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로그인
컨텐츠

등록 : 2013.06.03 15:44 수정 : 2013.06.03 16:05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 소속 학생들이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극우주의 부활과 하시모토 유신회 대표의 위안부 왜곡 망언을 규탄한 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의 가면에 계란을 터뜨리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⑩
박근혜 정부, 일본 정치인들 망언에 항의·사죄 요구 않는 이유는?

님의 취임 100일을 닷새 앞둔 지난달 30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이런 공개질의서를 님에게 보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지적하며, 정부가 최소한의 항의 표명조차 하지 않고 사죄 등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일본 정부의 범죄성 발언을 제재할 의지와 계획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점잖지만, 문면엔 실망과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사실 님의 어정쩡한 태도를 보면 그분들의 태도가 충분히 이해됩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군 성노예 강제 동원을 부정하고, 침략과 병탄에 대해 반성은커녕 합리화시키려 했을 때도, 님은 의례적인 반응만 보였습니다. 하시모토 도루 일본유신회 대표가 “위안부는 필요했다”고 발언했을 때나, 유신회의 니시무라 신고 의원이 “일본에는 한국인 매춘부가 아직도 우글우글거린다”고 말했을 때도 님의 정부는 아무 소리도 안 했죠. 대꾸하면 오히려 저들의 기만 살려준다는 핑계를 댔나 본데, 미국은 바봅니까? 정부나 의회가 강력히 반발했고, 그 결과 아베 내각은 미국에 대해선 사과를 했죠. 가장 큰 고통을 당한 건 한국민이었는데 말입니다.

정대협이 질의서를 보낸 날 서울에선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교과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일제 지배와 독재 체제의 긍정성을 주장해온 한국현대사학회 관계자들과 뉴라이트 계열 사람들이 대거 모인 바람에 학술대회는 마치 우익 궐기대회와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이나 사관의 뿌리는 식민지근대화론입니다. 일제 병탄이 한반도 근대화의 계기가 됐고, 그때 실력을 기른 이들이 근대화의 역군이 되어 나라를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자원, 곡물, 노동력을 샅샅이 긁어가고, 심지어 우리의 누이들을 침략군의 성노리개로 끌고 갔으며, 결국 나라를 두 동강 낸 일제 병탄을 두고 그런 주장을 했으니, 뉴라이트란 게 요즘 막가는 일본 유신회의 한국 지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학계의 ‘일베’류에 해당할 겁니다.

식민지근대화론과 해방 후 현대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해방 후 친일파가 남한 단독정부의 주축이 되어 현대사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병탄 시즌 1’은 일제가 저질렀고, ‘시즌 2’는 일제 부역자들이 주도했습니다. 일제의 역할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만, 우리 사회의 주류로 군림해온 부역자들이 정통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우리의 보수 우익이 식민지근대화론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해방 후 일제 부역자들이 일제를 대신한 지배자로 나서자, 우리 사회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거센 저항을 억누르려는 과정에서 사사오입 개헌, 발췌 개헌 등 헌정 왜곡이 일어나고, 서북청년단과 땃벌떼 등 정치깡패들의 테러가 횡행했고, 안두희의 김구 선생 암살 등 공포정치가 자행되었습니다. 민간인 집단학살도 여기저기서 일어나고요. 그 핑계로 삼은 것이 빨갱이 처단이었는데, 국가를 팔고 동포를 수탈해 호의호식했던 이들이 다시 권력을 유지하는 데 전가보도였던 게 바로 빨갱이 색출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일정 수준의 민주화를 이루고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친일에, 독재와 인권 유린 등 민주주의 파괴 세력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으니, 이를 회피하지 않으면 정치권력에서 배제될 소지가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꾸며낸 것이 이른바 자랑스런 대한민국론입니다. 공산세력에 맞서 건국도 했고, 근대화도 이뤄,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 박정희는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하고요. 이명박 정부 때 광복절 대신 건국절을 도입하자고 떼를 썼던 까닭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런 집단이 총력을 기울여 뒤틀고 뒤집으려 한 게 역사 교과서였습니다. 엊그제 조선일보사 후원의 교과서 학술대회는 이를 위한 전진대회였지요.

대회가 열리기 얼마 전, 일본에선 집권 자민당이 교과서 출판사 사장들을 불러 ‘쪼인트’를 깠다고 합니다. 군 위안부 동원에 대해 강제성이 확인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얼마나 죽었는지 모르는 난징사건을 수십만명 혹은 십수만명이 희생된 난징대학살로 표현했는지 따졌다는 겁니다. 검정 심의를 거쳐야 할 교과서 출판사 입장에선 매우 강압적인 물음이었다고 합니다. 침략을 부인하고, 인권 유린과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저들의 정치적 의지를 교과서에 관철시키려는 압박이었습니다. 그래야 전범들의 새로운 장기 집권 토대가 마련되니까요.

이런 일본의 막가는 우익과 한국의 얼치기 우파 사이엔 같은 것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다른 점은 일본 우파가 철저하게 국수주의적인 반면 한국 우파는 나라 팔아 호의호식하려는 매판세력들이라는 점입니다. 같은 점은 일제의 지배가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시각입니다. 대통령님의 광팬이었던 한승조 전 고려대 교수는 일제의 병탄을 축복이라고 큰소리쳤고, 군 성노예 강제 동원은 어떤 전쟁 어디에서나 있던 일이라고 우겼습니다. 한씨는 물론 현대사학회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현존하는 한국의 우익은 그 뿌리를 19세기 중후반 일본 조정에서 확산되던 한반도 정벌론(정한론)에 두고 있습니다. 어찌 한국 우파는 하필 국권을 강탈했던 세력에 빌붙어 하수인 노릇을 여태껏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대협의 공개질의에 대해 님은 아직 답변이 없습니다. 시간이 필요한 일도 아닙니다. 일본 우파들의 주장에 대해선 ‘개소리’로 묵살하는 건 있을 수 있지만, 할머니들의 요구에 대해 그렇게 무시해선 안 될 것입니다. 민망하게도 유엔 고문방지위원회가 먼저 일본 정부에 강력히 경고했더군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무책임하게 발언한 정부 관계자에 대해 처벌하고, 정부 차원의 배상과 사과는 물론, 교과서에 이를 기술해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설마 우리 대통령보다 유엔 기구가 우리 국민을 더 생각하고, 정의의 실현을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침묵하는 님을 보면 만주군 제복의 아버지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책무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국민 주권을 지키며, 국권을 수호하는 일입니다. 국권을 침탈하고 국민을 노예로 삼았던 자와 한패로 놀거나, 국민주권과 인권 유린을 칭송하는 짓을 좌시하는 것은 헌법적 책무의 포기입니다. 좌파, 우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물음에 피하지 말고 성실하게 답하시기 바랍니다. 아베나 박근혜 대통령이나, 일본유신회나 한국 새누리당이나, 다를 게 뭔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한겨레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