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이정보존
도쿄지하철노선도
웰컴투 인조이코리아
게시판공감의 전당 일본어 보기 목록 삭제
고조선의 역사(古朝鮮史)  |  전통 조회 388|공감 1
번호1700453|작성자KOREAburu70|작성시간 2008-05-21 14:38:00
TOP

고조선의 역사(古朝鮮史)

 

 

徐榮洙(檀國大學校 史學科 敎授)

 

 

Ⅰ. 머 리 말


 고조선은 세계의 유수한 고대 문명국가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阿斯達’로 불리어진 城邑國家로부터 출발하여 중국의 統一帝國과 정면으로 맞섰던 ‘大古朝鮮王國’ 시대로 발전한 생동하는 구체적인 실체이다. 다만 현재 고조선의 지표문화로 거론되는 비파형동검이나 미송리형토기의 경우 그 분포 범위가 넓고 지역적 성격이 달라 그것이 문화권인지 정치적 세력권인지의 문제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 강역의 크기와 범위는 지금부터의 연구에 달려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조선에 관한 문헌사료가 대부분  고조선과 중국과의 대외관계에 관한 사료이므로, 최근의 考古學的 조사와 연구성과를 염두에 두고 현존하는 대외관계 사료를 망라 재구성해 본다면, 역으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고조선의 중심위치나 강역 등 역사지리에 관한 문제는 물론 나아가 고조선이 주변세계에 대응해 국가를 형성,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보다 역동적인 고조선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국가형성기의 대외관계

 

  여기에서 우리는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시대구분의 필요성을 느낀다. 오늘날의 시대구분은 대체로 그 시대의 사회발전 단계에 의해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고조선의 사회발전 단계에 관한 구체적 자료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호칭에 대한 약간의 자료를 갖고 있다. 즉 고조선의 왕호가 시대에 따라 檀君王儉(하늘임금)→韓(한·칸)→王(중국식 왕호)으로 변천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君長號가 그 사회의 성격을 모두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으나, 고대사회의 경우 어느 정도는 그 사회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필자는 고조선사를 그 사회발전 단계에 따라 제정일치 시대의 君長이었던 단군왕검이 다스리던 城邑國家시대(檀君朝鮮)→韓으로 불리던 정치적 대군장이 지배하던 연맹왕국시대(韓朝鮮)→중국식 왕호를 쓰던 集權的 領域國家時代(大古朝鮮=고조선왕국)로 시대구분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서영수 1988).
  여기에서도 이러한 시대구분에 따라 고조선의 대외관계를 단군조선, 한조선, 고조선왕국 전기, 고조선왕국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檀君朝鮮의 대외관계와 중심위치

 

  檀君朝鮮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라는 사실은 누구든지 인정하는 터이나, 우리는 단군조선의 성립시기나 위치 및 국가의 성격에 대하여 명쾌한 설명을 할만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ꡔ三國遺事ꡕ에 실려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재음미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箕子의 東來와 단군조선이 여러차례 도읍을 옮기고 있다는 사실이 그 것이다. ꡔ삼국유사ꡕ에 인용된 「古記」에는

 

“檀君王儉이 唐高(堯)가 즉위한지 50년인 경인년에 平壤城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이후 白岳山 阿斯達로 도읍을 옮겨…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周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藏唐京으로 옮겼으나 나중에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山神이 되었다.”
 ꡔ三國遺事ꡕ권1, 紀異편 「고조선」.

 

고 하였으며, ꡔ帝王韻紀ꡕ에도

 

“殷나라 武丁 8년에 단군이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
 ꡔ제왕운기ꡕ 卷下 「후조선」.

 

는 기록이 보인다.

 

 ꡔ三國遺事ꡕ와 ꡔ帝王韻紀ꡕ의 기록으로 보아 단군조선의 도읍 이동은 하천의 범람 때문이라기 보다는 箕子를 비롯한 殷周세력의 東進등 주변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ꡔ삼국유사ꡕ에 인용된 「古記」의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은 물론 중국사료를 인용한 것이지만 중국측 기록과는 달리 기자의 동래에도 불구하고 단군이 죽지않고 藏唐京으로 옮겼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고고학상 단군조선이 존재하였던 시기 遼河유역의 청동기 문화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고대문화와 직접적인 계승관계에 있는 內蒙古에서 河北을 거쳐 遼東에 이르는 광의의 요하유역문화권은 지역적 성격상 다양한 종류의 문화가 교차하고 있으나, 대표적인 초기청동기 문화는 紅山문화에서 小河沿문화를 거쳐 발전된 夏家店하층문화로 赤峰지대는 B.C.2400년, 요서의 豊下문화는 B.C.1700년, 요동지역은 B.C.1500년경에 청동기시대로 진입하는 농경민의 정착문화이다. 현재 이 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견해는 엇갈려 있어 정설이 없으나, 고조선의 배경문화와 관련하여 보다 정밀한 검토가 요망된다.
  B.C.12-11세기에 들어오면서 遼寧지역에는 은주청동기문화가 燕山을 거쳐 大凌河유역으로 확산된다. 특히,대릉하 상류의 喀左縣 등지에서 箕侯方鼎을 비롯한 은대의 銅器가 위영자문화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를 기자의 동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하가점문화와는 달리 그 문화층이 매우 엷고 문화의 범위도 요하를 넘지 못하는 한정된 지역의 문화로 곧 하가점 상층문화와 요녕지역의 琵琶型동검 문화에 압도됨을 알 수 있다. 기자국을 상징하는 기후동기도 이후에는 주로 중국내지인 山東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것도 대부분 춘추시대 말기에는 소멸된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문화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이주한 은주세력이 요하선을 경계로 토착세력에 저지되어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시 요하이동의 토착세력으로 비정되는 주민집단중 가장 이른 시기에 등장하는 종족은 朝鮮 및 肅愼인데, 현존하는 문헌사료에 의하는 한 단군조선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문화층이 엷다는 것은 이 지역에 진출한 세력의 존속기간이 짧다는 것을 의미하며, 기후동기가 기자국의 상징이라면 이러한 기자국은 결국 토착세력에 밀려 중국내지로 후퇴하여 늦어도 춘추말기에는 소멸 하였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검토한 사실을 종합하면 은주교체기에 기자를 비롯한 은족의 일부가 연산에서 대릉하유역 일대로 진출하여 일시간 존속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래지않아 단군조선을 비롯한 토착세력의 강력한 저지를 받아 결국 중국내지로 후퇴하여 중국의 다른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늦어도 춘추에서 전국으로의 이행기에는 소멸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대릉하 유역에 기자국이 실재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이것이 곧 단군조선을 대체한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古記」의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바로 기자국의 소멸 이후에도 단군조선이 존속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군조선에 관한 거의 유일한 문헌사료라고 할 수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재음미해 보면, 檀君王儉이 다스리던 아사달 사회는 신석기문화 전통을 강하게 지닌 초기 청동기사회이며, 부족연맹 형태를 띤 일종의 神政國家로 이해된다. 이와같은 초기국가의 성립연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로 과거에는 단군조선의 중심을 대동강유역에 둔 결과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상한선이 B.C.10세기를 넘지 못하였던 까닭에 단군신화에 반영된 고조선의 建國紀年을 입증하지 못하였다.
  최근에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를 요하유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면서 어느정도 단군조선의 성립년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가점하층문화 자체를 고조선문화로 보아 단군조선의 건국년대를 소급해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어(한창균 1992) 주목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하가점하층문화의 경우 그 성격이나 담당주민의 族源이 분명치 않아 그 문화권의 범위 모두를 고조선의 정치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이러한 문화가 단군조선의 국가형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요서지역의 경우 홍산문화 말기에 이미 神殿건축이 나타나며, 이를 계승한 하가점하층문화 초기에는 ‘古文化古城古國’ 단계로 진입한다(蘇秉琦 1986).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요동지역에도 하가점문화와 병행하여 청동기문화가 개화되는 B.C.1500년기에는 도시국가형태의 초기국가가 출현하였으리라 생각되며, 단군조선의 건국연대도 보다 정밀하게 재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대외관계사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재해석해 보면, 고조선 중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은 홍산문화에서 발전된 하가점하층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요하중류역의 특정한 지역, 즉 후대에 조선이라 불리워진 ‘아사달’을 중심으로 이른 시기부터 신정국가적 성격을 지닌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는 데, B.C.1100년을 전후하여 기자를 비롯한 은주세력이 대릉하유역에 등장함에 따라 이들과 대립 항쟁하면서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으나, 은주세력의 동진을 요하선에서 저지하고 기자국의 소멸이후에는 다시 고토인 아사달로 돌아와 존속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요하유역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고조선 사회가 중원의 선진문명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고조선의 성장 모습을 엿볼 수 있었으며 이로부터 막연하기만 하였던 고조선의 건국기년에 관한 실마리도 어느정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2. 韓朝鮮의 영역과 대외관계

 

  고조선의 대중관계가 비교적 객관적인 문헌사료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기원전 9세기경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遼寧지역의 문화적 변동과 단군조선을 계승한 한조선의 등장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기원전 10-9세기에 이르면 요녕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은주청동기문화를 압도하는 하가점상층문화와 요녕비파형동검문화로 바뀌게 된다.(이강승 1979 ; 임병태 1991)이러한 현상이 하가점하층문화를 계승한 자생적 문화의 발전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민족이동의 여파로 인한 문화적 교체인지 속단할 수 없으나 보다 발전된 청동기 문화의 등장임은 분명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문헌사료에도 韓侯라는 명칭을 지닌 정치세력이 등장한다. B.C. 8~9세기경인 周 宣王대의 저작으로 알려진 ꡔ詩經ꡕ 「韓奕」편에 의하면 ’燕나라 근처에 예족과 맥족을 다스리는 韓侯가 있었다(김상기 1948)‘고 한다. 여기서의 韓이란 정치적 대군장을 의미하는 알타이어 한(汗)·칸(干)과 통하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중국인들이 이를 姓으로 오인하여 韓侯 또는 韓氏로 기록하였던 것이며, 후대에는 민족명칭으로 발전하였다(서영수 1992). 한후를 중국의 제후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許倬雲 1982), 시경의 내용으로 보아 고조선의 수장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단군이 제정일치시대의 군장 호칭임에 비해 한후는 보다 강력한 군주권을 표현한 명칭으로, 당시의 고조선은 檀君朝鮮이 檀君이란 君長 호칭에 의해 규정되는 바와 같이 韓朝鮮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조선의 등장이 요하선을 경계로 은주문화와 대립하던 단군조선의 요서 지역으로의 발전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민족이동의 여파로 인한 것인지 속단할 수 없으나, 이 시대의 지표문화인 비파형동검문화의 분포와 발전과정을 통하여 살펴보면, 이들은 남쪽으로는 은주문화와 서쪽으로는 유목민족인 카라스크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大凌河유역으로의 이동기에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늦어도 B.C.7세기경에는 조선지역에 정착하여 명실상부한 조선왕국으로 성장하여 이후 중국문헌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장호칭의 변화와 예맥을 함께 통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한조선은 도시국가 단계를 벗어나 연맹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주목되는 것은 ꡔ시경ꡕ의 내용에 당시의 한조선이 주및 연과 무역을 비롯한 외교적교섭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후대의 사료이긴 하지만 ꡔ逸周書ꡕ 「王會」편에도 이보다 앞서 周 成王대에 고조선의  구성 부족이었던 穢人의 來朝기사가 보인다( ꡔ일주서ꡕ 권7, 「왕회」 제59). 이러한 일련의 사료에 보이는 중원제국과의 외교적 교섭사실은 바로 비파형동검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조선의 국가적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Ⅲ. 고조선의 발전과 對中關係의 전개


  1. 古朝鮮王國과 齊의 무역관계

 

  고조선은 민족이동기부터 중국의 은, 주는 물론 북방 유목민족과 대립, 교섭하면서 국가를 형성, 발전하였으리라 추정되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현존하는 단편적인 문헌사료로는 그 전모를 살피기는 어렵다.
  춘추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고조선은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ꡔ管子ꡕ를 비롯한 ꡔ戰國策ꡕ·ꡔ山海經ꡕ 등 先秦時代의 문헌에는 단편적이긴 하지만 종래와는 달리 국가로서의 조선의 명칭과 위치에 관한 기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고조선의 발전에 따른 중국과의 교섭이 활발해진 결과라고 생각된다.
  특히 기원전 7세기경의 사실을 전하는 관자에는 ‘朝鮮’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올 뿐만아니라, 조선의 문피를 7대 교역품으로 들고있으며, 朝鮮의 특산물인 무늬있는 짐승가죽(文皮)과 털옷을 후한 값으로 사준다면 팔천리 떨어진 조선이라도 來朝할 것이라고 하여, 고조선이 제와 호피 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후대이긴 하지만 ꡔ사기ꡕ 「貨食列傳」에도 연이 진번, 조선 등과 교역함으로써 무역의 이익을 얻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고조선 지역에 명도전, 일화전, 포전 등 다량의 중국화폐가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리순진, 장주협 1973) 당시의 고조선이 연, 제 등과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하여 활발한 교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요녕의 비파형동검문화에서 중원의 농경문화나 산동지역의 동이계의 문화와 빈번한 접촉을 한 현상들이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문화교류가 흔히 생각하듯이 중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문화유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동북부에서 나오는 지석묘나 하북일대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 등은 요녕지역보다 시기적으로 후대의 것으로 이는 고조선의 중원과의 무역 등 교섭의 결과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서영수 1992)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하여 원거리 교역을 빈번하게 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고조선이 이미 진전된 왕국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 고조선왕국의 발전과 對 周燕外交의 성격

 

  무역을 비롯한 평화적 교섭관계를 유지하던 고조선과 중원제국과의 관계는 동북아에 철기문화가 확산되는 전국시대에 들어가면서 첨예한 대립관계로 전환되었다. ꡔ위략ꡕ에 의하면

 

  “연이 칭왕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大夫 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
   ꡔ三國志ꡕ 卷30, 「魏書東夷傳」 「韓傳」 所引 ꡔ魏略ꡕ “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燕止之, 不攻.”

 

고 한다. 주왕실을 받들기 위해 연을 치려고 했다는 것은 화이관에 의한 후대의 사료적 윤색이라 할 것이지만, 여기에서 고조선이 전국 7웅의 하나인 연과 각축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왕실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이러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강역범위가 어느 정도 들어나게 되며 고조선의 대외 교섭도 보다 활발히 전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대륙정세는 전국 7웅이 상호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막북의 匈奴와 東胡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중원을 압박하는 국면이 전개되었으며, 동방에는 부여, 진번 등의 새로운 국가가 출현하기 시작함을 알 수 있는데, 고조선은 이러한 동북아의 국제정세속에서 중원제국과 치열한 항쟁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Ⅳ. 古朝鮮의 移動과 對中關係의 변모


  1. 對燕戰爭과 古朝鮮의 中心地移動

 

  고조선과 대립하고 있던 연의 동방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연의 전성기인 昭王때(B.C. 311~279)이다. ꡔ사기ꡕ 「조선전」에는

 

  “燕나라의 전성기에 처음으로 眞番·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障塞(長城과 要塞)를 쌓았다.”
  ꡔ史記ꡕ 卷115, 「朝鮮傳」 第55 “自是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障塞.”

 

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관련된 ꡔ사기ꡕ와 ꡔ위략ꡕ의 고조선 관계기사를 종합해보면, 연은 장군 秦開를 파견하여 동쪽으로 東胡와 朝鮮을 치고 2천리의 땅을 개척하여 上谷, 魚陽, 右北平, 遼西, 遼東의 5군을 설치하였으며, 조선과는 滿番汗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ꡔ사기ꡕ와 ꡔ위략ꡕ의 기록이 서로 달라 논란을 불러 왔으나, ꡔ鹽鐵論ꡕ의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천리 바깥으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
 ꡔ鹽鐵論ꡕ 권8, 「伐攻篇」 제45 “燕襲走東胡僻地千里, 度遼東而攻朝鮮.”

 

라는 기록이 이러한 의문을 해결해 준다. 즉, 고조선이 연에게 상실한 영토는  燕이 東胡로부터 획득한 땅 一千里를 제외한 지역이며, 당시 동호와 조선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대체로 연이 개척한 五郡중 요서와 요동 二郡에 해당되는 지역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滿番汗은 조선과 연의 국경으로 그 위치 비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만번한이 연의 동방진출 당시의 지명이 아니라 漢의 요동식민이 본격화된 후대의 지명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ꡔ위략ꡕ과 ꡔ염철론ꡕ의 기록을 ꡔ사기ꡕ 「조선전」 기사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만번한은 연의 장새밖의 자연계선을 의미하며,ꡔ漢書ꡕ 地理志의 요동군의 속현인 汶縣과 番汗縣에 해당한다. 문현이 요동의 千山山脈 서남쪽의 지명인 것으로 보아 번한현도 이와 관련된 지명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서영수 1988 ; 노태돈 1990) 결국 고조선은 연에게 패하여 千山에 이르는 서쪽 땅 1천리를 상실하였으나,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유일한 자연계선인 천산산맥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ꡔ사기ꡕ 「조선전」의 燕이 복속시켰다는 朝鮮은 古朝鮮 전체가 아니라 고조선 영토의 일부임을 알 수 있으며, 이로부터 거꾸로 추정하면 B.C. 3세기 이전 고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 대릉하 유역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고조선은 대동강유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對秦關係와 遼東郡

 

  대동강유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만번한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던 고조선은 연을 멸하고 요동에 진출한 진의 통일세력과 마주치게 되었다.ꡔ사기ꡕ에는 진의 동방진출에 대해

 

  “진이 연을 멸한뒤(연이 공취한 진번과 조선의 고토를 새로 건설한)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滿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요새를 나와 浿水를 건너 진의 옛 空地 上下障에 살았다.”
 ꡔ史記ꡕ 권115, 「조선전」 55, “秦滅燕, 屬遼東外徼.---滿亡命,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고 모호하게 축약 기록한 까닭에 종래의 ꡔ사기ꡕ 해석은 오류를 빚게 되었다. ‘속요동외요’는 진이 고조선 전체를 소속시켰다는 뜻이 아니라 연의 장새가 설치된 朝鮮·眞番故地를 秦代에 새로이 개척한 요동외요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이 요동에 진출한 것은 연의 수도 薊를 공략한 4년 뒤인 B.C. 222년의 일인 데,ꡔ염철론ꡕ의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 동쪽으로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
ꡔ염철론ꡕ 권8, 「誅秦」 제44 “秦旣幷天下, 東絶沛水, 幷滅朝鮮.”

 

고 한 기록으로 보아 진은 BC. 222년 같은 해에 연의 요동과 고조선을 동시에 친 것이 아니라, B.C.221년 제를 멸하여 천하를 완전히 통일한 뒤 이미 점령한 연의 요동에서 국경선인 패수를 넘어 고조선을 친 것이다. 따라서, 진이 요동외요를 건설한 해는 B.C. 221년 이후이며, 여기에서 진이 연보다 후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조선지역으로 더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이 요동외요를 건설한 목적도 단순히 연의 고지를 소속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연의 요동과 진이 새로 획득한 고조선의 서부영토를 함께 관할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건설된 진의 요동외요는 이후 중국의 요동 식민의 거점이 된 지역으로 새가 동북의 요새임에 반해서 요는 서남의 요새를 가리킨다는 점으로 보아 후대의 遼東郡治인 襄平(요양)이 아닌가 생각되며, ꡔ史記ꡕ에는 ‘燕의 장성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렀으며, 장군 몽염을 시켜 쌓은 진 장성은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여리에 이르렀다.’고 하여(「흉노열전」), 연진 장성의 동단이 모두 오늘의 요양에 이르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양평은 최근에 발견된 연 장성의 방향과도 다르며, 이미 지적한 바와같이 「조선전」에는 연의 동방진출 지역을 ‘장새’ 또는 ‘요동고새’ 등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점으로 보아 연대에는 아직 요동군의 중심지로서의 양평이 본격적으로 개척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사마천이 연장성의 동단을 양평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진·한대의 지리적 관점에서 모호한 ‘장새’ 등의 표현 대신에 구체적인 지명을 사용한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해된다. 

  ‘진이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을 멸하였다’고 한 ꡔ염철론ꡕ의 기사는 물론 과장이라고 할 것이지만, 진의 요동진출이 고조선에 큰 위협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ꡔ위략ꡕ에 의하면 당시 고조선의 否王은 진의 습격을 두려워 하여 복속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중원의 통일제국 진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끝내 朝會에 응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고조선의 국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도 이러한 고조선에 대하여 더 이상의 침략을 포기하고 고조선으로부터 새로 빼앗은 땅에 ꡔ사기ꡕ의 표현대로 이중의 요새를 쌓아 고조선의 반격에 대비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평양에서 출토된 秦戈도 진의 일방적인 침략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이와같은 당시 고조선과 진의 치열한 항쟁의 소산물로 보인다.
  다만, 고조선은 이러한 과정에서 연과의 경계선인 만번한 즉, 沛水線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후퇴지역은 ꡔ사기ꡕ 「진시황본기」의 ‘땅이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조선과 접하였다.’는 기록과 한초에 ‘浿水를 건너 망명하여 진의 옛 땅인 上下障에 거주하던 위만에게 준왕이 100리의 땅을 봉해 주고 고조선의 서변을 지키게 하였다.’는 ꡔ위략ꡕ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고조선이 진에게 상실한 영역은 대체로 만번한, 즉 천산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땅으로 보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3. 古朝鮮의 遼東수복과 對漢關係

 

  진의 요동진출에 따라 고조선은 연과의 경계였던 만번한 이동의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압록강선으로 후퇴하여 진에 대한 유화 외교정책을 구사했으나, 진한의 교체와 흉노의 등장에 따른 대륙정세를 이용하여 요동의 고토 일부를 수복하고 다시 對漢 강경외교책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ꡔ史記ꡕ에는

 

  “한이 건국하여서는 그 곳(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故塞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 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漢 후국)에 소속시켰다.”
 ꡔ史記ꡕ 권115, 「朝鮮傳」 “漢興,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라고 하여 한초에 진대에 점령하였던 고조선 지역이 거리가 멀어 연(전국시대)이 설치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에 이르는 지역만을 연 후국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문면 그대로 거리가 멀어 후퇴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의해 진대에 건설하였던 요동외요가 함락되었던 사실을 감추기 위한 중국적 표현에 불과하다. ꡔ염철론ꡕ의

 

  “조선이 徼( 秦의 요동외요)를 유린하고 연의 동쪽땅을 强取하였다.”
 ꡔ史記ꡕ 권115, 「朝鮮傳」 “漢興,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는 기록에서 고조선이 진한 교체기인 B.C. 208~202년 사이에 패수 동쪽에 진이 새로 설치한 국경요새인 요동외요를 유린하고 진에게 상실했던 패수이동의 땅 즉, 연(한 후국)의 동쪽 지역을 탈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흉노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하였던 건국초의 한으로서는 자연계선인 패수에 의지하여 옛(전국시대) 연의 영토를 지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 고조선은 패수를 경계로 한과 첨예한 대립관계로 들어가게 된다.
   沛水가 만번한에 인접한 요동지역의 강이고 조선이 진의 요동외요를 공략한 뒤 후퇴한 한제국과 浿水를 경계로 하였으므로 문제의 浿水 또한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 없는 데, 만번한이나 진의 요동외요의 위치로 보아 패수는 이에 인접한  소요수와 태자하가 만나는 小遼水 본류 즉, 오늘날의 渾河 하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한과 고조선은 연과 고조선의 국경이었던 만번한이 위치하였던 천산산맥과 병행하여 요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자연계선인 패수(소요수=혼하)를 경계로 한은 연이 설치한 요동고새에서 고조선은 진이 개척한 요동외요를 거점으로 서로 마주하며 팽팽한 대립관계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패수동쪽의 고토 일부를 수복함으로써 漢帝國과 대립하던 시기의 고조선사회에는 연,제,조로부터 유이민이 격증하여 동북아 국제정세의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요동지역의 정세변화를 틈타 전국말기부터 연의 고지에서 성장한 위만이 우세한 군사력으로 고조선을 병합함으로써 한국 고대사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위만조선이 한제국의 동진에 대응, 강온 양면의 외교를 적절히 구사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게 되자 한중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게 되었다.


Ⅴ. 맺 는 말

 

    1) 고조선중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은 홍산문화에서 발전된 하가점하층문화를 배경으로 하여 은주유민이 진출해오기 전에 이미 대릉하에서 요하~압록강에 이르는 요하유역 문화권내의 특정한 지역, 즉 후대에 조선이라 불리워진 ‘아사달’을 중심으로 이른시기부터 신정국가적 성격을 지닌 도시국가를 형성하였는 데, B.C. 1100년을 전후하여 기자를 비롯한 은주세력이 대릉하유역에 등장함에 따라 이들과 대립 항쟁하면서 도읍을 옮기기도 하였으나, 은주세력의 동진을 요하선에서 저지하고 기자국의 소멸이후에는 다시 고토인 아사달로 돌아와 존속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 B.C. 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단군조선은 요하유역문화권의 변화에 상응하여 비파형동검문화를 지표문화로 갖는 보다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이를 한조선으로 이해하였다. 군장호칭의 변화와 예맥을 함께 통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의 한조선은 도시국가 단계를 벗어나 연맹왕국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리라 추정하였으며, ꡔ일주서ꡕ ꡔ관자ꡕ 등의 기록을 통해 늦어도 B.C. 7세기경에는 고조선왕국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3) B.C. 7세기경 성립한 고조선왕국의 전기에는 중원의 제, 주, 연 등의 왕조와 호피, 비파형동검 등의 교역을 비롯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고조선왕국과 교섭하였던 주변 제민족과 국가의 위치를 고려하여 전성기 고조선의 강역이 대체로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大凌河유역에서 東胡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大同江 이남을 경계로 辰國과 이웃하며 북쪽과 동쪽으로는 예맥·부여·진번·임둔·숙신과 접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4) 동북아시아에 철기가 보급되는 고조선왕국 후기에 이르면 고조선은 연·진·한 등 중원제국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되는데, ꡔ사기ꡕ ꡔ염철론ꡕ ꡔ위략ꡕ의 기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과정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특히 ꡔ사기ꡕ의 고조선 관계기사에 대한 종래의 해석상 오류를 ꡔ염철론ꡕ의 기사와 비교하여 상세히 검토하였다. B.C. 4세기에 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고조선은 오늘날의 만번한으로 표현되는 천산에서 대릉하유역에 이르는 서쪽영토를 상실하고 진번과 함께 남하하여 그 중심지를 대동강유역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이어 통일제국 진이 등장하자 고조선은 진과의 전쟁에서 압록강이서로부터 요동반도에 걸친 영토를 재차 상실하였으나 진의 동진을 압록강선에서 저지하여 주권을 유지하였으며, 이후 흉노의 등장과 진한의 교체라는 동북아정세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용하여 한초에는 진에게 상실하였던 압록강이서의 실지를 회복하고 진이 설치한 요동외요를 공략하여 한제국과 패수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였음을 밝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그간 학계의 쟁점이 되어 왔던 고조선과 한과의 국경선인 ꡔ사기ꡕ의 패수 위치를 종래와는 달리 요동의 소요수(오늘의 혼하)임을 논증하였다.


    5) 끝으로 패수동쪽의 고토 일부를 수복함으로써 漢帝國과 대립하던 시기의 고조선사회에는 중국계 유이민이 격증하여 동북아정세의 변수로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세력을 토대로 한 우세한 군사력으로 고조선을 병합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위만조선의 건국자인 만왕의 출자를 종래의 이해와는 달리 연왕 노관의 부장이 아니라 전국말기부터 요동지역에서 성장한 정치세력임을 첨언하였다.

 


- 徐榮洙, <古朝鮮의 對外關係와 疆域의 變動> <<東洋學 第29輯(1999年 6月)>> 要約

 

IP xxx.46.xxx.202
스크랩하기
  harry504 |05-21 14:32
檀君王儉을 하늘임금이라고 읽는 데서 아래로 내려버렸다.
의견쓰기
이전 다음 목록 일본어 보기 삭제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공감
1700454 국제 사법 재판소??(심심한 의문) [22]KOREAnybil8808.05.217900
1700453 고조선의 역사(古朝鮮史) [1]KOREAburu7008.05.213871
1700452 북한 아사자 급증 [3]KOREAnida008.05.215651
즐거운 토론문화 정착을 위해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운영원칙보기] 필독 : 음악 저작권법 개정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