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월간 학부모에 연재되었으며 1997년8월에 도서출판 "해인"에서 출간한
독도 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를 총 76회에 걸쳐
연재를 합니다.

[1] 독도를 지키게 된 동기
독도의 역사적 사실이나 3년간 그곳에서 생긴 사연들을 얘기하기 이전에 독도와 인연을 맺게 된 내력부터 기술하고자 한다.
지금 1979년으로부터 96년전 정확히 1883년 음력 4월 초8일 강원도 강릉에서 향후 10년을 예정으로 울릉도로 낙향한 할아버지께서 4일간 뱃길로 해서 지금의 울릉도 북면 현표동에
당도 하셨는데, 그 때 울릉도의 주민이라고는 고작 2가구가 살고 있었다.
강릉를 떠나실 때 가지고 온 씨앗들은 바닷가에 젖어 못쓰게 되고 또 먼저 울릉도에 온 두 가구에게도 곡식의 씨앗들은 전연 없었다.그리하여 매일 산에서 칡을 캐고 바다에서 소라, 생복, 문어 등과 미역, 김 등 해초를 따다 생명을 유지하면서 울릉도와 강원도 간을 횡단 할 수 있는 배를 만들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연장들이 없기에 그 과정은 힘들고 진척이 늦었다.
그러는 동안 하루는 높은 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먼 동쪽바다에서 또 하나의 섬을 발견하였다.일찍이 읽은 바 있는 세종실록 및 동국여지승람 등 고서에서 밝힌 우산도, 지금의 독도임을 짐작케 되었고 건조 중이던 배를 재촉, 빨리 사람를 모아 독도에 가보기로 작정하였다.마침내 배가 완성 되었고 1897년 6월에 할아버지께서는 독도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 때 울릉도에서 향나무 한그루를 가져가서 독도 동도에 심으셨다.
울릉도에 돌아 올 때에는 바다사자 세 마리를 잡아와서 울릉도 주민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칡과 소라나 생복 만으로 연명하던 주민들에게 지방질을 공급하게 된 것을 퍽 기뻐하시며 이후로는 지방질을 독도에서 얻어야 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다음 해엔 전년보다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독도에 바다 사자를 잡으러 가셨는데 의외로 그 곳에서 일본인 무라카미란 사람 일행을 만나게 되어 대화 해 본즉 그 사람들은 생업으로 바다사자를 잡아 파는 동물상이라 하였다. 그 때 할아버지께서 이 섬은 자고로 우리 땅인지라,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 섬에 오지 말것을 얘기 하였다. 울릉도에서 같이 간 일행은 바다사자를 잡아 돌려보내고 할아버지께서는 일본인이 타고 온 배에 동승,일본으로 같이 가게
되었다.
일본에 가신 할아버지께서는 그 곳 관헌에 울릉도와 일본 사이에 위치한 우산도, 지금의 독도는 한국의 땅인지라 앞으로 일본인의 출어는 금지 할 것을 당부하고 일본인이 내주는 배로 울릉도로 돌아오셨다고 내가 어릴 때 여러 번 무용담처럼 말씀 하셨다.
또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각별히“고서에서 우산도 또는 석도로 기술되어 있는데 , 그 곳에 가서 본즉 섬이 돌로 되어있어서 나는 앞으로 그 섬을 돌섬으로 부르기로 정하셨다“고 항상 말씀하셨다.독도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906년 음력 3월 5일 당시 울릉군수 심흥택이 강원도 관찰사에게 올린 보고 가운데 “본군 소속 독도” 라는 부분이다. 당시 칙령 41호 1900년 공포에 의해 울릉 군수가 울릉도와 죽도,석도를 관활케 되었는데, 1906년 3월 4일 일본 관리들이 울릉도에 와서 심흥택군수에게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통고를 하자 심군수가 급히 조정에 보고하는 문서에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한문으로 석도라 한 섬이 돌섬이며,또 형태도 돌섬인데, 생긴 모습이 의젓하고 절해고도라서 독도라 한 것이, 또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마음에 거슬려 93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여러번 원망조로 말씀 하신적이 있다. 나 역시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석도로 계속 부르게 되었더라면 지금에 와서 일본이 매양 떼를 쓸 때 자기네 나라가 부르는 다케시마의 명칭에 대해서 한국은 어찌해서 이름도 가지가지인가, 또 한국의 말하는 독도는 바로 울릉도에 접근해 있는 죽도가 아닌가,그러므로 지금의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 다케시마라는 주장을 못하도록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번 해본 적도 있다.
이와같이 할아버지께서는 평생을 두고 돌섬은 우리 땅이며 울릉도의 속도인지라 울릉도 사람이 잘 보전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해방후인 1948년 6월30일 울릉도 어민들이 독도에 출어 하였다가 미 5공군의 오폭으로 30여명이 폭탄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다.당시 경상북도 도지사가 독도에 위령비를 세울 때 할아버지께서 노구의 몸으로 독도에 같이 가셔서 조사를 낭독하셨는데, 그 조사속에서 “천지신명이여, 이 섬은 하늘이 주신 우리의 땅이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포의 생활의 터전이기에 우리 동포가 아끼고, 또 지켜 나갑니다.오늘도 30여명의 우리동포는 돌섬의 수호신으로 이 섬을 지키고자 합니다.“라고 하시던그 애절한 목소리의 조사 끝 대목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독도에서 돌아 올때 풍랑을 만나 포항으로 해서 울릉도에 오는배 속에서 할아버지께서는 “순칠아, 네 이름의 순자는 돌림자고, 칠자는 네가 일곱 달만에 태어나서 이 할아버지가 애를 먹고 너의 생명을 구했기에 그렇게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너의 생명은 벌써 이 하늘 아래 없어졌을 것인즉, 그러기에 너는 앞으로 멋있는 일을 해야 된다.할아버지는 울릉도를 개척했는데 요즘 밝은 세상에 어찌 독도를 그냥 둘 수 있느냐,힘든 일이지만 결코 독도를 그냥 둘 수는 없다“ 하시며 나의 손목을 힘껏 잡으시고 멀리 독도를 바라 보셨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