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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칙령 제41호(1900. 10. 25)의 石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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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4월 조선조정은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입한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검찰사 이규원을 동 섬에 파견하여 그간의 울릉도 공도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게 된다. 이후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된 뒤 일본 어선의 조선해 어업이 본격화되면서 울릉도에 들어와 불법벌목을 하는 일본인이 더욱 극성을 부려, 1899년 울릉도 삼림벌채권을 가지고 있던 주한 러시아 공사관이 외교문서로 대한제국 외부에 항의해 왔으며, 울릉도 도감(島監)의 일본인 불법 벌채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책 요청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울릉도에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일본 측과 합동조사하여 일본인의 울릉도 밀입도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1900년 울릉도 시찰위원 우용정(禹用鼎)을 대표로 감리서(監理署) 주사 김면수(金冕秀)와 부산 해관세무사 라뽀데(E. Laporte, 羅保得) 및 봉판(封辨) 김성원(金聲遠), 주부산 일본부영사 아카쓰카 쇼스케(赤塚正助)(輔) 및 경부(警部) 1명과 함께 창룡환(蒼龍丸)에 탑승하여 5월 31일 울릉도에 도착, 6월 1일부터 5일간 영국인 세무사 라뽀떼의 입회 아래 일본 부영사 아카쓰카 쇼스케 등과 연달아 회동하면서 울릉도의 실태를 조사하였다 울릉도 시찰 이후,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의 관제개정을 단행하여 石島(독도)를 울도군수의 관장하에 두고 이를 세계에 공표하였다.
일본 측에서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의 石島가 어느 섬인지 불명하다는 이유로 대한제국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하에서는 대한제국 칙령 제41조의 '石島'가 왜 독도인지에 대한 실증적이고 일본 측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石島를 한글로 풀면 '돌섬'이다. 돌섬의 사전적인 의미는 "돌이 많은 섬"을 지칭하는데, 보통 이러한 섬은 별 쓸모가 없는 섬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특별히 도명(島名)을 부여할 가치가 없는 돌투성이의 작은 섬을 '돌섬'이라는 일반명사로써 지칭해 왔다. 독도의 한국역사속 고유명칭은 '우산도(于山島)'다. 이 우산도라는 명칭이 19세기 말 울릉도 개척을 필두로, 타지인들이 울릉도에 대거 유입되면서 그들은 돌이 많은 섬인 '돌섬' 방언으로 '독섬'으로 호칭했으며, 특히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이런 울릉도 현지인의 호칭을 반영하여 '石島' 즉 '돌섬(독섬)'이라고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서울의 식자층은 옛 서적이나 지도에 근거해 독도를 우산도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1907년 장지연(張志淵)이 저술한 대한제국의 교과서중 가장 과학적으로 그 내용을 구성했다고 평가되며, 가장 많은 부수가 발행된 지리 교과서 대한신지지 (大韓新地志) 坤 43쪽에서 "于山島는 其東南에(울릉도 동남쪽에) 在하니라" 라는 기록은 그 한 사례이다. 근대 울릉도에는 초기 이주민
중 전라도 남해안 출신
사람들이 많았다. 고종실록 고종 19년(1882년)
6월 5일(己未)條에, 울릉도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규원이 고종황제에게
울릉도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고 보고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규원의 조사※에 의하면, 울릉도에
있는 내륙인 수는 182~192명에 달하였다. 이중 전라남도가 가장 많은
115명이었고, 다음이 강원도 평해인이 14명, 경상도 경주인이 12인, 경기도
파주인이 1명이었으며, 성명·출신지역 불명의 사람 4,50명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배를 만드는 일(造船)을 하였으며(126명) 그 이외
미역채취 약초채취에 종사하였는데, 봄에 울릉도에 와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거나, 미역을 따고 고기를 잡고
나서 다시 내륙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오랜 울릉도 공도정책에도 불구하고 울릉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조선인이 상당수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표는 이규원이
울릉도 검찰을 하면서 만나거나 주변사람들로부터 거주한다는 사실을
구두로 확인한 사람과 그들의 작업내용이다.
이규원은 울릉도에서 사람이 거주할만 곳을 샅샅이 실사(實査)하였으므로 당시
이 인원 이외 울릉도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 지리학연구 제40권 2호, 2006 (pp.213~228)'이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에 나타난 지리적 정보'/정광중/ pp.221의 도표를 바탕으로 '이규원의 검찰일기(독도영유권 자료의 탐구 제2권/신용하/1999)', '울릉도 검찰 계본초' 를 참고하여 작성. 본 학술지 도표에는 4월 30일 기록에 '김재근과 격졸 13명'으로 기록했는데, 확인 결과 23명이 정확하다. 울릉도 개척 당시의 이주민들이 독도에 특별한 명칭을 부여하지 않고 돌이 많은 섬인 '돌섬' 혹은 그들의 방언으로 '독섬'이라 발음하면서, 독섬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 그 의미를 담을 경우 石島로, 그 소리를 취하였을 때는 獨島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용례는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사용례였음을 신용하교수님께서 한국지명대사전에서 샅샅이 조사하였으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르고 있어,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石島가 독도를 지칭한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뚜렷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흔적은 1682년 동국여지승람의 참고지도로 알려진 '동여비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라도 지역에 '獨島'라는 명칭을 가진 섬이 있었다.
20세기 초엽에도 그러한 사례가 있었다. 전남 무안(務安)의 '독섬'을 '독도(獨島)'로, 제주(濟州)에 있는 '독개'를 '독포(獨浦)'로 표기한 예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33, 여지고(與地考) 21, 해방(海防) 제주·무안조(濟州·務安條)에 나온다. 그러나 언제부터 석도(돌섬, 독섬)라는 명칭이 '독도'로 정착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독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4년 일본의 해저전선망 가설을 위해 파견된 일본군함 니타카호의 일지에서이다. 일본해군의 군함신고행동일지(軍艦新高行動日誌)
이 자료는 일본 군함 나타카호(新高號)가 일본 해군사령부로부터 독도(리앙꼬르드島)에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일본 해군 망루(海軍 望樓) 설치를 위해 예비탐색조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4년 0월 25일 이를 실시한 일기의 일부분이다. 이 기록으로 1904년 당시 '獨島'라는 이름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와 더불어 1902년 주한일본공사의 울릉도 출장보고서와, 1903년 한해통어지침 두 가지 기록을 살펴보자. 한해통어지침에는, 한인 어부와 일본 어부가 독도를 양코島(ヤンコ島)라 호칭한 것으로 기술하였으며, 부산주재 일본 영사관의 울릉도 출장보고서인 '한국 울릉도사정'에 역시 한인이 독도를 부르는 호칭이 생략된 채 리앙꼬도(リアンコ島)라는 서양식 명칭으로 독도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보통 이상의 자료를 들어 당시 한국에는 독도에 대한 특정한 명칭이 없어 일본인이 사용했던 이름(정확히는 서양의 독도 명칭)을 함께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돌섬(石島)은 돌이 많은 섬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섬의 특정한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인이 울릉도민에게 당시 독도의 호칭을 문의해 봤다면, 울릉도 현지인은 그 섬이 '돌섬'으로 특별한 이름이 없다고 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대한제국 칙령에서의 石島는 돌이 많은 돌섬(石島), 독도가 명확한 것이다. 아울러 '석도(돌섬)'에서 '독도'로의 명칭상 정착이 이루어진 시점에 대해서는 1903년에서 1904년 전후가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의하여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하나의 郡으로 독립시켜 울도군을 설치하면서 독도를 '石島'라 표기한 방식은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꾸르(Loancourt)호가 '독도'를 'Loancourt Rocks'라고 붙인 명명 방식과 유사하다. 서양인의 시각으로도 독도는 암석(Rocks) 으로서 이것을 울릉도 어민과 대한제국 관리의 방식으로 보면, 獨島=石島(돌섬)=Loancourt Rocks인 것이다. Loancourt Rocks를 일본식 발음으로 リヤンコールド(리앙꼬르도)岩이 되며, 이를 줄여 リヤンコ(리양꼬)島 혹은 ヤンコ(양꼬)島라고 불렀는데, 일본 역시 서양과 마찬가지로 '돌섬(石島)'이라는 의미로 독도를 호칭한 것이었다. 서양에서 독도를 처음 발견한 것은
1848년 4월 17일 미국의 포경선 체러키(Cherokee)號이며, 그 후 1849년
1월 27일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꼬르'號가 독도를 발견해, 이 배의 이름을
따서 Liancourt Rocks라 명명하여,
이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체러키號 船長 제이컴 L.클리블런드 1848년 4월 16일 일요일 이후 미국의 포경선
목테주마(Moctezuma)호가 1849년 3월 2일, 3월 9일 울릉도와 함께 pinnacle
rock을 보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독도의 정상이 뾰족한
형상을 하고 있기에 pinnacle rock 즉 첨탐岩이라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1853년 4월 18일 헨리 닐랜드(Henry Kneeland)호는 1853년 4월 18일 울릉도와 seal rock를 보았으며, seal rock에 상륙하여 물개 7마리를 잡았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seal rock 즉 물개바위는 바로 독도를 가리키며, 독도에서 잡았다는 seal(물개)은 강치(海驢)일 것이다. 1857년 3월 27일 Plorida호는 Dagelet rock(울릉암)을 보았다고 했으며, 4월 7일에는 '울릉도와 울릉암의 중간쯤에 배가 있었는데, 모두 보았다'라고 기록했다. 여기에서 Dagelet rock(울릉암)은 바로 독도로서, 이를 통해 이들이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상 서양자료; 한수당 연구자료집 제361권에서 발췌) 이상과 같이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독도는 바위로 이루어진 섬이었다. 이를 한국어로 풀이하면 '돌섬' 즉 '石島'인 것이다. 이런 서양의 독도에 대한 기록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의 石島가 독도라는 또 하나의 증명이 될 것이며, 이해 상대국인 일본에서조차도 당시 독도를 바위섬(리앙꼬르도岩)으로 호칭했다는 점에서 石島가 독도가 아니라는 주장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1882년 이규원이 울릉도검찰사로 임명되어 울릉도를 실사하여 고종황제에게 올린 울릉도외도(鬱陵島外圖)를 보면 울릉도의 근방에는 竹島, 도항(島項)의 두 이름이 섬으로 보고되고 그 외는 암(巖)이라는 암초(岩礁)로 취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는 울도(鬱島)의 구역으로 "울릉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한다"고 공표하고 있다. 칙령 제41호에서는 죽도(竹島)라는 명칭이 이미 등장한다. 그러므로 석도가 죽도(竹島)가 될 수는 없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주위바다에는 섬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으로 죽도, 관음도, 독도의 3섬 이외에는 없으므로 칙령에서의 석도(石島)는 '관음도'나 '독도' 두 섬 중 한 섬이다.
'울릉도외도'를 보면 관음도(觀音島)는 그 당시, 도항(島項)이라는 이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거의 동시기 일본 측 기록을 살펴보자. 일본에서는 막부정권이 붕괴되고 메이지(明治)유신정권이 수립됨과 동시에 정한론(征韓論)과 대외침략이 고취되자, 한국인 출어자(出漁者)·도선자(渡船者)들 틈에서, 울릉도에 밀입하여 삼림(森林)을 벌채(伐埰)해서 본국에 실어가 판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도 나타나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이 1881년 5월 울릉도를
수토(搜討)하던 조사관원에게 적발되어
강원도관찰사를 통해서 중앙정부에 보고되었고, 그
대책의 하나로 1882년 4월, 울릉도 방수(防守)를 위해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검찰사(鬱陵島檢察使)로 임명하여 현지에
파견해서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이에 조선조정에서는
울릉도에 침입한 사건에 대해 일본정부에 항의공문을 보내게 되었으며,
일본이 이를 받아들여, 1883년 울릉도 체류 일본인 전원을 귀국시키고자 일본 내무성 직원 및 20여 명의 순사를 울릉도에 파견하였다.
위
지도는 이때 울릉도에 파견 나온 히가키 내무 소서기관의 보고서(朝鮮國蔚陵島出張檜垣內務少書記官復命ノ件)에
수록된 울릉도 지도로 이 지도에 역시 관음도는 도항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관음도에는 특정된 명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흔적은 1906년 독도를 시찰했던 오쿠하라 헤키운의 죽도급울릉도(독도 및 울릉도, 1907) 수록 '울릉도 지도'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관음기(觀音崎)가 관음도를 직적접으로 지칭하는 섬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관음도는 "바다쪽으로 좁고 길게 뻗어나온 육지의 한 부분"을 지칭하는 곶(岬, cape)과 이어진 섬으로써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관음도는 울릉도에 근접한 섬이다.
이렇게 볼때,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상 관음도는 울릉전도(鬱陵全島)에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처럼 19세기 말 관음도는 울릉도민 사이에서 島項(섬목)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울릉도 개척 당시의 울릉도민은 관음도를 깍새가 많이 산다 하여 '깍새섬'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였고, 깍새섬이라는 한글 명칭은 현재에까지도 쓰이고 있다. 이렇듯 관음도에는 한자식 명칭과 순수 한글 명칭이 모두 존재했던 섬이다. 따라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이름 없는 돌투성이의 섬을 가리키는 石島(돌섬)라는 명칭으로 쓰일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당시 한국인은 관음도를 섬목과 이어진 섬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 칙령에 따로 그 이름을 거론할 필요도 없던 섬인 것이다.
관음도는 돌섬(石島)이라 불리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섬이다. 사방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빼고는 섬 전체가 풀과 나무로 덮여있어, '돌이 많은 섬'이라는 의미의 돌섬(石島)으로 불리운 사례도 없다.
관음도는 독도 동·서도 전체면적(0.186㎢)의 약 40%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자그마한 섬이다. 면적 0.0714㎢, 높이 약 100m, 둘레 약 800m이다. 울릉도 저동항에서는 5km, 섬목으로부터는 100m 떨어져 있다. 형태가 사람의 왼쪽 발바닥 모양과 비슷하며, 울릉도 3대 절경중 하나이다. 관음쌍굴이라고 하는 높이 14m의 해식동굴(海蝕洞窟) 2개가 있는데,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먹으면 장수한다는 설이 전해진다. 관음도가 돌섬이라고 불린 적이 없는데,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관음도의 당시 명칭을 배제하고 갑자기 石島(돌섬)라고 이름했을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관음도(觀音島)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석도(石島)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규원이 고종황제에게 올린 울릉도 검찰 계본초[鬱陵島 檢察
啓本草, 光緖
8년(1882
고종 19)]에서도 확인된다.
5월 13일의 보고에 이규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글에서 松島, 竹島, 于山島를 우리나라 백성이 모두 근방의 작은 섬, 즉, 한반도에 딸린 부속도서로서 인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松島, 竹島, 于山島 세 섬을 모두 한국령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더불어 울릉도 주위에 별도로 큰 섬이 존재하지 않아 울릉도를 옛 명칭인 '于山島'라 칭하는 것은, 제주도를 옛 명칭인 탐라(耽羅, 조선초기까지 이 명칭으로 제주도를 호칭함)로 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규원 자신은 울릉도 검찰을 위해 고종황제와 대면하였던, 1882년 4월 7일 고종황제에게 우산도(芋山島)는 바로 울릉도(鬱陵島)이며, 여기서 2,30리 떨어진 곳의 섬을 松竹島(댓섬인 죽도)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울릉도 검찰에 임해 이규원의 이러한 실언이 분명하게 바로 잡혔다. 이규원은 울릉도 실사를 개시한 이후, 줄곧 松島는 울릉도, 竹島는 현재의 죽도(Jukdo), 관음도는 '도항(島項)'이라는 섬으로 기록하였다. 울릉도 검찰 계본초 5월 13일자 보고에서 중요한 것은 이규원이 울릉도와 그 주위의 대표적인 섬을 열거하면서, 島項이라 기술된 관음도는 따로 호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울릉도를 대표하는 부속 섬으로 죽도와 우산도 두 섬만을 언급함으로써, 관음도는 죽도와 우산도 두 섬에 비해 그 중요도가 크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의 石島가 우산도인 독도가 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한국 역사속에서 울릉도에 부속한 대표적인 섬으로 언급된 것은 우산도였다. 간혹 울릉도에 파견된 수토관들이 울릉도에서 독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옛 문헌이나 지도상의 우산도(于山島)를 울릉도 북동쪽의 죽도(Jukdo)로 착각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위 이규원의 울릉도 검찰 계본초에서는 우산도와 죽도를 다른 섬으로 열거하여, 우산도가 죽도가 아닌 독도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황성신문 1899년 9월 23일자 기사이며, 일본측 기록으로 '조선개화사'를 들 수있다.
현지사정에 어두었던 반면, 문헌과 손쉽게 접할 수 있었던 중앙(서울)의 관료들은 울릉도 개척이 상당히 진척된 19세기말까지도 독도를 우산도(于山島)라고 부르고 있었다. 광무 3년(1899) 9월 23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전면에「별보(別報)」로 울릉도의 역사와 라뽀떼의 울릉도 시찰을 기사화하고 있는데, 그 첫 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울릉도 근처에는 6개의 섬이 있으며, 그중 가장 큰 섬이 죽도와 우산도(于山島)라는 조사내용이다. 실제, 죽도가 가장 크며, 다음으로 큰 섬이 독도임을 고려하면, 우산도가 독도인 것이 명백하며, 칙령 제41호에서의 石島(석도) 또한 울릉도 부속도서중 가장 중요시했던 두 섬중 하나로, 석도(石島)가 우산도(于山島)인 독도라는 사실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규원의 울릉도 조사 보고서는 울릉도 개척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발하는데 우용정의 보고서와 더불어 그 기초자료로 활용되었다. '석도(石島)'는 '독도'로서, 대한제국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임을 뚜렷이 인식해, 칙령 제41호로 일본보다 5년 앞서, 우리의 영토로 공표한 것이다.
1906년 3월, 울릉군수 심흥택은 일본의
독도 영토편입에 대한 통고를 받고, 급히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 때, 심흥택은 본군소속 독도(本郡所屬 獨島)라고 하여, 독도가 울릉도(울도)에
속한 섬임을 밝혔다. 이 보고서를 접한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일본 측이 독도가 일본영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에 속하니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령하였다. 울도군수 심흥택으로부터 중앙정부, 그리고 언론과 민간의 이와 같은 일련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1906년 당시 대한제국이 독도를 행정구역상 울릉도에 소속된 섬으로써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심흥택의 보고서가 나오기 이전에 울릉도 주위의 영토경계를 공표한 것은 대한제국 칙령 제41호가 유일하다. 1906년 남면과 북면 이외에 서면(西面)이 새로 신설되었으며, 칙령 제47호로 경상남도에 편재되었으나 이 행정조치는 9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독도가 포함되었음이 증명된다고 할 것이다.1906년 지방행정 구역을 정리하면서 남면의 남양,석문,통구미,남서,구암의 5개동과 북면의 태하,학포의 2개동을 병합하여 서면을 새로 설치하였으며,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앞서 竹島(Jukdo)가 언급되었으므로,
칙령상 石島는 관음도나 독도가 될 수밖에 없고, 울릉도에서 약 87km떨어진 독도를 칙령에서 제외하고, 울릉도에
거의 붙어있다시피한 관음도를 따로 기술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관음도는 따로 언급을
하지 않아도 당연히 울릉도에 딸린 섬인 것이다. (국어학자 고 방종현 교수의 '독도의 하루) 석도와 관련하여 국어학자인 고(故) 방종현(方鐘鉉)교수는 1947년 8월에 독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기행문 '독도(獨島)의 하루'를 '경성대학(京城大學) 예과신문(豫科新聞)'에 기고하였는데, 이 기록은 아직 한일간 독도영유권 분쟁이 본격화되기 전의 글로써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독도의 어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는 자료라 할 것이다.
(古色蒼然한 歷史的遺跡 鬱陵島를 찾어서 !) 울릉도·독도 학술조사시 학술조사단대장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직접 탐사하셨던 송석하(宋錫夏)선생님의 다음 글을 통해서도 石島가 곧 독섬으로 발음되었으며, 독섬이 현재의 독도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글은 1947년 8월 16일부터 8월 28일까지의 제1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파견이 있은 직후 쓰여진 글로, 당시까지도 독도는 '독섬'이라 호칭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어, 독도의 어원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상 石島(돌섬)는 독섬인 獨島임이 더욱 분명해 진다.
한일 역사속 울릉도와 독도는 부자섬 또는 형제섬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2섬 간의 관계는 독도(한국; 우산도, 일본;松島)만 따로 떼어, 문헌과 지도에 기록한 양국의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도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독도는 울릉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섬으로 독도와 울릉도는 하나의 운명체로 파악되어 왔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05년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를 불법편입하여 양국간 외교현안으로 등장하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1901년 주부산 일본 영사관의 '한국 울릉도사정' 제7 어업의 상황(漁業ノ狀況)에서 독도를 언급하고 있는데, 독도에는 물이 부족해 4.5일이 지나면 본도(울릉도)로 돌아온다고 기록하였다. 독도는 울릉도가 아니라면, 어업에 단독으로 이용하기에 어려웠으므로 독도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섬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같은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기록중 하나가 야우에몽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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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가 이미 대한제국에서 그 영토로 공표한 섬인 것을 일본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에서 독도를 편입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마키 보쿠신(牧朴眞) 농상무성 수산국장과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 외무성 정무국장이 서문을 쓴 한해통어지침 및 최신 한국실업지침에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기술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리앙꼬島 영토편입원을 냈던 '나카이 요사부로' 자신까지도 본래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 믿고 독도 이용 청원을 대한제국 정부에 내려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이 당시 일본 민관 모두가 독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여기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것은 대한제국이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한 섬으로 공표한 것을 일본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울릉도 주위의 섬을 특정하는 유일한 행정조치인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독도(石島)가 포함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石島는 독도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자서전)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지고 1883년 4월 울릉도에 들어간 고(故) 홍재현 옹은 한국산악회의 제1차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의 안내를 맡은 인물로, 생전에 손자인 홍순칠 대장에게 "옛날 책에는 우산도 또는 석도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에 가서 보니 섬이 돌로 되어 있어서 그 섬을 돌섬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다. 독섬(돌섬)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 그 의미를 담은 경우 石島로, 그 소리를 취한 경우 獨島가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의 石島는 명칭상 고찰을 통해서도 기타 자료를 통해서도 현재의 독도임은 명백하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관음도는 울릉전도(鬱陵全島)에 포함되어 있으며, 따로 석도(石島)라는 명칭으로 애써 표기할 이유가 없다. 한국의 고지도나 기록 어디에도 관음도를 따로 언급한 자료는 없다. 울릉도 개척을 막 시작하던 시기의 이규원의 검찰일기와 울릉도 외도에서 처음 거론된 섬이며, 당시 도항(島名)이라는 특정된 도명(島名)으로 불리고 있었기에 석도(돌섬)라는 명칭을 붙일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관음도는 '돌섬(石島)'이 아니며, 또 그렇게 불린 적도 없다. 따라서, 일본의 시마네현 고시는 대한제국에서 이미 5년 전에 그 행정구역에 포함시킨 '독도'를 주인이 없는 무주지로 상정하여 일본영토에 편입한 국제법적으로 불법인 고시가 되는 것이다. (글
작성일자 ; 2007. 11. 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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