계에 놓인다. 기억은 삶과 관련을 맺고, 역사는 생활로부터 유리된 추상의 길을 걷는다. 과거 역사는 기억을 추방해 권위있는 제도로 호사를 누렸지만 생활연관성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젠 기억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세 번째로는 ‘억압-저항’으로 설명하는 대립적 관계다. 이 관계 설명에서 역사화는 권력관계이며 과거를 이해관계에 따라 강조, 배제하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기억을 억압하는 역사, 역사에 저항하는 기억이라고 이해한다. 네 번째는 역사와 기억을 상호보완적 관계로 둔다. 기억과 역사는 둘 다 이야기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야기 방식을 구성하기 위해 둘 다 선택(paradigmatic selections)과 배열(syntagmatic arrangement)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기억에 비해 선택과 배열과정에서 설명성, 일관성, 명증성이라는 비판적 계기를 갖게 된다. 즉 역사는 기억의 거울 역할을 수행하며 기억이 거시적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게 하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하게 돕는다. 반면 기억은 역사에 담긴 추상성을 걷어내고, 생동감을 부여한다. 역사와 기억을 결합해 역사가 생의 학문으로 뿌리내리게 하는데 그 결실이 이뤄졌을 경우를 두고 심성사나 일상생활사라는 이름을 달아주기도 한다. 다섯 번째는 역사를 늘 기억의 독립변수로 설정하는 관계다. 역사가 전파, 교육을 통해 기억을 창조하거나, 수정, 심화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부정적인 방향, 긍정적 방향 어느 쪽으로든 역사가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파악한다.

알렉스의 기억, 왓킨스의 기억은 집합기억, 공식화된 역사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1945년 8월 15일 동아시아의 새로운 출발점에 대한 대중의 기억과 공식 역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최근 8월 15일에 대한 기억, 역사 연구에서 단연 선두에 서는 것은 다양한 기억의 발굴 작업들이다 (정근식, 신주백, 2006 ; KBS, 2005 , 佐藤, 2005, 佐藤外, 2007 ; 貴志外, 2006). 하지만 이 다양한 기억들의 발굴은 단순히 서로 다른 기억들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마감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기억은 역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연장된다. 단순대립이나 수렴으로만 고민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네 번째 관계설정으로 수렴되곤 한다. 기억을 동일자 내로 흡수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타자의 경험을 깡그리 무시하며 공식적 권력인 국가의 과거인식만을 전면화하기도 하고, 타자의 경험을 분유(分有, partage)해 공동체의 과거 인식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윤대석, 2007).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알렉스의 기억, 왓킨스의 기억은 그 스스로 존재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고, 공식 역사와의 관계 맺음 속에서 어떻게 배치(선택과 배열)되고 있는가로 판단된다.

대중문화 속 개인의 기억조차도 집단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의 가치는 역사와 견줄 때 드러난다. 왓킨스의 기억이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기억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까지 덮진 못한다. 본인이 직접 통치하진 않았다고 해서 그로부터 자유스럽진 않다. 그래서 그의 기억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말 걸기에는 성공했으나 독백으로 마감하고 있어, 대화의 요청에 다시 놓일 수밖에 없다. 왓킨스의 독백으로부터 고통받는 이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도 그것은 늘 대화의 요청을 받고, 또 그에 응할 책무(answerability)를 지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