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은 만성적자에 허우적"
"대동법과 시장경제는 무관" 낙성대연구소 학술대회(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식민지화 이전 19세기 조선에 '내재적'으로 자본주의 싹이 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동법 실시를 계기로 그것을 담당한 공인(貢人) 집단이 성장함으로써 수공업과 상업발달이 이뤄졌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경제사 전공인 성신여대 박기주(46) 교수가 공물정안(貢物定案)을 비롯한 조선시대 관련 자료를 검토한 결과 조세를 쌀로 통일한 대동법 시행 이후에도 공납제는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기본 장부인 공안(貢案) 또한 대동법 이전의 공안과 동일한 원리에 의해 작성된 사실을 밝혀냈다.
대동법 실시 이후에도 조선은 여전히 왕이 국가경제 중심에 서서 이렇게 거두어 들인 세입을 왕실 개인 사업이나 지배계층에 나누어주는 '재분배 경제' 체제에 있었다는 것이다.
왕실로 재정수입이 집중되는 바람에 중앙과 지방정부는 부족한 운영경비 마련을 위해 다른 재원을 개발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환곡을 비롯한 삼정의 문란이 나왔다. 한편 정부는 공인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그들 이외의 국내 상행위는 서울의 육의전이나 보부상과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일체 불허하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박 교수는 "대동법 실시로 인해 공납제가 폐지되었다는 통설에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면서 "19세기에도 조선은 여전히 재분배경제와 그 유지를 위한 도덕경제를 유지했으므로 자율적인 시장경제의 발전을 수용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역시 경제사가인 김재호 전남대 교수도 육전조례(六典條例)를 통해 조선후기 중앙재정의 운영실태를 점검한 결과 중앙정부에 필요한 각종 물자는 대부분 시장이 아니라 공인(貢人)에게 30만 석을 지급해 공물(貢物)로써 조달했음을 밝혀냈다.
나아가 이 시기 중앙정부는 매년 5만-10만석에 이르는 만성적인 적자재정이 구조화해 있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드러났다.
낙성대경제연구소 박희진 연구원은 조선시대에 성가가 높았던 반관만민(半官半民)적인 광주 분원 도자기 산업이 왜 20세기 이후 소멸하고 말았는지를 19세기 후반에 집중해 추적한 결과, 분원이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원료와 땔감을 국가에서 보장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에 의하면 분원은 20세기 이후 이를 지탱하던 제도적 기초가 붕괴하자 일본 도자기에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소장 이영훈)가 30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조선왕조의 재정과 시장'을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는 이영훈(서울대), 이헌창(고려대), 박기주, 김재호 교수를 비롯한 경제사학자들이 발표를 담당하고 이에 대한 토론을 국사학자들이 맡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역사학계에서는 고동환(한국과학기술대), 김선경(서울대), 양진석(서울대), 손병규(성균관대), 김덕진(광주교육대) 교수 등이 토론자로 나선다.
이 자리 또한 여타 낙성대연구소 주최 학술회의가 그러했듯 제국주의 열강 침략 이전 조선사회는 근대를 지향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성장하고 있었다는 등의 '역사학계 담론'이 과연 역사적 현실과 맞는지를 점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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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7/03/27 17:26 송고