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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 최종편집 : 2009.06.08 11:05:11
위안부와 정신대는 다르다
요컨대 일본군의 위안소 제도는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 반인륜 범죄였습니다. 일본군과 일본국가가 공식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 할 전쟁범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 점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일본국가가 공식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치 있을 만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점을 납득할 수 없으며,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사가 다 그러합니다만, 분노가 지나친 격정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냉정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데 격정의 분노는 경우에 따라 장애가 되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내용을 잘못 알거나 본질을 잘못 짚으면 쓸데없는 논쟁만 생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범죄를 다룸에 있어서 마치 재판정에서 진실을 다투는 법률가처럼 엄숙하고 냉철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재인식》의 편집에 있어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두 편의 논문을 추천하였습니다. 저의 추천 위도는 그러하였습니다. 여태껏 한국인들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건의 복합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지요. 우선,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위안부와 정신대(挺身隊)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만,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시초문이라며 놀라워합니다. 그만큼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정신대 하면 곧바로 일본군 위안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의 순결한 처녀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하여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소개하겠습니다만, 중·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으니 그렇게 아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교과서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쓰고 있는《국어대사전》(금성출판사)에서도 ‘정신대’를 찾으니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의 위안부로 강제 종군한 한국 여성들의 대오”라고 되어 있군요. 인터넷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정신대’는 “식민지의 여성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 군인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만든 성적 노예집단인 종국위안부를 일컫는 말”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가 무려 20만이나 되었다고 하는군요. 이 수치는 한때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도 인용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안부와 정신대는 내용이나 경위가 전혀 별개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그에 관해서는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성과 그 신화성>(《시대정신》28, 2005)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요, 보다 자세하게는 그 글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정신대는 일제가 전시기에 여성의 노동력을 산업현장으로 동원한 것을 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영국 등의 연합국도 남자들이 군대에 나가 자리가 비자 여자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했습니다. 일제는 그 점에서 연합국보다 오히려 늦었던 편입니다. 일본에서 정신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것은 1943년 9월부터이며, 공식 결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1944년 3월로 알려져 있습니다. 14세 이상의 미혼 여성들을 자발적으로 학교, 지역, 직장 단위의 정신대로 조직하여 군수공장으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별 효과가 없자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이란 법령을 발동합니다. 이 법에 따라 12~40세의 미혼여성이 국가에 의해 공식 동원되어 군수공장에 보내졌습니다. 조선에서는 이 법이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1944년 그해에 시행된 징병제(徵兵制)나 징용령(徵用令)에서처럼 국가가 행정력을 발동하여 여자들을 공식 동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상 동원과 같은 강제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관의 모집과 알선에 지원해서 나가는 식이었습니다. 예컨대 여학교의 교사가 여학생들에게 나라를 위해 정신대로 나가라고 권유하였는데요, 권유를 받는 여학생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강제와 같았던 것입니다. 조선에서 정신대가 조직된 최초의 사례는 1943년 11월 서울시내의 접객업소에 종사한 3,349명의 여자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뒤이어 1944년 3월에 여자정신대 제1대가 평양의 군수공장에, 4월에는 고녀생 제1회 정신대가 인천의 조병창(造兵廠)에 투입되었습니다. 뒤이어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군수공장에서 노동한 정신대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그 정확한 총수에 대해서는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나고야에 있는 미츠비시[三菱] 항공기 공장의 300명 등, 알려진 한에서 정신대가 투입된 공장의 사례들을 모두 합하면 약 2,0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혼동의 기억이 성립하는 과정 정신대의 실체가 원래 이와 같았기 때문에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정신대를 위안부로 혼동하는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성립해 있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예컨대 1946년에 나온 이태준의 소설《해방전후》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은 메칠 안 남았다고 하지만 특공댄(特攻隊)지 정신댄(挺身隊)지 고 악지 센 것들이 끝까지 일인일함(一人一艦)으로 뻐틴다면 아모리 물자 많은 미국이라도 일본 병정 수효만치야 군함을 만들 수 없을 거요. 일본이 망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 같은 걸 기다리나 보오! 일제가 곧 망할 것이라는 주인공 현의 말을 반박하는 아내의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대는 특공대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실제 정신대라는 말을 일본어사전에서 찾으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각오로 조직된 부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大辭林》). 그래서 원래 정신대라 하면 ‘여자정신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명칭과 목적의 정신대가 있었던 것이죠. 다시 말해 다양한 목적의 특공대가 있었지요. 그러했기 때문에 이태준도 그의 소설에서 “특공댄지 정신댄지”라 하면서 이 둘을 동어반복의 형태로 나열했던 겁니다.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혹은 징용, 혹은 징병, 혹은 학병, 혹은 보국대, 혹은 정신대(挺身隊) 등으로 붙들어 가서 맘에 없는 과중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최후에는 소위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 민족을 전쟁에 몰살시키려 하였으며(하략) 저희들 말로는 전력 증강을 위한 ‘여자정신대원’이란 것인데, 일본 ‘시즈오카’라든가 어딘가에 있는 비행기 낙하산 만드는 공장과 또 무슨 군수 공장에 취직 시킨다고 했지만, 막상 간 사람들로부터 새어 나온 소식에 의하면 모조리 일본 병정들의 위안부로 중국 남쪽지방으로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김정한은 1908년생으로서 식민지기를 몸소 겪은 분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정신대의 원래 뜻을 정확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간 여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막상 정신대로 간 사람들로부터의 ‘소식’에 의하면 중국 남방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 소식은 과연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요. 소설을 좀 더 따라 읽으면 드디어 마을의 여인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결국 옥이에게 붉은 닦지가 나오고야 말았다. 역시 그놈이었다. 여자정신대원! 일본 병정의 위안부! 소설의 주인공 가야부인의 몸종인 옥이 처녀에게 드디어 ‘붉은 딱지’, 곧 정신대 영장이 발부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붉은 딱지’[赤紙]는 군인으로 징병될 청년들에게 발부되는 영장이었습니다. ‘흰 딱지’[白紙]도 있었는데요, 징용 대상자에게 발부되는 영장이었습니다. 여자정신대에 대해서는 붉은색이든 흰색이든 영장이 발부된 적이 없습니다. 전술한 대로 조선에서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장을 발부하기 위해 국가는 치밀하게 준비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선 모든 사람의 직업능력을 등록시킨 필요가 있습니다. 호적지를 떠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늘날의 주민등록부와 같은 것이 정비될 필요도 있습니다. 동원의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예비 교육도 시켜야 합니다. 실제 총독부는 1938년 발포된 ‘국민총동원법’에 근거하여 이러한 준비과정에 착수합니다.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국민등록제를 실시하였으며, 기류령(寄留令)을 공표하여 호적지를 떠나 사는 사람들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했으며, 농촌청년을 대상으로 일본말을 가르치고 제식훈련을 시키는 등, 이른바 연성(鍊成)과정을 운영했습니다. 총독부가 1944년 징병제와 국민징용령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이 같은 준비작업이 치밀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그러한 준비작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동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실행하려야 할 수 없는 객관적인 여건이었지요.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대로 여자들이 학교나 직장 단위로 정신대로 간 것은 사실상 강제였습니다만 형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지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딱지 같은 것이 발부된 적은 없었던 것이죠. 기억의 집단화, 공식화 이윽고 1979~1982년이 되면 역사교과서에 “젊은 여자들까지도 산업시설과 전선으로 강제로 끌어갔다”는 기술이 나타납니다. 여인들이 전선으로 끌려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직 위안부라는 기술은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끌려간 여인들이 위안부로 희생되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교과서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1983~1996년간에는 “여자들까지도 침략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었다”라고 하여 애매하긴 하지만 좀 더 강력한 암시의 서술이 나타납니다. 드디어 1997~2001년의 교과서에 이르면, “이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했다”고 하여 정신대와 위안부를 등치시키는 기술이 명확하게 성립하지요. 이후 2002년부터 지금까지는 “젊은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지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하여, 약간 바뀌긴 했습니다만, 위안부가 당초 정신대로 동원된 여자들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의 서술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소의 역사
잠시 후지나가의 논문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상하이만도 아닙니다. 1907년이면 서울에도 일본의 가시세끼와 가라유키상이 진출했다고 보입니다. 서울 용산의 일본군 주둔지 부근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유곽이 생겨났던 겁니다. 그때 주변의 공동묘지를 함부로 허물어 분쟁이 생겼는데요,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묘지 주인들의 요구에 일본인 업주는 “해당 유곽지가 경성(京城)에 주둔한 일본 군졸의 위생에 필요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없다”고 변명하였습니다.(《漢城府來去文》(하), 서울시사편찬위, 297쪽). ‘위생’이란 말에서 저는 당시 일본군 주변에 세워진 유곽을 사실상 위안소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출발은 상당히 이른 시기로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후지나가의 논문입니다. 어쨌든 1932년 일본군이 상하이에 위안소를 세운 것은 맨땅에다 건물을 짓고 여자들을 모으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같이 일찍부터 진출해 온 일본인의 매춘업을 군전용으로 지정하고 감독하는 체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매춘을 목적으로 상하이로 진출한 가라유키상은 일본여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음에 후지나가 논문의 가장 중요한 기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여자들도 1931년 이후 활발히 상하이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1931년 상하이의 조선인은 남자가 717명, 여자가 139명이었습니다. 1936년이 되면 남자는 884명으로 별로 늘지 않았는데, 여자가 913명으로 남자보다 많게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그 상당 부분이 조선에서 건너간 매춘에 종사한 여자들이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가 되면 조선인이 경영하는 위안소도 생기고 거기에 수용된 위안부 수도 증가해 갔습니다. 그 가운데는 1937년 자본금 2천 원으로 시작한 위안소가 1940년 자본금 6만 원으로 번창한 업소도 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의 박일석이란 사람이 경영한 ‘카페 아세아’입니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진 조선인 업주를 논문에서 세어 보니 모두 29명이나 되는군요. 위안소는 대략 세 가지 형태였습니다. 하나는 군이 직접 경영한 것인데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민간업소를 군전용으로 지정한 것입니다. 업자는 군속의 신분이 되어 군의 세밀한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은 군이 지정하지만 민간인도 이용하는 매춘숙입니다. 후지나가 교수는 아직도 건물이 남아 있는 상하이 위안소를 직접 답사하여 그 내부 구조까지 밝힙니다. 아울러 일본에 생존해 있는 위안소 업자와 인터뷰도 하면서 자료 속에 나오는 위안소들이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합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운명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기왕에 버린 몸 하면서 악착같이 깜짝 놀랄만한 돈을 번 여인도 있는가 하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아편을 하다가 거지가 되어 길거리에서 얼어 죽은 여인의 슬픈 이야기도 있군요. 이상이 후지나가 교수의 논문입니다.
조선에 있었던 위안소로 제가 증언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두 군데입니다. 한 곳은 대전시 교외의 일본군 주둔지의 부근이었습니다. 그 곳을 이용한 적이 있는 일본군 지원병 김성수는 그 곳을 병사들이 ‘P야’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P는 영어 prostitute(창녀)의 첫 글자이고 ‘야’는 일본말로 옥(屋), 곧 집을 말합니다. 언젠가 1944년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중국 난징[南京] 부근에서 전투를 하다 돌아오신 할아버지를 만났더니 그 분도 위안소를 ‘피야’라고 하더군요. 대전의 ‘피야’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김성수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일본 키모노를 입은 중키의 여성이 나오면서 일본말로 인사를 하는데, 발음으로 조선여자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선 위안소를 이용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욕망은 간단하게 채울 수 있었으나 허무한 감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인생길을 걸어 왔으며, 앞으로 또 어떤 길을 걸어 갈 것인가. 이를 생각하니 동정을 금하지 못했다”(《상이군인 김성수의 전쟁》, 금하출판사, 69쪽). 저는 아직 이렇게나 정직하게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고 있는 자서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른 한 곳은 진해에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진해 해군기지에 군속으로 동원되었던 어느 할아버지가 거기에 들렀던 자신의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내무반의 상급자가 호루라기를 불며 “위안소에 갈 사람은 집합하라”고 하여 얼떨결에 호기심으로 따라 나섰다고 하는군요. 위안부들의 처지 기록에 따르면 위안소의 입구에는 이용수칙을 적은 판자가 걸려있었습니다. 위안소 내에서 술을 마시지 못한다,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이용시간은 저녁 몇 시까지이다, 단 하사관과 장교는 밤 몇 시까지이다, 등등과 더불어 이용요금이 적혀 있었습니다. 병사와 장교의 차이가 있었는데 병사는 대개 1~2원이었습니다. 병사의 한 달 월급이 7~1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위안소 이용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던 셈입니다. 이용 시에는 반드시 콘돔을 사용해야 했는데, 당시는 이를 삿쿠라고 하였습니다. 삿쿠는 한 달에 한 개씩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는데, 대개 위안소에 두었다가 병사들에게 직접 지급하였다고 합니다. 위안부는 1주일에 한 번씩 위생 검진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업자는 위안부의 명단과 변동 상황을 매번 군부대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수입금은 대개 위안부와 업자 간에 절반씩 분배하였습니다만, 업자에게 받은 선대금이 과중하거나 악덕 업주를 만날 경우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안부들은 지정된 장소를 이탈할 수 없었습니다. 기록에 따라서는 제법 자유롭게 시가를 돌아다녔던 여자들도 있습니다만, 대개는 행동의 자유가 박탈된 노예와 같은 처지였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위안부 연구자들은 위안부를 성노예(性奴隸)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들은 어떻게 끌려갔던가? 전장에서 언급한 대로 1938년 소설《농군》의 작가 이태준은 만주를 여행합니다. 펑티엔[奉天]역 이등대합실에서 그는 다섯 명의 조선 여자를 만납니다. 한 여자는 얼굴이 까무잡잡한데 30이 훨씬 넘어 보이고, 다른 한 여자는 솜털이 까시시한 16살의 소녀이고, 다른 셋은 22~23세로서 핏기는 없으나 유들유들하고 건강해 보이는 여자들입니다. 다들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노랑수염의 노신사가 서 있습니다. 이태준이 여자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자 노신사가 다가와 시비조로 무엇 때문에 묻느냐고 하면서 베이징[北京] 근방으로 간다고 대답합니다. 여인들은 노신사를 아버지로 부릅니다. 이태준은 그 노신사를 베이징이나 티앤진[天津]의 여관이나 요릿집의 주인쯤으로 짐작하고 “험한 타국에 끌려가는 젊은 계집들”에 새삼스레 ‘골육감’을 느꼈다고 그의 여행기에 적었습니다(《무서록》, 서음출판사). ‘골육감’이란 말이 조금 낯섭니다만, 동포로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일본군의 전쟁범죄 이상이 여인들이 끌려간 다양한 경로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건을 기획하고 연출한 최종 책임자가 따로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일본군과 총독부입니다. 일본군은 수뇌는 위안소의 설치를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업자를 지정하여 여인들을 모으도록 지시했습니다. 거기에 총독부가 협조하였습니다.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거나 항구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는 여행증명서가 필요한 시절이었습니다. 여인들의 행렬이 위안소로 가는 줄은 그 시대의 상식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법으로도 인신약취와 취업사기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부의 관헌들은 그것을 묵인하였을 뿐 아니라 여행증명서를 발급해 줌으로써 협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집책에 끌려 위안소로 향한 여인들의 행렬은 일본군과 총독부가 공모한 인신약취의 범죄행위였습니다. 위안소의 여인들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위생 검진을 받아야 했으며, 자유외출은 금지되었습니다. 여인들은 성노예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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