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 전용 영화관인 롯폰기 시네마트의 전경. 일본내 한국영화 판매단가는 ‘절정기’에 견줘 평균 90%이상 떨어졌다.

지난 16일 찾은 도쿄 롯폰기의 아시아영화 전용관 ‘시네마트 롯폰기’엔 배우 이병헌씨의 얼굴사진이 건물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은 지난 3월 말부터 개관 첫돌 기념으로 한국영화 16편을 상영했다. 6주 동안 행사를 찾은 관객은 2300명 정도. 개관 당시 극장 라인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던 한국영화는 지금 60% 수준이다. 극장 운영업체인 에스피오(SPO)는 이제까지 한국영화 50여편을 사들인 이른바 ‘한국영화통’인 회사다. 데라다 다카시 에스피오 경영기획실장은 “솔직히 올해 <궁>의 디브이디 박스세트가 다른 타이틀보다 4~5배 많이 팔려 한숨 돌렸지만 한국영화는 힘들다”고 말했다.

한국영화 흥행성적 ‘뚝’…배우는 남고 돈은 안남아

한류는 식었다=한류의 ‘절정’은 짧았다. <겨울연가>와 ‘욘사마’ 붐이 불과 3년여 전이다. 최근 영화 <괴물> <왕의 남자> 등은 고전 끝에 물러났다. 다카하시 준 시네마트 롯폰기 매니저는 “안타깝지만 ‘한국영화=아이돌 영화’라는 나쁜 인식이 정착되며 좋은 한국영화들마저 고전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지나치게 올라간 판매가격, 인기배우들 위주의 기획영화 집중 탓이다. 에스피오가 개봉한 <그 해 여름>은 이병헌의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입장권 판매실적이 3억~4억엔(약 23억~31억원)에 그쳤다. 수입가가 4억엔을 넘었으니 후반작업·마케팅 비용 등은 고스란히 손실로 남는 셈이다. 너도나도 뛰어들어 가격을 올려놓은 일본 영화사들 사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한국영화를 수입·배급하는 일본 회사는 3~4곳으로, 절정기 때보다 절반 이상 줄었다. 편당 평균 판매단가도 최고가에 견주면 고작 10% 수준이다. 가도가와 영화사의 이은경씨는 “아무리 싸도 한국영화는 지금 안 산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드라마는 현재도 <풀 하우스>가 일본 민방에서, 배용준이 특별출연하는 <호텔리어>가 일본판으로 리메이크되어 방영 중이지만, <겨울연가> <대장금> 같은 화제작은 끊긴 지 오래다. 한국방송산업영상진흥원 조사로는, 지난해 일본의 한국 프로그램 수입이 2005년에 견줘 1700만달러(약 160억원)어치나 줄었다. 한국드라마 판권 사업을 하는 월드제이의 박태규 대표는 “일본 방송사에서 배용준 출연작 정도를 제외하면 시청률 감을 잡지 못하고 스폰서도 붙지 않아 꺼려 한다”고 말했다.

아직 ‘욘사마’의 인기만은 여전하다. 그러나 배우의 인기가 매출로 직결되기는 쉽지 않다. 실제 현대차는 배용준을 내세워 쏘나타 텔레비전 광고를 했는데, 광고 뒤 매장 방문자는 15배 늘었지만 매출액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팬층이 주로 나이 많은 여성층인데 소나타는 그들에게 ‘너무 큰 차’였다는 것이다. 왕현철 케이비에스 재팬 사장은 “애초에 한류라는 게 드라마 인기였다. 아무데나 ‘한류’라는 이름을 붙이고 당장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는 게 무리”라고 말했다.

‘정서적 변화’가 큰 자산…“일본 리더계층에 다가서야”

한류는 식지 않았다=그러나 전문가들은 한류가 ‘식었다’기보다 ‘정착 중’이라고, 당장 ‘유형의 이익’을 만들지 않아도 ‘정신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입을 모은다. <아사히 신문>은 최근 “한국 콘텐츠가 일본이 잊고 있던 것을 불러일으켜 마쓰모토 세초 등 인간관계를 진하게 그리는 1950년대 소설과 드라마들의 붐을 다시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원은 “‘한국의 날’을 정하는 유치원들도 생겨났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나면 한·일의 아픈 과거를 알더라도 그걸 극복해나갈 힘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한류 열풍은 기업들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자산이 되었다. 일본 삼성의 방상원 상무는 “한류 이후 파트너사 사람들과 대화 거리가 정말 풍부해졌다”며 “그들이 전부 <대장금>을 보니 우리가 안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한류는 한-일 기업의 협력관계 지형도 바꿔놨다. 소니와 삼성전자의 전략적 제휴 뒤 2005년부터 리소나-외환은행, 미쓰이 스미토모-국민은행, 신일본석유-에스케이, 엔티티도코모-엘지전자 등의 협력이 가시화됐다. 미쓰이물산 전략연구소의 김미덕 연구원은 “일본의 대표적인 대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게 큰 의미”라며 “한류 이후 한국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아시아 커뮤니티 진출을 위해 전략적으로 한국을 파트너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하마노 야스키 도쿄대 교수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정부가 앞장서 홍보하는 것보다 한국이 타자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이며, 모순까지 포함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콘텐츠를 만들 것, 그러면서 문화에서나 비즈니스에서나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국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자꾸 만들어주는 게 필요하다.” 도쿄/글·사진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후원 : 삼성전자 / SK주식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