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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록거울> 일본의 '둔갑술'
김현희 씨와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 씨의 가족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가해자가 죄책감에서 손쉽게 벗어나는 방법은 뭘까? 묘안은 피해의식에 있다. 스스로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다음, 자신과 타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런 뒤엔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 피해자가 되는 데 성공한 가해자는 유리한 고지에서 상대방을 거리낌없이 공격할 수 있다. 둔갑술이 보여주는 신통력이다.

   11일 김현희 씨 기자회견을 보면서 쾌재 속에 쏠쏠한 실리를 챙긴 쪽은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북한의 납치문제를 최대한 부각시킴으로써 피해자로 변신하려 애써왔던 일본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침소봉대와 방향틀기의 달인들이다 싶다.

   납치문제만 나오면 일본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분기탱천한다. 오죽하면 한 영국 언론인이 "납치극에 대한 사안이라면 털끝 하나도 놓치지 않고 대중에게 알려온 일본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마치 강박증에라도 걸린 것 같다"고 비꼬았을까.

   일본이 납치문제에 국가적 명운을 거는 근래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때는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일본총리로는 최초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과거사를 사과하고 양국 화해를 이끌어내려는 자리였다.

   하지만 두 지도자의 목표와 계산은 달랐다. 북한에겐 일제 식민주의 기간의 범죄행위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받아내는 게 최대 현안이었다면, 일본에겐 북한 간첩선의 일본 영해침투와 일본인 납치사건의 의혹해명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식민통치기간에 끼친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시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일본인 13명을 납치하고 간첩선을 일본 영해에 보낸 데 대해 '통크게' 사과했다.

   김 위원장의 사과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파격이었다. 오랜 적대국에 상당한 양보를 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북한의 처지가 그만큼 긴박하고 일본의 도움이 절박함을 반증했다.

   역전극은 평양 발언 직후에 연출됐다. 김 위원장의 고백과 사과에 대해 일본 여론은 분노와 적대감으로 불타 올랐다. 관계 정상화는 고사하고 군사적으로 북한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고이즈미 총리도 귀국 후 '사람이나 납치하고 죽이는 불명예스러운 국가'라며 북한을 맹비난하며 이런 분위기에 적극 호응했다.

   언론의 조명이 연일 납치자 문제에 맞춰지면서 '가해자 일본'은 어느새 '피해자 일본'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물론 북한의 일본인 납치와 간첩선 파견은 범죄행위로 비판받아 마땅하나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중대죄과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슬쩍 묻어버리는 건 후안무치한 행위라고밖에 볼 수 없다.

   민망함을 참지 못했던지 한 일본인 평론가는 자국의 처신을 이렇게 비판하며 씁쓸해했다. "(일본은) 이웃 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토지와 이름, 언어, 촌락을 빼앗았다. 저항하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으며, 젊은 남성을 납치해 제국군을 위한 노동자나 군인으로 전장에 보내는 한편, 여성들은 '위안부'로 전장에 내보내어 수없이 목숨을 잃게 했다. 그 뒤 (일본의) 사죄나 보상은 없었다."
평양 발언 후 일본은 어떤 실속을 챙겼을까. 상황반전에 성공한 일본으로선 대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식민통치기간에 저지른 엄청난 숫자의 살해, 납치 등 잔혹행위에 대해 사죄나 보상을 할 필요가 자연스레 없어졌다.

   반면, 식민시대의 보상요구를 포기한 대가로 약 1조5천억엔(당시 미화 120억 달러)을 '원조금'으로 협상 테이블에 올리려 했던 북한으로선 꿩도 매도 다 놓쳤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범죄행위를 자인하는 모습을 목격한 북한에서 김 위원장의 체면이 손상됐을 건 말할 나위도 없다.

   태평양전쟁 때 한국인 전체와 한반도를 대상으로 저지른 반인륜적이고 반역사적인 중대범죄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십수 명의 납치에는 극악한 범죄라는 비난과 함께 보상을 외치는 일본의 두 얼굴에 대해 한국정부의 비판도 제기됐다.

   당시 한명숙 총리는 한 일본 신문 인터뷰에서 "(납치 피해자인) 요코타 메구미가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납치된 것과 같이 과거 아시아에서 일본에 강제동원된 사례가 많았다"며 "지금도 아시아에는 일본의 과거행위로 인해 수많은 '메구미'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정부의 요구에 따라 마련된 이번 김현희 기자회견 이벤트에 일본기자들이 대거 몰려든 건 뭘 말하고 있을까. 알고 그러든 모르고 그러든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남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속내를 드러내준 건 아닐까.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데는 피해자심리와 책임전가가 이래저래 요긴한 것 같다.

   반면, 자리를 깔아준 우리 정부가 얻은 실리는 '인도주의 사안에 최선을 다했다'는 명분 외에 별로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꼬일 대로 꼬인 남북관계에서 부담만 추가로 지게 생겼다는 거다. 우리 납북자 문제해결에 일본이 앞장서줄 가능성도 별로 없어 뒷맛이 더 씁쓸하다.

   ido@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9/03/12 11:19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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