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ソウル大教授 慰安婦の強制動員は無かった |
jap_av |
2011/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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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토지 수탈 등 없었다. 위안부의 강제 동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료가 없는 이야기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77687 오 마이 뉴스(한국어) 2006.12.4
안・볼지크소울 대학 명예 교수
2일 오후에 마포구의 신보수주의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안병직신보수주의 재단 이사장(70세, 서울 대학 명예 교수)은, 등산복 모습이었다.지난 달 30일의 교과서 포럼(상임 대표:박효종)에 의한 대안 교과서 심포지엄에서 4・19 혁명 동지 회원등에 멱살을 잡힐 수 있다고 하는 모욕을 받았지만, 큰 부상은 없음 그랬다.야스 교수는 최초로「물의를 빚어 국민에게 미안한」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진실을 말하고 폭행을 받는 이・욘 분 교수한국에서 진실을 말하고 폭행을 받는안・볼지크교수 <중략>
그러나 야스 교수는, 일제 식민 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하는 것으로, 한미 동맹에 의해서 한국이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 박정희 군사 정권의 경제 노력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표명했다.
우선 야스 교수는, 교과서 포럼의 대안 교과서가 일제 강점을 정당화 한 일본의「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주장과 닮아 있다라는 지적에 대해서, 「초안을 읽지 않기 때문에」와 일축 했다.또,「일제 시대, 토지 수탈은 없었다」로서「친일파『만드는 모임』와 생각이 같다, 라고 비판되어도, 나는(일제의 토지 수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없는」라고 말했다.
종군위안부의 기술을 떨어뜨리고 있다, 라든지, 항일 무장 독립 운동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 라고 하는 비난에 대해서도, 「현재의 역사의 중심 축으로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다」라고 말했다.또한, 「(일본 군대 위안부 문제 등을) 떨어뜨릴 수 없는」로서 하등의 형태로 대안 교과서에 실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만 야스 교수는, 일본군위안부에 관해서「모두 궁핍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부모가 궁핍하지 않으면, 어째서 자신의 딸(아가씨)를 팔거나 한 것일까」와 말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교수는, 「그런 사실(가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말고,『야마토놈이 무조건・강제적으로 잡아 데려 갔기 때문에 위안부가 된』라고 말하지만 , 그런 이야기는 거짓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하는 야스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Q.<중략>「조선 총독부의 토지 수탈은 사실상 없었다」라고 하는 내용이 있는 것 같지만.
A.「일본의『만드는 모임』가(스스로의 교과서로 토지 수탈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는 모른다.우리는 이미 1990년대에, 전국의 토지 조사 사업 문서를 거의 조사했다.토지 조사부, 분쟁지 서류, 토지 측량 관계서류, 지적도를 종합 검토한 결과, 『토지랭탈은 없었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객관적 결론이다.거기에 붙어 조금도 요동할 것은 없다.단지, 토지 수탈이 한 건이라도 없었는가 하는 (일)것은 모른다.」
<중략>
Q.현재의 위안부라고 하면 성 매매 여성인가.
A.「그렇다.뿌리는 어느쪽이나 같다.어느쪽이나 궁핍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부모가 궁핍하지 않으면, 어째서 자신의 딸(아가씨)를 팔거나 할까 보냐.」
<중략>
Q.성 매매와는 다른 문제가 아닌가? 위안부 강제 동원이 있던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볼 수 것은 아닌가.
A.「실제, (일제 시대에) 강제 동원은 많이 있었다.남성의 경우는 징용이나 징병, 여성의 경우는 정신대가 강제 동원되었다.그러나 위안부에게 대해서, 강제를 했는지 어떠했는지는( 아직 객관적으로는) 모른다.강제했다고 하는 자료를, 일본과 한국의 어디에서도 냈던 적은 없다.위안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증언 뿐이다.사학을 하는 인간은, 증언을 가지고 역사적인 자료와는 하지 않는다.참조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내가(위안부 강제 동원이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단지 자료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안병직교수 「위안부 업자의 반은 조선인 」 「일본에 사죄만 요구해 무엇이 될까 」 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52265(삭제가 끝난 상태) 데일리 소프(한국어) 2006.12.6 안병직교수가 텔레비젼 출연 … 「위안부 업자의 반은 조선인」「일본에 사죄만 요구해 무엇이 될까 」 ■교과서 포럼의 안병직, 「위안부는 자발적」망언으로 파문 최근 「4.19 학생 운동, 5.16혁명」파문을 일으켜 걸친 교과서 포럼의 여파가 아직도 완전히 식지 않은 안, 신보수주의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안병직(안・볼지크) 서울대명예 교수가 6일의 MBC TV 「뉴스 초점」에 출연하고, 일제 시대의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는 없고 토지 수탈도 없었다고 언명 하고, 다시 파문이 예상된다.
야스 교수는 또, 우리 나라가 일본의 성의있는 과거 청산을 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과거보다 향후의 한일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하고,「과거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라도,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행복한 조건을 과거에 침략한 사람이 내 준다면, 그것까지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라고 말했다.
야스 교수는 이 날의 인터뷰로, 위안부가 있던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면서도, 「문제는 강제 동원이다.강제 동원되었다고 하는 일부의 위안부 경험자의 증언은 있지만, 한일이라고도 객관적 자료는 하나도 없는」로서 위안부 동원의「자발성」를 강조했다.
기록이 없기 때문에라고 해 강제성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는 것은 실수가 아닌지, 라고 하는 사회자의 질문에 야스 교수는, 「군대 위안부나 일반 위안부의 생활은 비참 한이 없다.우리는 그것에 눈을 닫아서는 안 된다.한국에도 사창굴이라고 하는 위안부가 다수 있지만, 그러한 일을 잃기 위해서는, 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는지를 연구키안 된다.무조건 강제에 의해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와는 생각할 수 없는」 등과터무니 없는 대답을 했다.
야스 교수는 더욱, 위안부 업자 중 반은 조선인이었다고 하고, 「(당시 ) 조선인이 무슨 권력으로 강제적으로 동원했다는 것인가」라고 주장하거나 했다.
야스 교수는 단지, 군이 강제 동원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자신은 한국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와 공동으로 조사를 했다고 분명히 한 데다가,「3년 활동하고 나서 그만둔 이유는, 그들(정신대 대책협)의 목적이 위안부의 본질을 파악해 오늘의 비참한 위안부 현상을 방지하는 것은 아니고, 일본과 싸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그런 상태의 반일 운동이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라고 하는 의문으로부터 정신대 대책협과의 활동을 그만두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야스 교수는 또 일제 시대의 토지 수탈 문제에 대해서, 「공연인 토지 수탈은 없었던 것 같다.당시 , 국유지는 조선 왕실의 물건이었지만, 이것을 조선 총독부의 소유로 했다.랭탈이라고 하면 랭탈이지만, 랭탈이라고 하는 것보다 조선 왕실의 소유를 국가의 소유로 한 것이다」와 당시의 조선 총독부를 국가와 동일시 하는 발언을 하거나 했다.
야스 교수는 또,한일 양국이 선린의 파트너가 되려면 일본의 사죄가 필요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고, 「그러면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향후 어떤 관계를 가지면 우리의 역사적 과제가 잘 되가는지, 를 생각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야스 교수는 더욱, 「과거의 무엇이 나쁘게 무엇이 올발랐다를 꼬치꼬치 조사해도 현실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로서「우리가 협력하면 나라가 잘 되가는데,독도든지 야스쿠니든지 무슨 해결의 전망이 없는 것을 꺼내 몇 년도 언제나 싸움만 하고 있다.이런 일을 하지 말아라 라고 한다 」와 표명했다.
안볼지크"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는"또 망언 MBC에 항의 쇄도..."일본에 추방해라!"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457 미디어 오늘(한국어) 2006.12.7 "일제 시대의 공연인 토지 수탈은 없었다." "위안부 강제 동원했다고 하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위안부의 영업자의 반은 조선인이었다.그들이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 동원했는지요." "오늘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었던 기초를 과거에 침략한 사람이 해 주면 거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본 학자들이 한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 대표적인 학회 요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TV방송에 출연해 사양말고 한 이야기다.
안・볼지크뉴라이트 재단 이사장은 6일 MBC <뉴스 현장 > '뉴스 초점'코너에 출연해 팬・폰 엥커와의 인터뷰로 이와 같이 이야기했다.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환 엥커는 당혹해 하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고,인터뷰의 뒤에는 MBC 제작 스탭을 향해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격렬했다. 인터뷰 후, MBC에 항의 전화 쇄도 MBC 제작 스탭은"인터뷰 이후 수많은 항의 전화가 걸려왔다.제작 스탭에 대한 격려 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은'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역사를 지도할까'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최초부터 일본에 보내라'라고 하는 내용이었다"와 분명히 했다.
이 사카에훈(이・욘 분, 1951년 9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경제 사학자.서울 대학 경제학 교수・락성대 경제 연구소 소장.경제 사학회 회장・한국 고문서 학회 회장도 맡고 있었다.1985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있다.
안병직・이무등과 이씨 조선 시대부터 현대에 걸친 한국의 경제사를 연구하고 있다.특히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 경제의 연구로 알려져「일본에 의한 식민지 시대에 한국이 토지와 식량을 수탈 되었다고 하는 한국사 교과서의 저술은 왜곡된 것이다 」라고 하는 주장을 제기해,「우리가 식민지 시대에 대해 알고 있는 한국인의 집단적 기억은 많은 경우, 만들어진 것으로, 교육된 것이다」로 하고 있다.
가끔 한국에서는 식민지 지배를 긍정하는 식민지 근대화 논자・ 신친일파라고 비판되고 있다.
2004년 9월 2 일문화 방송의 100분 토론에 출연해"종군위안부가 조선 총독부의 강제 동원이 아니고 한국인의 자발적으로 참가 (로) 이루어진 상업적 공창"이라고 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것에 의해 일제 식민 통치를 칭찬해 위안부 할머니등을 모욕했다고 하는 논의에 휩쓸렸다. 이 교수는"정신대 관련 일본 자료를 보면 범죄 행위는 권력만 (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게 참가하는 많은 민간인등이 있었다"로서"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 업자 주인등으로 그 명부가 있는"이라고 주장해
(이)라고 종군위안부 문제를 매춘과 동일시 했다.이것에 의해 교수직 사임이 요구되어 학회 추방의 운동이 매스컴이나 반일 세력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일어나, 위기적 상황에 쫓아
붐비어진 이・욘 분은 이후 자신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가 되어, 더욱 매스컴 공개로 10분간이나 땅에 엎드려 조아림을 하게 해 40분간이나 위안부
할머니에 의한 큰 소리의 매도를 입다물고 들었다.
땅에 엎드려 조아림 당하는 이・욘 분 교수 2006
연 12월 1 히다카교생용《한국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로 4・19 혁명을《4・19 학생 운동》’로, 5・16 군사 정변을《5・16 혁명》’로 기술하고 논의를 불러
일으킨《교과서 포럼》의 심포지엄에서 4・19 민주 혁명회, 4・19 혁명 공로자회, 4・19 혁명 희생자 유족회 회원 30명 남짓에 폭행을 받았다.이
교과서는 2008년 3월 24 히나이용을 수정해 출판했다.이 교과서는 이・욘 분 이외에 파크・효젼등의 교수가 참가했다.
폭행을 받는 이・욘 분 교수 2008년 11월 25 일소 울시 교육청의"현대사 특강"으로 강사로 배분되었지만,"친일파 논의가 일어나자마자 배제되었다.
2007년 5월 25일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출판했다.소설 아리랑은 날조, 일제가 토지를 강탈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써 다시 또 강한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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