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민정음 언해본이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도움을 받아 원본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경상대 연구팀에 학술연구용역을 의뢰해 추진해 온 훈민정음 언해본 정본 디지털 제작 작업이 완료됐다고 16일 밝혔다. 문화재청 제공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일본말 잔재를 없애자'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다. 한글 사랑 운동을 하는 사람의 블로그 였는데, '가족' 이란 말은 일본말의 잔재이니 '식구'라는 우리말을 쓰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아주아주 네티즌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었다.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우리것을 되살리자는 운동은 지금까지 많이 있어왔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게 '어설픈 포퓰리즘'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 그 사람은 일본어와 한국어의 어휘,언어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순 우리말을 되살리고 이유도 없이 우리 삶에 파고든 외국어에서 유래된 어휘들을 다 고쳐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 사람은 현재 한국어 속의 일본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쉽게 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한국어 어휘의 80%가 한자어라는 말을 하는데 그 대부분이 바로 일본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주의, 청원, 교통, 박사, 윤리, 상상, 문명, 예술, 고전, 강의, 의학, 위생, 봉건, 작용, 전형,추상 ,철학 등의 단어들이 일본에서 온 것이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모든 것들을 바꾸자는 이야기인가? '가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에 '친일적 감정' 이 있어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가? 그건 아니다. 어휘란 필요에 의해 차용,도입,적용해서 쓰게 되는 것이지 '언어적 민족주의'에 의해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무리한 운동은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 라고 쓴다는 북한이나, 전시중에는 영어를 금지했던 일본 야구에서 스트라이크를 정구(正球) , 볼을 악구(悪球) 라고 하던 '국가정책적 언어지도' 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오라이,빠꾸,기스,테레비 같은 것에나 적용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이런 말들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가? 기자들도 하리코미,사츠마와리 같은 말을 아직도 쓴다는데 그런 것을 당장 고쳐야하는게 아닌가?

이런말을 하면 흔히 '친일파' '쪽발이'라는 소리를 듣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가족'을 '식구'라고 부르짖는 사람의 블로그 타이틀 자체가 'XXX 문화 연구소' 라는 일본어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허탈한 웃음만 나올 뿐이다.

일본식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본이 좋아서 라고 생각한다거나, 수 십년간 문제없이 잘 쓰고 있는 어휘들을 무리하게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착각이고 위험한 발상이다. 아쉬운 일이지만 일본식 어휘 없이 우리는 언어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에 와 있다. 하지만 그건 '언어적 자존심'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중국 공산당이 2차대전때 일본과 싸우면서 일본어휘 '공산당' 을 사용한게 창피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보다 더 염려해야 할 것은 새로운 개념,어휘를 무분별하게 직역해서 들여오거나 일본식으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만화,게임,애니메이션을 보면 그런 점이 두드러진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 것중 하나가 황해를 서해로 하자고 하는 주장이다. 이또한 네티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참 오버를 해도 징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가 Yellow sea라고 수백년동안 써 오던 것을 갑자기 west sea로 바꾸자? 한국이 세계의 중심인가? 동해와 일본해 문제는 '일본'이라는 특정국가의 이름이 걸려 있으니 껄끄럽다고하자. 하지만 '황해'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서해'라고 바꾸자며 세계를 돌아다니며 명칭변경을 운동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우리만 '서해'라고 부르면 될거 아닌가. 왜 그런 명칭을 세계에 강요하는가? 그리고 네티즌들은 그런 사람들을 애국자나 독립투사 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 지명인 '황해도'도 '서해도'로 부르고 한국의 서쪽바다 건너에 있는 중국을 '서양'이라 부르고, 동쪽 바다 건너에 있는 미국을 '동양' 이라고 불러야 하는거 아닌가? 왜 외국애들이 맘대로 정해버린 '서양' / '동양' 이란 말을 쓰는가?

한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단지 '중심'에 있고 싶어 할 뿐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