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영어 서툰 일본 노벨상 수상자, 한국은 뭘 배울까
영어는 생각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 논리력 위해선 모국어 능력 필수
08.10.10 20:52 ㅣ최종 업데이트 08.10.10 20:52 최민호 (cnfqkf0816)
  
현 정부는 시작부터 영어 몰입 교육을 강조하며, 영어에 대한 관심을 부쩍 높였다.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이뤄진 원어민 영어 수업.
ⓒ 권우성
대리등록

나라 안팎이 일본의 노벨상 수상으로 시끄럽다. 올해 물리에서 3명, 화학에서 1명, 과학 분야에서 도합 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낸 일본의 저력에 놀라 감탄하는 한편,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 뭘 했나?'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여기 세 가지의 흥미로운 사실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이번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 마스카와 도시히데, 고바야시 마코토 교수는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순수 토종 일본파다. 그 중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는 심지어 여권도 없다고 한다. 스스로 "영어가 정말 서툴다"고 말 할 정도로 영어에 익숙지 못해 지금까지 국제학회로부터 초청을 받아도 거절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 때문에 수상자들이 관례에 따라 영어로 하던 수상 소감을 어떻게 할지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영어에 반쯤 미친 우리나라 사람들 눈에 보기엔 참 이상한 광경이다. 영어가 국제 경쟁력이라고 굳게 믿고 영어몰입교육을 시도한 '어륀지' 정부나 국어·국사 빼곤 영어로 수업한다는 국제중학교 신설을 밀어붙인 공정택 교육감, 유치원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초등학생 시절의 단기 어학연수는 기본이요, 심지어 영어 발음 좋아지라고 혀 수술까지 시켜주는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보기엔 영어 못하는 사람이 교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노벨상을 받는다는 사실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지 모른다.

 

우리나라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일본에선 그런 경우가 드물다. 대신 일본 초등학교에선 과학 실험이나 야외 실습같이 학생들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학습에 주안점을 둔다. 또 퍼즐이나 수수께끼를 푸는 형식의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게 하여 자발적인 학습태도를 이끌어 낸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 난부 요이치로 교수는 "퍼즐과 같은 수수께끼를 푸는 초등학교 과학시간이 가장 흥미를 느낀 시절이었다"고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영어 서툴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나라인 일본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16명(그 중 과학 분야에서 13명)이나 배출된 그 배경에는 이런 교육의 힘이 있지 않았을까? 영어 유치원을 보내고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단기 어학연수를 보내면서 토플시험과 수학·과학 경시대회를 준비시키는 우리나라 학부모들로서는 아마 이해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 둘. 내년 문을 여는 대원국제중학교의 교과편성안을 보면 영어와 사회 과목이 지금보다 주당 1시간씩 늘어나고 수학과 과학 과목은 1시간씩 줄어든다. 이들 4개 과목의 수업은 영어 70%, 한국어 30%의 비율로 진행될 거라고 한다. 그와 더불어 며칠 전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국단위 일제고사가 10년 만에 부활해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진통 속에 치러졌다.

 

현재 우리는 산업화를 거쳐 21세기 지식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통신 기술과 인터넷의 발달로 지식과 정보가 희소성을 잃고 범용화되어 가고 있는 요즘, 남보다 앞선 경쟁 우위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아이디어'다. 이 미래 지향적 경쟁력은 다름 아닌 창의력과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폭넓은 독서와 토론학습, 수학과 과학 공부, 논리력을 갖춘 깊이 있는 사고를 통해 함양된다.

 

문제해결 능력이 아닌, 단순히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문제를 푸는 요령을 사교육을 통해 초등학생 시절부터 배우는 아이들에게, 중학생 시절부터 영어와 제2외국어를 더 많이 배우는 아이들에게 과연 창의력과 상상력의 함양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모국어조차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영어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영어로 논리력을 갖춘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을까? 영어란 결국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제 아무리 영어를 잘한들 그것을 통해 표현할 내용이 알차지 않다면 그것은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공계 기피 해소 예산 1조238억원, 과연 나아졌을까?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사실 셋. 8932억 원. 2007년 정부가 이공계 기피 현상 대책에 지원한 금액이다. 올해 2008년에는 무려 1조 238억 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그런데 이 많은 돈을 쏟아 부어 좀 나아졌을까? 글쎄, 그래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자연계 상위권 수험생들은 이공계 진학을 꺼려하고, 학부 졸업생들은 의·치의학 전문대학원으로 진로를 변경한다. 유능한 인재들은 대부분 해외로 유학 가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하니, 대체 그 많은 돈 다 써서 뭐했는지 하는 의문이 들 뿐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사실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노벨상 쾌거를 이뤄낸 일본에서도, 세계적인 과학 선진국 미국에서도 날이 갈수록 느는 이공계 기피 현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보다 더 심각한 상태다. 전문가들도 입을 모아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바로 심각한 고용 불안. 우리나라 이공계 기피 현상의 원인은 이것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

 

최근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13개 연구기관에 종사하는 인력 9890명 가운데 비정규직은 4633명으로 46.8%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연구인력은 3433명으로 전체 비정규직의 74%에 해당한다. 이들 비정규직 연구인력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이며, 계약기간은 1년, 고용기간은 통상 2년에 불과하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서조차 비정규직 연구인력의 비율이 1/3 수준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공계 연구인력의 고용 불안이 상당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정부는 이공계 기피 현상 해소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고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상당부분이 '장학금'이나 '육성 지원금' 형태의 유인책에 지나지 않았고, 정작 가장 중요한 '고용 안정'에 대한 근본 대책은 내놓지 못했다. 대학 4년 동안 이공계 장학금 받고 등록금 걱정이 없어진다고 밥벌이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당장의 장학금보다 더 절실한 건 미래에 대한 보장이다. 고용 안정 없는 이공계 장학금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 노벨상을 탈 수 있었던 이유와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탈 수 없는 이유. 답은 교육과 정책에 있다. 21세기 지식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때에 70년대 산업화 시대의 경쟁력 마인드로 무장한 집권세력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불러일으킨 줄 세우기 일제고사 부활과 국제중학교 신설. 고용 불안이라는 이공계 기피 현상의 근본 원인은 보지 못한 채 대학 재학생만 늘리면 된다는 식의 가시적인 성과 올리기에 남발되고 있는 각종 장학금과 지원금. 이런 고질적인 병폐가 지속되는 한 대한민국의 노벨상 수상은 요원한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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